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1년 주보

연중 제15주일 2021년 7월 11일(나해)

모든 2 2021. 7. 12. 05:12

당진성당 사기소공소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로 198-39(면천면 사기소리 산 119)

 

+ 마르코 복음 6,7-13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말씀의 향기>

 

저희도 복음을 전하는 사랑의 일꾼으로 기쁘게 살아가게 하소서-조해용 요셉 성환 보좌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에페 1,12)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으며 살아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 속에서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으로, 곧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랑의 일꾼으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주저하게 됩니다.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가진 것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등등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데 여러 조건과 상황을 생각하며 머무적거리며 망설이곤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복음을 전하는 기쁨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아무 7,12-15)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자신을 "예언자도 아니고,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 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처럼 그는 "목양업자"(아모 1,1)로서, 예언을 직업으로 삼아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며, 예언자가 되고자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가 되었을까요? 이에 대해 그는 말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으랴?"(아모 3,8)" 주님께서 나를 붙잡으셨다."(아모 7,15) 이처럼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특별히 능력이나 직업이 아닌 "주님의 부르심과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마르 5,7-13)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어 파견하시면서 지팡이 외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 그들이지만,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으며,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 제자들이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자신들을 부르신 주님의 말씀과 행적, 곧 "복음"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이 행한 회개하라는 선포도, 또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도 바로 주님의 말씀과 행적, "복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복음"을 자신들의 삶으로 살게 되었을 때 크나큰 기쁨을 체험하였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맞아 함께 바치는 '희년 기도'끝에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니다. "저희도 복음을 전하는 사랑의 일꾼으로 기쁘게 살아가게 하소서."

  복음을 전하는 사랑의 일꾼으로 기쁘게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특별한 자격도, 능력도, 준비물도, 방법도 없습니다. 그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복음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초대하시는 "복음을 전하는 기쁨의 삶"의 전부입니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서로 용서하는 화해의 은총을 내려주소서

 

대전교구 민족화회위원회에서는 6월 25일 솔뫼성지 「기억과 희망」 성당에서 교구민들의 마음을 모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6월 한 달을 '평화의 달'로 기념하였습니다.

 

  '평화의 달'매주 금요일 오전 평화 미사에서, 미사 이후 강연에서,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종전 캠페인'과 '9시 주모경 바치기'에도 집중하였습니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통하여 6월 25일 전쟁과 폭력, 고통의 기억이 가득한 날, 우리는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각각의 본당에서, 온라인에서 또 「기억과 희망」 성당에서 함께 하였습니다.

 

  세 번의 평화 미사와 강연은 조용하면서도 진지하였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첫 강연은 강주석 베드로 한국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 사제의 '천주교와 평화, 평화를 위한 교회의 역할'이라는 주제였습니다. '과거 냉전, 반공주의, 전쟁에 대한 교회의 시각 등 가톨릭교회의 반성과 함께 두려움과 증오가 만연한 이 땅의 교회가 일치와 화해를 위해 간절히 노력해야 한다. 교회가 다양성을 존중하고 포용하며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적'과 '우리'를 가르는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라고 평화를 위한 교회의 사며을 강조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정주진 박사는 '평화의 반대는 폭력-자신의 이익을 충족시키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해치며 자유를 빼앗는 모든 일-이다. 폭력은 피해자가 존재하게 되고, 관계의 파괴, 공동체의 파괴를 수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와 폭력의 개념을 대비한 설명으로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마지막 강연은 박천조 그레고리오 박사의 실제 개성공단에서 살면서 겪었던 생생한 이야기였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 실감하였습니다. 얼마나 다른지, 왜 알아가려고 노력하지 않는지에 대한 구체적 사례는 아프기도 뭉클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침묵의 교회에서 신앙인들이 매 주일 주모경 33번을 바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면 분단 70여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주모경을 바쳐야 했을까, 숫자로 보여주는 대목에서 울컥하였습니다.

 

  드디어 6월 25일,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미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참회와 반성 그리고 실천을 강조한 위원장 강론 중에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화해를 원하시고 인간에게 화해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남과 북 대립의 관계에 앞서, 바로 내 옆의 형제들과 화해하고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라는 대목은 거창한 이야기는 쉽게 하지만 매일의 삶 안에서 나를 챙기지 못하는 모습을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마무리하면서 대주교님은 '그리스도교는 구체적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만이 이웃에게 전해진다. 민족, 국적, 종교를 따지지 않고 더 많이 사랑하는 일이 우리의 일이며 이런 형제애가 남과 북 동포 사이에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저에게 '평화의 달'은 온전한 평화, 화해, 일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따지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조금 더 사랑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진희 프란치스카 대전교구 민족화해위원회-

 

 

'교회와 나'새롭게 알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앙과 삶을 배웁시다!>

 

5. 하느님의 백성과 구성원(관계)② - 하느님 백성 안에서 교계제도의 의미

 

  우리는 지금 하느님의 백성을 공부하면서 거듭 그 구성원 간의 평등성을 말하고 있다. 곧 교계제도는 평신도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백성의 동등한 구성원이라는 것이다. 교계제도와 평신도 모두 하느님 백성의 동등한 구성원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어떤 의미인가? 동등성이 양자(兩者)의 직무의 획일성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며, 양자 각각 자신들 본연의 고유성 없이 동등성은 보장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 백성 안에서 교계제도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느님 백성의 모든 구성원은 그리스도 직무의 실행자들이고, 이들 모두가 총체적으로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공동체는 동등하게 서 있으면서도 또한 서로 속해있는, 여러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공동체들의 공동체성의 표지가 바로 교계제도적 직무이다. (E. Koinger) 교계제도(주교, 사제, 부제)는 전체적 영역에서 하느님 백성의 결합의 표지이며,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드러낸다. 그런 까닭에 동료적, 친교적 제도(Kolldgiale Institution) 아다. 이는 전체 하느님 백성 자체를 조직하는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이 교계제도적 직무는 교회 공동체의 결속의 표지이다. 개별 교회(전 세계의 가톨릭 교회를 '보편 교회'라고 하고자 각 지역, 교구의 가톨릭 교회를 '개별 교회'라 함)에 공적 보편성을 보증한다. 이로써 공의회는 교계제도가 지닌 종전까지의 서열 중심의 엄격한 위계질서적 이해를 극복하고 교계제도를 명백히 하느님 백성의 제도로서 규정하고 있다. 교계제도는 하느님 백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의 봉사 안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면 교계제도적 직무가 이러한 구상에서 등한시되거나 손상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다만 그것이 기본직무의 관점 아래 숙고 됐을 뿐이다. 곧 교회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진정한 동등성 안에 결합되어 있는 공동체지만, 서로 다른 위임과 직무에서 서로 다른 기능들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공의회는 또한 교계제도에 대한 아주 세분화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교계제도가 특수하게 관계하고 있는 권한 문제에 관한 것이다. 무엇보다 공의회는 재치(裁治)적 행위와 사목적 행위를 동일시하는 잘못된 관행을 멈춘다. 사실 '재치'도 '사목'도 근본적으로는 '사목'안에서 바라볼 수 있는 개념이지만, 그럼에도 구분을 하자면, 재치는 교계제도적 차원에서 백성을 다스린다는 의미이고, 사목은 백성들 한가운데서 백성을 돌본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다. 따라서 이는 특히 한편으론 교계제도에 속하고, 다른 한편으론 성품성사에 의해 교회 안에서 고유하고 특수한 임무를 갖는 '사제'에 대한 진술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직무 사제는 특수 사제직과 보편 사제직을 함께 가지고 있는데, 이 둘은 교계제도적으로는 재치권의 의미에서, 그리고 성사적으로는 사목적 임무의 의미에서 서로에게 속해있다. 따라서 보편 사제직은 평신도들에게만이 아니라 직무 사제에게도 해당됨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하느님의 백성'과 교계제도는 공의회 이전처럼 서로 대치되는 관계가 아니라, 교계제도 역시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으로서 평신도와 함께 하나의 전체 교회를 이루고 있다.

 

-서명옥 로사 대전가톨릭대학교 기초신학 강사-

 

 


* 교구내 공소

당진성당 사기소공소



  면천 사기소리는 윗 사기소,아래 사기소,새터(새터말)라는 세 마을로 이우러어져 있으며 새터가 사기소공소 건물이 있는 마을이다. 1898년 합덕 양촌의 퀴를리에 신부가 위 사기소(64명)에서 공소를 치뤘고, 새터공소는 1901년 설립되었다. 사기소리에 뮈텔 주교가 1899년과 1906년 두번 방문한 바 있다. 
 옹기점의 성황으로 교우수가 130명에 이르렀지만 점토 부족으로 1920년대부터 교우수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1956년 양윤돈(타대오)회장을 중심으로 한옥기와 강당(8칸 규모)을 건축하였다. 1996년 공소는 폐쇄되고 건물이 방치되면서 2015년 반파되었다. 현재 사기소에는 29세대에 20여 명이 미사에 참례하고 있다.

 

 

 

<이충무의 숨은 행복 찾기(12)>

 

인생 맛은 그늘 맛

 

  하루에 적어도 세 잔 이상은 마셔야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지는 커피, 그런데 이토록 커피를 즐기면서도 얼마 전에서야 커피에 대한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커피가 원래는 '음지식물'이라는 것입니다. 까맣게 볶아진 커피 원두만 매일 봤기 때문이었을까요? 커피는 당연히 뜨거운 태양 아래서 자라나는 양지식물인 줄만 알았습니다.

 

  원래 커피나무는 그늘이 무성한 열대림에서 자라난 것이라고 합니다. 높다란 열대림들에 가려 햇빛보다 그늘에 익숙한 상태로 오랫동안 천천히 커피열매가 만들어져 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느리게 만들어진 그늘이 키운 커피의 맛은 놀랄 정도로 깊고 풍부했습니다. 그만큼 숙성의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던 결과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전엔 커피농장에서 '셰이드 트리'라고 하는 걸 심었습니다. 커피나무에게 적절한 그늘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잎이 넓은 바나나 나무 등이 바로 그 셰이드 트리였습니다.

 

  이 셰이드 트리 농법이 요즘 다시 각광받고 있습니다. 급격히 늘어난 커피 수요에 맞춰 대량생산을 위해 그늘 한 점 없이 온종일 뜨거운 태양 아래 커피나무를 재배하는 오늘날의 방식에서 많은 한계점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화학비료에 의존해 수확량을 늘었지만 품질은 떨어지고, 농부들이 처한 상황은 점점 더 열악해지는 악순환 속에서 사람들은 새삼 그늘이 키우는 커피의 소중함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되었습니다.

 

  햇빛과 그늘이 적절하게 어울릴 때야 비로소 커피의 그 오묘한 맛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통해 새삼 우리 삶에 드리워진 '그늘'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나무나 꽃이나 풀처럼 모두 햇빛 덕에 살 수 있고, 햇빛만 보면서 생존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인생의 맛은 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그늘이 우리 영혼의 풍미를 더 깊게 하고, 빛이 사라진 그늘 아래에서도 주님이 우리를 성장시켜 주시는 그 신비함 속에 참 행복이 있습니다. 인생의 진짜 맛은 어쩌면 그늘 맛이라는 생각이 드는 여름밤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 교수-

 

 

 

몸이 흐린 날

가슴 깊이 남은

한 조각 의지 불러냅니다.

 

두둑두둑

마중물 되어

마른 영혼을 적셔줍니다.

 

하느님!

참 고맙습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코로나 19... 4차 대유행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부터 가톨릭은 정부 방역지침에 따라 적극 협조하며 지금까지 이어온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낍니다.

 

 신앙인으로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죠. 변이 바이러스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그 전파속도가 대단하다고 하니 이번에도 우리 신앙인들이 앞서서 방역을 잘 지키고 잠시 느슨했던 개인위생과 사회적 거리두기에 적극 협조해야겠습니다.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지면을 통해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별 변화되는 걸 알여드릴까 합니다.

 

  대전은 2단계입니다. 수도권은 7월 12일부터 4단계로 격상해서 선지적 대응을 한다고 하니 참고하세요.(4단계는 지면에는 넣지 않았습니다.)

 

  아픈 병자에게 치유의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행적은 복음서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 시절엔 병원도 없었을 테고 병자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고 하니 아픈 것도 서러운데 위로조차 받지 못했으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겠죠. 올해 내내 주변 분들과 함께 위로의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