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4년 주보

성십자가 현양 축일 2014년 9월 14일(가해)

모든 2 2021. 5. 17. 15:30

조중원 신부(2012)

 

하느님,

외아드님의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으니,

저희가 지상에서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깨닫고.

천상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본기도-

 

+ 요한 복음 3,13-17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말씀의 향기>

 

희망의 십자가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로마 8,24) -이상준 아우구스티노 성환보좌

 

  예전에 신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십자가 하면 어떤 단어가 생각나십니까?"몇몇 신자분들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어려움, 고통, 아픔, 슬픔.. 등등"신자분들의 대답을 들으면서 많은 신아인들이 십자가를 바로 볼 때 무거운 생각을 그리고 느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 가운데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십자가의 느낌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단지 우리에게 짐을 실어주시기 위한 십자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자녀들이 보았으며, 또 봐야 하는 것은 단순히 어둡고 무거운 부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신앙인들에게 진정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죽음을 넘는 영원한 생명이고, 고통을 넘은 영광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어둠의 뒤편에 숨겨져 있던 진정한 빛을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그 위에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인들이 궁극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도, 눈에 보이는 십자가를 넘어 그 뒤에 오게 되는  예수님의 약속,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영원한 생명이라는 희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이러한 의미를 분명하게 선포하십니다."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라는 말씀을 통해 당신의 죽음은 단순한 희생이 아닌, 그 희생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이라는 희망을 믿고,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려는 예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러한 의미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시 한번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 달려 계신 예수님의 표정이 단순히 육체적 고통에 일그러진 모습이 아닌, 그 내면 속에 담겨 있는 세상을 향한 당신의 연민이며, 사람을 사랑하시는 당신의 의지이자 열정이라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 안에서 분명히 간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짐이 아닌, 예수님의 영광과 승리에 참여할 수 있는 힘이며, 우리 신앙인들이 바라보고 간직해야 할 희망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들 앞에 그리고 곁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십자가가 놓여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십자가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되돌아보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청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메시지(2)>

 

주교님들에게 남기신 메시지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는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님과 협력자인 사제들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성사 생활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면에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님께서 사도들의 후계자들인 주교님들에게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도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우리나라의 주교님들과 아시아의 주교님들과 만나시며 당부의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먼저 교황님께서는 8월 14일 한국 주교님들과 만남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주교들에게 맡겨진 양 떼를 지키는 임무를 상기시키며 기억의 지킴이가 되고 희망의 지킴이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은 신앙의 선조들이 하느님의 말씀과 직접 만나 이 땅에 복음의 아름다움과 진실함을 전해주었음을 간직하고 지키는 일입니다. 그리고 단지 고이 간직하는 것을 넘어서, 그 기억으로부터 영적인 자산을 꺼내어 미래의 희망과 약속과 도전을 직시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의 복음이 주는 희망, 순교자들을 감격시킨 그 희망의 지킴이"가 되어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희망을 지키는 것은 사제들과 함께 성화직무를 행하며 이루어지고 선교를 통해서 자라나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할 때 가능한 일이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을 외면할 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한갓 "사교 모임"이 될 뿐이라며, 번영하는 교회 안에서 안주하고픈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고 일깨우십니다.

 

  "기억"과 "희망"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미래를 향해 이끌어간다는 말씀으로 우리가 가진 고귀한 순교의 역사를 가슴에 담고 현실을 살아가며, 하느님의 뜻으로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셨습니다.

 

  둘째로 8월 17일 해미성지에서 있었던 아시아 주교님들과의 만남 때 아시아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하여 말씀해주셨습니다. 아시아의 가톨릭 교회는 참으로 작은 양 떼이지만 복음의 비치을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참된 겨자씨임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대화를 통해 화합하고 일치하여 복음을 증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바로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며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체성이 없다면 복음을 전하거나 드러내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답게 산다는 것,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다양한 유혹을 받게 됨을 지적해주십니다. 상대주의, 피상성, 안전을 선택하려는 유혹입니다. 피상성은 참으로 옳은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고 문제를 덮어버리는 현실을 의미합니다. 안전을 선택하고자 하는 유혹은 우리가 밖으로 나가길 막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신앙의 본성은 밖으로 나가는 것"이라 하십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살아있는 믿음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을 강조하시며, 우리가 맺는 열매가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사목에서, 봉사에서, 노력들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이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 결실들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까?"

 

  주교님들은 사도들의 후계자이고 지역교회를 이끌어 가는 분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교님들에게 하신 말씀은 그 교회에 속해있는 우리들이 가야하는 방향성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바로 우리 역시도 기억과 희망의 지킴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열린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갈 때, 작은 양떼인 우리 교회가 참된 겨자씨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개종 권유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매력으로 성장합니다."라는 교황님의 말씀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이충무의 행복나침반(30)>

 

소유. 공유. 향유

 

마주치는 눈빛만으로 기쁘다면...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제자 :스승님, 소유란 무엇입니까?

  스승 : 내 만족을 위해 무엇을 갖는 것이다.

  제자 : 그럼 공유는 무엇입니까?

  스승 : 내 만족을 위해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제자 : 그렇다면 향유란 무엇인지요?

  스승 : 함께하는 즐거움을 위해 무언가를 갖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도 소유의 방식과 공유의 방식이 존재합니다. 먼저 소유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연인들의 대화를 들어 볼까요?

 

  남자 : 내가 지금 뭘 필요로 하는지 몰라?

  여자 : 그런 자기는 내게 필요한 게 뭔지는 알아?

 

  아무래도 이런 방식의 대화에서는 해결책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서로 지치지도 않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끝없이 강조할 것 같지 때문이죠. 공유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연인들은 어떨까요?

 

  여자 : 내가 부탁한 것 들어줄 거지?

  남자 : 당연하지! 내가 말한 것도 잊지 않았지?

 

  공유의 방식은 공평해 보이지만 참으로 위태롭습니다. 언제까지 그 깔끔한 거래가 유지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죠. 아슬아슬한 시소게임은 결국 서로를 지치게 하고 원망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기 쉽습니다.

 

 사랑은 '향유'할 때만 진실이 됩니다. 함께하는 기쁨이 중심이 되면, 상대방이 필요로 한 것이 무엇인지 매번 알 수 없어도 상대방이 준 것만큼 줘야 한다는 계산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눈만 바라봐도 행복한 마음으로 평생을 살 수 있는 비결은 어쩌면 의외로 간단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을에 피어난 꽃처럼

청렴한 빛으로

나를 돌아보게 하시어

내 영혼

잠들지 않게 하소서.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