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4년 주보

연중 제19주일 2014년 8월 10일(가해)

모든 2 2021. 5. 17. 07:46

"용기를 내어라.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우리가 먼곳을 향해,

이 세상 끝을 향해 떠날 생각을 하며

겁내고 있을 때,

하느님은 이미 그곳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변두리와 끝에 있는

형제의 마음에서, 상처 난 몸 속에서,

억압받는 삶에서, 신앙 없는 영혼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든 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나갑시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새로운 길을 나서도록

용기를 가집시다.

(2013년 9월 27일 프란치스코 교황님 연설 중)

 

+ 마태오 복음 14,22-33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군중이 배불리 먹음 다음,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그 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 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배는 이미 물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하시자,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저를 구해 주십시오."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이 믿음이 약한 자야,왜 의심하였느냐?"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

 

 

<말씀의 향기>

 

주님,저를 구해주십시오. 지치지 말고 계속 기도하십시오. 노력이 헛되다고 느껴지더라도 인내하십시오.

기도는 언제나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 최용묵 사도요한 서산동문동 보좌-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로 가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와 동시에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지요. 베드로가 소리를 지릅니다. "주님,저를 구해주십시오."

 

  신앙인의 세상살이. 예수님 바라보면서 물 위를 걷는 것과 하나 다를 바 없습니다. 위태위태하고,거센 바람과 같은 위기가 비일비재합니다. 베드로가 느낀 두려움이 어찌 그만으 두려움이겠습니까? 그래도 그저 예수님 바라보면서 세상이라는 물 위를 오늘도 이렇게 걷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허나 부족한 인간인지라 살다보면 빠집니다. 내 탓으로 빠지기도 하고,네 탓으로 빠지기도 하고, 아차 하는 순간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은 아닙니다. 빠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빠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부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걱정하고 근심하는 데 시간을  쏟습니다. 누군가를 저주하고 분노하는 데 에너지를 쏟습니다. 용을 쓰면선 어려움을 비켜가려고 별짓을 다합니다.

 

  왜 예수님 찾지 않습니까? 왜 베드로처럼 "주님,저를 구해주십시오."소리 지르지 않습니까? 물에 빠져들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하다하다 안되면 하는 게 기도입니까? 신앙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숨입니다. 사람이 숨을 쉬지 않으면 죽습니다. 생명을 잃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은 기도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신앙이 생명을 잃는 겁니다.

 

  "주님,저를 구해주십시오." 소리 지르십시오. "이 믿음이 약한 자야,왜 의심하였느냐?" 욕 한마디 들으면 어떻습니까? 물에서 빠져나와야지요. 살아야할 것 아닙니까?  그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그 유혹에 빠졌더라도,기도하십시오. 살려면 숨을 쉬어야지요.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기도라는 숨을 쉬어야지요.

 

  형제자매여러분. 믿음이 약한 자신을,의심하는 자신을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우리가 신(神)입니까? 다만,'인간육신'이라는 십자가를 지고,숨을 쉬듯이 꾸준히 기도하면서,오늘도 내일도 예수님 바라보면서,세상이라는 물 위를 걸어가야겠습니다.

 

 

<「복음의 기쁨」을 안고 세상으로(14)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

-특히 가난한 이들을 향하여

 

  교회의 첫 선포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들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인데,이는 복음화가 하느님 나라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현존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형제애의 가르침 안에는 이미 복음의 사회적 차원이 깊이 담겨 있습니다. 불의한 사회 구조 안에서 참다운 형제에는 실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개별 인간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도 구원하십니다."

 

  복음의 가르침은 단순히 하느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에 그치지 않으며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응답을 선한 행위의 목록으로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함께 누리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과 함께 이미 하느님의 나라는 지상에 현존하며 자라고 있습니다. "보라,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마태 12,28)

 

  종교가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에 국한되어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을 영원한 행복으로 부르시면서 그들이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회개는 특히 "사회질서와 공동선 추구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합니다. 지구는 우리 공동의 집이며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입니다.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세우는 정의가 모든 정치의 목적이며 고유한 판단기준이라며,교회 역시 그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친히 "가난하게 되신"(2코린 8,9)하느님의 마음속에 가난한 이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이들이 사회에 온전히 통합될 수 있도록 가난한 이들의 해방과 진보를 위한 하느님의 도구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는 것입닏.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의 울부짖음을 들어신다는 성경의 수많은 말씀들은 만일 우리가 그 호소에 귀를 막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죄가 되고,그들과으 연대성의 결여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고 가르칩니다. 가난한 이를 돌보고 도우라는 하느님의 명령은 어쩌다가 베푸는 자선행위 차원이 아니라.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직시하고 가나한 이들의 온전하 발전을 촉진하도록 일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시장의 눈먼 힘과 보이지 않은 손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정의의 증진은 경제성장을 전제로 하면서도 더 나은 소득분배와 일자리 창출도 넘어서 가난한 이들의 온전한 진보를 요구합니다.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생활 방식에 따라 관심을 더 쏟아야 하는 다른 일들이 많아서 가나한 이들을 가까이 할 수 없다고 어느 누구도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 가난한 이들의 범주에 경제적 이윤과 무분별한 착취에 황폐해지는 자연환경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총대리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님-  

 

 

<미사 속의 숨은 보화>

 

봉헌기도 Oblatio 1

  교회는 봉헌기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우리 모두와 함께 봉헌합니다. 이 봉헌의 의미에 관해 미사 총지침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교회, 특히 지금 한자리에 모인 공동체는 이 기념제로써 티 없는 재물을 성령 안에서 성부께 봉헌한다. 교회는 교우들이 흠 없는 제물만 바칠 뿐 아니라 자신도 바치는 것을 배우기를 바란다. 그리고 중재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또한 이웃과도 나날이 더욱 일치하여,마침내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란다."

  봉헌은 우리 자신을 드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께 내가 가진 어떤 것을 넘어서 우리의 행위와 마음,존재 전체를 그 분 뜻에 맞도록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봉헌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이충무의 행복나침반(25)>

 

그분이 바라보는 것처럼

바꿔서 보면 세상이 온통 사람이다!

 

  아무도 없는 성당 안으로 나비 두 마리가 날아 들었다. 많이 지쳤는지 둘은 성당 의자 끝에 앉아 쉬기로 했다. 노랑나비가 흰나비에게 문득 이런 제안을 했다.

 

  노랑나비 : 우리 기도하자!

  흰 나  비 : 기도?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노랑나비 : 사람들보니까 두 손을 모으고 이렇게..

  흰 나  비 : 아,그거! 나도 본 적 있어, 이렇게?

 노랑나비 : 맞아,자,그럼..

 흰  나 비 : 근데 뭘 기도해?

 노랑나비 : 뭐긴 ..각자 소원을 빌면 되지.

 

  두 마리 나비가 각자 예수님을 향해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먼저 기도를 끝낸 노랑나비는 기다리기도 심심하고 호기심도 생겨 예수님이 계신 십자가를 향해 날아갔다. 그 곳에 앉아 흰나비를 바라보니 느낌이 무척 달랐다. 예수님을 올려다보며 기도할 때에는 흰나비가 보이지 않았는데,예수님의 어깨 위에서 바라보니 흰나비의 날개도 보이고, 그 날개가 더 지쳐 보이기까지 했다. 노랑나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한 번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노랑나비 : 나와 함께하는 내 친구 흰나비의 날개에도 지치지 않는 힘을 주소서!!!

 

  우리가 그토록 기다렸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이제 곧 뵐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옵니다. 교황님의 감동어린 수많은 말씀 가운데 이런 말씀이 제 마음에 오래도록 자리합니다.

 

  "신앙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시듯이 그분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토록 성당에 많이 나가고,그토록 많은 기도를 드렸건만,예수님을 올려다보기만 했지 예수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본 적 없는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교황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기도 전에 우리에게 오래전부터 소중한 선물을 주고 계셨으니 이제라도 그분 말씀의 한자락이라도 실천하는 선물을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온누리에

큰 영광.

 

글.그림 이순구 베네디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