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중동성당 화마루공소
충청남도 공주시 구부내로 861(계룡면 화헌리 85-1)
+ 요한 복음 20,19-31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하고 말하였다. 그런 토마스는 그들에게,"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앞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말씀의 향기>
우리의 일상 안에 먼저 자리하시는 자비하신 하느님 -주상연 베드로 천안신부동 보좌-
오늘 제1독서의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 구성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확인할 수 있는 몇 편의 요약문을 전해줍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목격했던 이들,그리고 그런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해들은 이들은 더 이상 이 세상의 것을 탐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사리 떨쳐내기 힘든 욕심이라는 유혹 앞에서 이들을 벗어날 수 있게 해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도들을 통해 선포된 복음의 핵심은 우리가 사순 시기 내내 자주 들었던 하느님 사랑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도들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베풀어진 하느님의 업적과 그 안에 담긴 사랑을 설명해 주었고,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선포하였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외아들조차 아낌없이 내어주셨고, 그 외아들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이미 충만히 전해지고 있었던 하느님 사랑을 깨닫게 하는 것이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초자연적으로,그리고 그 결과로 물질적 풍요를 누릴 것이라던 과거의 믿음에서 벗어나 이미 자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이 넘쳐나는 삶을 살아왔음을 깨닫게 해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은총을 부어주시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신자들로 하여금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복음에서 토마스 사도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 또한 우리를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 사랑을 보여주는 표징입니다. 하지만 토마스 사도처럼 꼭 예수님의 상처를 보아야지만 그분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저의 주님,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수많은 표징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당신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고 계십니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 매일 이용하는 피조물들을 통해 우리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충만한 은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의 일상 안에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그 자체가,아니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자비하신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표징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상이 너무도 당연하여 자비하신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때,우리는 또 다른 토마스 사도가 되어 하느님께 더 큰 은총을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기적보다 일상에서의 하느님을 만나야지만 우리 안에 믿음이 깊이 뿌리 내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자주 하느님을 만나는 만큼,우리의 신앙은 깊이 여물어가게 될 것입니다.
가톨릭 기후행동 전체회의 개최
<2020년도 활동보고>
2019.준비과정 : 2019년 11월 19일,12월 17일
2020.1.20 : 한국 가톨릭 기후 행동 출범 미사/기후행진(정동 프란치스코회장)
2020.1.10 : 성금요일부터 매주 금요일 11~12시 광화문 "기후위기"피켓시위
2020.5. 1 : 대전교구 생태환경위원회와 연대 기후행동(제23차 내포 도보 성지 순례중)
2020.5.16 : 찬미받으소서 주간 기념 미사 전 명동성당 기후위기 피켓 시위
2020.5.16 : 찬미받으소서 주간 개막미사,명동대성당
2020.5.22 : 삼척 석탄 화력 발전소 건설 막기 위한 투쟁
2020.7.시작 : 교구 간 정기적 간담회로 기후 위기 대응, 연대활동(6개 교구,수도회 참여)
2020.9.22 : 불교,원불교,유교,천도교,천주교,개신교 등 6대 종단이 모인 종교 환경 회의 및 종교인 기후 행동 선언발표
2020.10.25 : 동아리 활동-에코 노마드자양동 성당 방문
연 중 : 언론을 통한 기후 행동
가톨릭 기후 행동은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언급한 공동의 집을 보호하기 위해 2015년 1월에 조직된 전 세계 가톨릭 단체들의 연대체입니다.
현재 전 세계 900개 이상의 단체와 100만 명에 이르는 가톨릭 신자와 국제 환경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2020년 1월 20일 출럽 미사를 통해 국내외 기후 위기 비상 행동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2021년 3월 27일 제1차 가톨릭 기후 행동 전체 회의를 통해 지난 일 년의 여정을 돌아보고,현재를 정비하고,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찬미받으소서 7년 여정'계획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교회 안팎으로 더욱 행동하고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기원합니다.
<사회와 교회는 잇는 길잡이>
민족의 과거사를 떠나 현재와 미래를 위해
군종신부로 지내던 시절,낮에 병사들을 대상으로 위문과 교육을 하고 나면, 저녁에 가끔(?) 드라마를 보곤 했습니다. 특별히 떠오르는 드라마는 없지만,그나마 생각나는 드라마 중에 '시간'을 소재로 하여 만든 것이 떠오릅니다. 물론 최근에도 그러한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드라마의 내용을 보면,주인공이 시간과 공간을 이동하거나,과거의 자신과 혹은 다른 이와 연락을 주고 받으며 현재를 자신과 혹은 다른 이와 연락을 주고 받으며 현재를 바꾸려는 내용이었습니다. 주인공들은 자신이 사는 시점에서 무엇을 바꾸려 했나 보면,자기가 억울하다고 생각되는 것과 더욱 나은 현재의 자신을 만들고 싶은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과거를 바꿔 현재가 좋은 모습으로 변화되기도 하지만,그와 반대로 또 다른 고민을 만들어 내는 결과를 초래하여 더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결국 과거를 바꾸기 이전의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면서, 미래를 바꾸기 위해 현재에 충실해 나가는 모습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이런 종류의 드라마를 보면 생각해 봤던 것은,'나도 과거로 돌아갈 기회가 있다면 무엇을 바꾸려 할까?','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바꿀까?였습니다. 아마도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바꾸고 싶은 것들이 다양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에게는 드라마와 같은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지만,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정말 자신의 행복을 원한다면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면 현재의 삶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민족화해'와 관련된 생각을 해 봅니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도 71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물론 드라마처럼 우리가 전쟁발발 직전으로 가서 전쟁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민족화해'를 위해서는 과거에 집착하기보다,남과 북이 현재와 가까운 미래를 위해 같은 꿈을 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비록 북녘의 민족이 우리와 달리 생각하고 있다 하더라도,남측의 우리라도 먼저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남북한의 하나됨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좋은 모습이기도 하지만,훗날 후손들에게 좋은 세상을 물려주게 되는 것임을 항상 기억했으면 합니다.
-권지훈 베드로 신부 대전교구 민족화해위원회-
'교회와 나'새롭게 알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앙과 삶을 배웁시다!>
2. 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인가? ②-사목 공의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어떤 공의회인지 알아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의회 이전과 이후의 차이를 비교해 보는 것이다. 지난 회에 일별했듯,이전 공의회들이 교의진술에 반하는 세상 오류들을 다루고 그것을 단죄해 왔던 것과 달리,이 공의회는 어떤 것도 단죄하는 일 없이 오로지 '교회'가 무엇인가를 들여다보았다. 그 때문에 '교회에 관한 교회의 누구인지 또 교회가 어떻게 자신의 신앙사건과 함께 이 급변하는 세상에서 계속 존재 할 수 있는지 물으며,그 답을 현재 세상과 오늘날의 모든 사람과 대화하는 가운데 찾고자 했다. 곧 세상을 위한,세상의 교회어어야 하는 소명을 분명히 인식한 것이다. 그에 따라 공의회는 닫힌 교회의 창문을 열고 개방과 소통으로의 변화를 이루어 내는데,그것이 종전까지와는 획기적으로 달라진,교회 자신과 세상과 타종교에 대한 교회의 자세로 나타난다. 이 세 가지 변화는 그대로 이 공의회의 본질적 핵심사건이자 앞으로 공부해 나갈 큰 줄기이므로 계속해서 다루어질 터,오늘은 다만 그 엄청난 변화를 가능케 한 동력이자 길이 무엇인지를 살필 참이다.
그것은 바로 '사목!'사실 이 공의회의 성격을 특징짓는 단 한 단어가 있다면,그것은 '사목'이라 할 만큼 '사목'의 의미와 중요성의 재발견은 이 공의회가 지니는 교회사적,교의학적 의의에 지대한 기여를 한다. 그렇다면 사목이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이말은 본래,(이론적이 아닌)실제적 '영적 돌봄'(영혼을 보살핌)이란 의미이다. 이 사목의 원리를 독일 신학자 싸우어(H.Sauer)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드는 실존형태'라고 탁월하게 묘사한다. 곧 역사상 실재한 (우리와 같은)한 인간,나자렛 예수가 신앙의 대상인 그리스도(구원자)가 되는,실재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실제 삶 속에서 하느님이 설명되고 드러나는 것인데,이는 인간 예수의 삶(말과 행위)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되고 드러난다는 의미다. 이를 '교회'로 바꿔 말하면,교회의 가르침이 개인의 신앙사와 유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이 곧 (교회의)삶으로 드러나고 삶이 가르침 안에 표현된다는 것이다.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요한 23세는 이러한 가르침(교의)과 삶(사목)의 밀접한 상관성을 강조하면서,이 공의회가'사목 공의회'임을 명백히 제시한다.
이 사목의 개념은 흔히 본당에서 신자들을 돌보는 활동에 국한되는 것으로 오해되곤 하는데,사목은 그러한 기본 기능과 더불어 신학의 모든 문제,그리스도교적 삶의 모든 영역과 사회의 모든 분야와 관계한다. 온전한 의미에서의 사목은 영적 활동과 세속적 활동을 포함하며,따라서 인간 사회에 주어져 있는 모든 정신적,물질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결국 사목적이라는 것은 하느님이 계시고 활동하시는 곳,곧 인간들이 있는 그곳에 존재하고 활동하는 것이다.(예수님의 삶을 보며!)사람들을 위해 거기 있는 것이고 그렇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며, 이것이 교회의 본질을 총체적으로 (교리와 실천 모두)결정하는 것이다.이런 의미에서 공의회는 하느님의 백성(교회)전체가 인간과 세상에 대하여 봉사하고 연대하는 것을 사목으로 이해한다.
-서명옥 로사 대전가톨릭대학교 기초신학 강사-
* 교구내 공소 공주중동성당 화마루공소 화마루공소는 1942년 하대리에 살던 박 안드레아와 갈매울공소 출신의 옹기 기술자들이 이주하여 24명으로 공동체가 시작되었다. 1948년 논산본당 관할 공소로 설정되어 생제 신부가 공소를 방문하였다. 한국전쟁 후 1956년 이신문 시몬 회장을 중심으로 1년 6개월만에 22평 크기의 강당을 신축하였다. 공소는 1957년 공주본당에 귀속되었고, 인근 여러 마을까지 전교활동에 힘입어 신자수는 1962년에 180명을 기록하였다. 도로 확장에 따라 1989년 11월 현재의 공소(160㎡) 부속 건물을 신축하여 경 요셉 주교의 집전으로 축복식을 가졌다.현재,평균 30여 명의 신자들이 전례에 참례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
<이충무의 숨은 행복 찾기(2)>
날벌레도 꽃
기다림이 간절해지면 눈길이 바빠지기 마련입니다. 버스가 빨리 오길 바라면 버스가 오게 될 쪽을 자꾸 바라보게 되고,카페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면 출입문 쪽에 자꾸 눈길이 갑니다.
요즘 들어 제 눈길은 수시로 창밖을 향합니다. 단조로웠던 겨울 풍경이 화사한 봄 풍경으로 얼른 바뀌길 바라는 마음이 그만큼 간절해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창밖을 바라보던 제 눈에 작은 날벌레 몇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겨우내 보이지 않던 날벌레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갑자기 그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해지니 유리창 위의 작은 날벌레들에게조차 눈길이 머물고,그 눈길 끝에서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습니다. 봄은 꽃으로부터 오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의당 봄 풍경의 시작은 꽃인 줄만 알았습니다. 늘 화사한 꽃들로부터 봄이 시작되는 줄 알았습니다. 꽃이 와야 봄이 오고, 봄이 와야 나들이하러 가는 거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야 깨닫습니다. 꽃보다 먼저 이름 모를 작은 생명에서부터 이미 봄이 오고 있었음을..이름모를 작은 날벌레도 한 송이 꽃만큼이나 아름답다는 것을...
봄이 반가운 것은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걸 다시 우리 앞에 되돌려 주기 때문입니다. 꽃만 반갑고 날벌레는 반갑지 않은 건 봄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꽃만 기다린 겁니다.
온 생명을 반가움으로 바라보면 봄은 훨씬 더 아름답고 따뜻해집니다. 꽃이 피기도 전에 벌써 봄이 내곁에 와 있음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벌레를 벌레 보듯이 하지 않고 한 송이 꽃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시는 하느님.. 기쁘기 그지없는 부활절에 세상 모든 소중한 생명과 함께 우리 앞에 서 계시는 분...
코로나로 인해 오랜 시간 암울함 속에 살아가면서도 당신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이 더욱더 간절해지기에,오늘도 저의 눈길은 자꾸만 십자가 위에 머물고 또 머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주님은
늘 우리에게 계시지만
그 존재를
수시로 의문하는
우리의 구겨진 영혼
굽어 살펴 주옵시고
우리의
밝고 맑은 영혼으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게 해주소서.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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