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 복음 20,1-9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씀의 향기>
한계 없는 사랑이 드러난 그리스도의 부활! -윤진우 세례자요한 주교좌 대흥동 제1보좌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코로나19로 힘들고 지친 시기 속에서 맞이한 부활이기에 올해의 기쁨이 특별하게 와닿습니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이러한 부활의 기쁨을 구체적으로 받아 들이고 나눴으면 합니다.
오늘 미사의 본기도는 우리가 맞이한 기쁨에 대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외아드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주셨나이다."이 기도문을 묵상하다 보면,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치워주셨고, 새 생명으로 나아갈 통로를 마련 하셨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른 아침에 돌이 치워져 있는 무덤을 확인함으로써 죽음과 부활이라는 가로막힌 통로가 열렸음을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아무리 열심히 살아간다 하더라도,거대한 장벽으로 가로막힘을 확인한다면 무기력해질 것입니다. 그런 우리는 부활을 통해 거대한 장벽이 치워졌고, 이제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이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아울러 이러한 기쁨은 어느 성인의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입니다. 탄생 200주년 희년을 살고 있는 우리드에게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발자취는 구체적인 기쁨을 남겨줍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한계 속에서도 희생하심으로써 거대한 장벽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칠흑 같은 어둔 밤에 있던 백성들에게 빛을 전해주시고, 길잡이 하나 제대로 없던 우리 교ㅚ에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죽음과 생명이라는 단절된 길을 열어주신 그리스도,그리고 천상과 지상을 연결해주는 통로를 열어주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발자취를 통해서 우리는 한계 없는 사랑에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tutti)"의 마지막에 "창조주께 드리는 기도"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봉헌하십니다. "저희가 이 땅의 모든 민족과 나라를 향하여 마음을 열어..일치와 공동 계획과 함께 나누는 희망의 유대를 굳건히 다지게 하소서." 이제는 우리가 그 기쁨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일치하여 함께 그 거룩한 길로 걸어가는 삶. 이것이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이들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주님 안에 사랑하는 대전교구 공동체 여러분,우리 모두 부활의 기쁨을 마음껏 누립시다. 그리고 이 기쁨을 다른 이들에게 널리 전합시다. 힘겨운 시대를 살고 있지만,분명 주님께서는 불가능이라는 한계를 치워주셨고,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한계 없이 사랑의 길을 걸어갈 차례입니다. 그 길을 함께 걷고,함께 격려하며 기쁨을 나눈다면,오늘의 기쁨은 이 세상의 어려움을 이겨낼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모든 분들에게 부활의 기쁨을 나누며,우리 함께 주님께서 열어주신 그 빛 속으로 걸어갑시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중요한 것은 경제가 아니라 천지자연이다
올해 서울의 벚꽃이 100년 만에 가장 빨리 피었다며 온난화를 걱정하는 기사를 읽었다. 날씨는 변화무쌍한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나,기후가 너무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어 농사짓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기후재난을 막을 수 있는 적극적인 방법은 대기 중의 온실가스를 포집할 수 있는 유기농사를 짓는 것이다. 유기농사를 지으시는가톨릭농민회원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농본주의를 말한다》(녹색평론사,2021년),우네유타카 지음,김형수 옮김
농본주의란,농사를 '농업(農業)'이 아니라 '농사(農事)'로 보는 관점을 되찾는 것이다. 농업은 농사의 일부분일 뿐인데 그것을 농사의 전부로 만들어온 것이 근대 자본주의였다. 그러므로 근대화란 '농사의 농업화(산업화)이자 자본주의화'였는데, 그 차이를 우네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는 농본주의의 눈이고,<>는 자본주의의 눈이다.)
'소득'은 [농사에 대한 평가의 일례]에 불과했는데,<농업 가치의 대부분>이 되었다.
'노동시간'은 [시간을 잊어버리는 편이 좋은]것이었는데,<좋은 노동의 기준>이 됐다.
'이윤'이 생기면 [천지자연으로 되돌리는]것이 온당했는데,<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수>로서 자기 소유로 취한다.
'수확량'은 [천지자연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양]이었는데, <농업기술의 성과>가 됐다.
우네는 말한다.
"농민이 가장 행복을 느낄 때는 천지자연과 하나가 돼서 행복한지 어떤지조차 모를 때다,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상태로, 자아실현과는 조금 다른 세계다. 농민의 관점은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천지자연에 대해서다. 예를 들면 올챙이가 평년보다 적으면 신경이 쓰인다. 그러나 다음 해에 정상으로 돌아오면 깊은 안도감을 느낀다." 왜그럴까?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무엇이 소중한지 알기 때문이다. -격월간지「녹색평론」,177호에서 발췌-
'교회와 나'새롭게 알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앙과 삶을 배웁시다!>
2. 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인가? ①- 바로 지금 우리 시대 공의회
하느님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이 무엇이라 생각하세요?"라고 강의 중 신학생들이나 신자 분들(교리 신학원)에게 질문하는 경우가 있다. 미리 작성한 것이 아닌데도 어느 순간 꼭 그 물음을 던질 때를 만나곤 한다. 지면 관계상 그 대답들을 다 나열할 순 없으니,1순위를 차지하는 답만 알리자면, 단연 '사랑'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16)라고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으니,어찌 이 답을 틀리다 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좀 더 숙고해 보아야 한다. 이 타종교들의 창시자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하느님만의 이 타종교들의 창시자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하느님만의 특성이 과연 무엇일까를.. 그것은 '살아계시는'하느님이라 해야 할 것이다. 석가모니와 공자가 위대한 성인(聖人)일 수 있을지언정 명백히 지금 살아있진 않다.언제나 살아계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우리 선조들도, 오늘의 우리도, 미래의 후손들도 동시대인으로서 그분을 만날 수 있고, 그분과 늘 살아있는 체험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서설이 좀 길었다. 누군가 왜 옛 사건(1962-1965)을 새 시대의 탄생이라 하고, 게다가 오늘 우리 시대 공의회라고 말하는지 의구심을 품을까 하여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먼저 모셨다. 이 살아계신 하느님은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통해서 선포되기에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개별적 하느님 체험이라도 그러하다.)이 교회가 우리에게 전하는 최고 권위의 가르침은 공의화를 통해 천명된다. 그리고 교회사의 마지막 공의회이자 여전히 진행 중인 현재의 공의회가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다.
따라서 현대 가톨릭 교회의 토대와 중심과 목표와 방향,가톨릭 교회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다 해도, 또는 일상에 묻혀 잊고 있었다 해도, 교회를 이루고 있는 모든 이에게,그가 사제이든,수도자이든,본당사목회장이든,전례봉사자이든,청년회원이든,주일학교 어린이이든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해당되는 말이다. 바로 그 때문에 이 공의회의 정신과 믿음을 알아야 할 필요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 활동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무엇을 위해 그 일을 하고 있는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활동의 방향을 끊임없이 점검하는 척도가 되어 줄 것이다.
이렇게 이 공의회는 전체 가톨릭 교회사적 의미로 보나 그 가르침의 의의로 보나 현대 가톨릭 교회에 최고권위를 지닌 아주 중대하고 획기적인 사건이 되는데,그렇다면 이 공의회가 이전의 공의회들과 다른 결정적 특징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이전 공의회들이 세상의 오류들을 다루면서 그것을 단죄해 왔던 것과 달리,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교회'자체를 다루었고 교회 자신에 대해 물었다는 데에 있다. 곧 교회를 전체적,중심적 주제로 삼아 교회와 교회 자신,교회와 세상,그리고 교회와 타종교와의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시대의 징표를 인식하며 바로 보고자 했고, 그 답을 교회의 쇄신을 통해,곧 교회의 원천이자 미래이며 교회실존의 중심인 그리스도를 기초로 찾고자 한 것이다.
-서명옥 로사 대전가톨릭대학교 기초신학 강사-
<이충무의 숨은 행복 찾기>(1)
흔들리지 안는 편안함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란 침대광고 문구가 귓가에 자꾸 맴도는 것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침대가 불편해서가 아니라,지금 내 삶이 시도 때도 없이 그만큼 자주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증권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는데 여기저기서 증권이야기를 하면 나도 모르게 흔들리고, 연일 넘쳐나는 건강정보를 자꾸 접하다 보면 나도 이 나이에 뭐라도 하나쯤 챙겨 먹어야 하나 흔들립니다.
홈쇼핑을 보다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데 빨리 주문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에 흔들리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 이야기만 나오면 나도 모르게 열을 내며 흔들리니,어찌'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란 광고 문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을까요?
뱃멀리는 오직 배에서만 느끼는 증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삶의 바다에도 뱃멀리는 피해 갈 수 없는 고통입니다. 산다는 것 어쩌면 크고 작은 '흔들림'의 연속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흔들린다고 해서 늘 실수하고 손해 보는 건 아닙니다. '나무는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만큼 단단한 가지를 얻는 것'이라고 노래한 어느 시인의 말처럼, 흔를리는 만큼 더 단단해지는 것이 우리 삶에도 있기 마련입니다.
제게 있어 흔들리면서 더 단단해지는 것은 주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의 뜻은 언제나 옳고,그 뜻에 나를 맡기면 흔들리면서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는 이 순간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만 기억하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흔들리지 않는 편안한 침대 위에 누워도 마음이 흔들리면 불면의 밤을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면 침대가 다소 흔들린다 해도 우리 마음이 고요하면 평화로운 잠을 청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제게 어김없이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주시는 주님! 주님이 부활하여 제게 오심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바로 여기 이 편안함 안에 있습니다.
- 이충무 바오로 /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생명이신 주님!
우리의 영혼에
환하게
환하게
피어나시니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다시 피어납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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