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1년 주보

연중 제8주일 2011년 2월 27일(가해)

모든 2 2021. 4. 4. 00:05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먹을까!」(2011),백 현 신부

무료급식소 '성모의 집'봉사자들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를 먹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6,24-34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시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 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마실까?','무엇을 차려입을까?'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말씀의 향기>

 

걱정하지 마라 -"'더' 봐는 '덜'의 삶. 그것은 축제"   - 정지풍 아킬레오.성거산 성지 주임

 

  산 넘어 산이 있다 하여도 아니 갈 수 없는 것이 우리들 인생의 여정이다.

  삶이란 고난과 고통의 연속인 것처럼 느껴지지만,지나고 나면 '그 자리가 가시방석이 아닌 꽃자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당장 현실에 직면하게 되면 산재한 많은 일들에 자신의 손이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에 거스를 수 없는 한계를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한계에 봉착하게 될 때 우리 안에 걱정이 자리를 잡는다.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몸과 마음을 비우고 비우려 해도, 어느새 또 다시 차있는 그 자리는 내 영혼 안에서 터줏대감같이 소유욕이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마실까,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마태6,31)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경계하시는 것은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조바심하는 마음이다. 걱정을 한다고 해서 걱정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마음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어떤 문제에 부딪치면 금방 부정적인 불안의 상태로 보여지는 것이다.

 

  걱정은 오히려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우리 내면의 힘을 약화시킨다. 걱정의 뿌리에는 '더'를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 '더 많이', '더 크게'.'더 빨리'라는 구호속에서 우리 영혼은 창백해진다. 하지만 욕망의 그릇을 작게 하면 걱정은 줄어든다. 걱정은 하느님이 주도하시며 인도하실 자리를 인간으 성취 욕구에 빼앗길 때 나타난다. 그리하여 욕망에 종속되어 나오는 걱정은 인간을 우울에 빠지게 만든다. 한시라도 빨리 그 악순환에서 벗어나서 그런 생각을 잘라 버려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먹을 것과 입을 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우리가 익혀야 할 삶의 기술은 작은 것에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우리가 익혀야 할 삶의 기술은 작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기를 배우는 것이다. '더'가 아니라 '덜'의 삶을 터득하면 삶은 축제가 될 수 있다. 덜 갖고 덜 쓰기로 작정하면 삶이 가벼워질 것이다.

 

  사실  오늘 복음 말씀은 현대인들에게는 바보와 같은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그 바보는 거꾸로 생각할 줄 알고 상식을 뒤집을 줄 아는 사람이다. 이런 바보와 같은 생각은 성공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의미있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만이 선택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일 것이다.

 

 

<시복 시성을 준비하며>

 

현대 순교자들의 시복 ②

 

  6.25전쟁을 전후하여 죽임을 당한 신앙인들을 순교자로 보기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은 당시의 국제정세,남북한의 정치상황,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관계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와 공산주의 간의 갈둥도 한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 와중에서 죽임을 당한 이들을 순교자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19세기 유럽에서 공산주의가 태종할 때부터 가톨릭교회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공산주의는 유물론을 근간으로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기 때문에 가톨릭의 가르침과 다르고, 이상사회 건설을 위한 방법론 역시 가톨릭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때문에 역대 교황들은 어떤 형태로든 공산주의와 협력해서는 안 된다고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였다.

 

  교황들의 가르침은 한국에 그대로 전해졌고 우리 교회는 이를 충분히 따랐다. 그런데 한국에 전파된 공산주의는 1919년 3.1 운동 이후 고조되어 일제강점기 동안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에 영향을 미치며 성장하였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제는 공산주의 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하였는데, 한국 교회 역시 반공주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드러나는 현상을 보면 한민족의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에 천주교회도 반대하는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시작된 우리 교회와 공산주의 간의 골은 해방 이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더욱 깊어졌다. 한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연길교구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중국 공산당에 체포되고,북한의 교회 역시 공산정권에 의해 점점 붕괴되고 있다는 소식이 남한에 전재지면서 남한 교회의 반공운동이 극에 달한 가운데 6.25전쟁이 발발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왜 우리 교회를 그토록 핍박했는지는 전쟁 당시 그들이 내세운 주장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① 3.1운동 때 천주교회는 개인이나 단체가 참가한 일이 없다.②일제강점기 때 일제에 항거하지 않고 충성을 다했다.

③ 로마 교황이 미국 상인들과 결탁하여 세계 인민을 착취했다.④ 노기남 주교가 이승만 역도와 공모하고 북침을 계획했다.

⑤ 신부들이 신자들을 착취하여 사복을 채우므로 신자들을 곤경에 처하게 했다.⑥ 문화,경제,산업발전에 아무 공헌도 못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일면 맞는 것도 있지만 실제의 역사 사실과는 크게 다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주장이 맞느냐가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혐의를 적용했다는 점이다. 특히 지도층에 있는 성직자와 수도자,본당에서 주요  직책을 맡고 있는 신자들에게 그러하였다.

 

  -내포교회사 연구소장 김정환 신부-

 

 

 

<지요하와 함께 하는 믿음살이 풍경>

 

미사 중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마다

 

  태안본당 공소 시절,내 중학생 때였습니다. 서산본당에서 신부님이 오셔서 주일미사에 참례하려고 강당 안으로 들어서니 문 가까이 '복사'님이 서 계셨습니다. 태안에 와서 공소를 세우고 교회의 기초를 닦으신 루까 복사님은 당시 60대 노인이셨지요. 나는 공손히 허리 굽혀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복사님은 내 인사도 받지 않고 굳은 표정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성당 안에서는 사람한테는 인사를 하지 않는 법이야."나는 적이 무안했지만,그 말뜻을 금방 이해하였습니다. 잘 명심하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기로 단단히 마음먹었지요.

 

  그 후로 나는 성당 안에서는 아무에게도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성당 안에서 노인을 뵙게 되면 인사를 하려고 했다가도, 그때마다 복사님의 말씀이 떠오른곤 해서 인사를 그만두다보니 그것은 차차 버릇이 되어 버렸습니다.

 

  1964년 태안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돈 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더불어 여러 가지 벼놔가 생겨났습니다. 우선 제대의 위치가 달라졌습니다. 성당 벽에 붙듯이 제대가 설치되어 사제께서 신자들을 등지고 미사를 지냈는데,어느 날부터 제대가 벽에서 떨어지더니 사제께서 신자들을 마주보고 미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성체 전으 '평화예식'이 좀 더 확실해지게 되었습니다. 처으에는 "진심으로 축복합닏."하며 옆 사람끼리 고개만 숙였는데,1980년대 중반 이후 "평화를 빕니다."로 바뀌면서 전후좌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이 사람 저 사람 서로 악수를 하는 풍경까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결 정답고 즐겁고 생동감 있는 미사가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미사 중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는 가끔 옛날 '복사님' 생각이 납니다. 사제께서 신자들을 서로 '확실하게'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도,'하느님이 계시는 성당 안에서는 사람한테 인사를 하지 않는 법'이라는 성복사님의 그 고정관념과 관습은 전혀 변하지를 않았지요.  고등학생 시절 또 한 번 성당 안에서 복사님께 인사를 드렸다가 다시 꾸중을 들었던 기억도 생생하답니다.

 

  그 후 나는 사람의 고정관념과 관습이라는 것은 대개 너무도 완고하여  시대의 변화와 전혀 상관없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정관념과 관습의 틀을 깨는 변화 운동은 언제나 지속되기 마련입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나뭇잎을 흔드는 바람,바윗돌에도 구머을 내는 물의 흐름이 지속되는 한 우리는 늘 변화 속에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지요하(소설가,태안성당)

 

 

어리석음을

죄로 알지 못하는

죄를

용서하소서.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