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김해자
잉태다
온몸이 자궁인 흙이
어둠속에서 싹을 키우듯
딸아, 모든 사랑은 잉태다
부디 순산하여라
밖에서 끄집어내는 제왕절개 말고
꽃도 못 피고 사그라질까 미리 얼굴 내미는
여름 코스모스같이 조산하지 말고
어찌할 수 없이 밀려나오는 불가항력으로
깊은 우물에서 솟아오른다 사랑은
수천의 어머니가 그 어머니의 어머니가 숨쉬는
우물 밑에 강물이 흐르고 그 아래
천 년 기다려 비상을 꿈꾸는 이무기가 숨쉰단다
사랑은 네 속의 이무기를 날게 하는 것
정녕 솟구치려무나 이무기와 함께
버버리 곡꾼/김해자
봄여름가을 집도 없이 짚으로
이엉 엮은 초분 옆에 살던 버버리,
말이라곤 어버버버버밖에 모르던 그 여자는
동네 초상이 나면 귀신같이 알고 와서 곡을 했네
옷 한 벌 얻어 입고 때 되면 밥 얻어먹고 내내 울었네
덕지덕지 껴입은 품에서 서리서리 풀려나오는 구음이 조등을 적셨네
그 여자 울음은 모음,
뜻은 알 길 없었지만 으어어 어으으
노래하는 동안은 떼 지어 뒤쫓아 다니던 아이들 돌팔매도 멈췄네
어딜 보는지 종잡을 수 없는 사팔뜨기 같은 눈에서 눈물 떨어지는 동안은
짚으로 둘둘 만 어린아이 풀무덤이 생기면 그 여자는
관도 없는 주검 곁에 아주 살았네
으어어어 버버버 토닥토닥 아기 재우는 듯
무덤가에 핀 고사리 삐비꽃 억새 철따라 꽃무덤 장식했네
살아서 죽음과 포개진 그 여자는 꽃 바치러 왔네 이 세상에
노래하러 왔네 맞으러 왔네 대신 울어주러 왔네
어느 해 흰 눈 속에 파묻힌 그 여자는 결국
소리 없이 돌아가려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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