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동의 한 아이에게/김사인
춥지 않느냐
외진 신작로 마른 먼지길
오똑하게 혼자서 가고 있는 아이야
해진 팔꿈치와 옷소매
쩍쩍 갈라진 네 조그만 주먹을 보며
꼬옥 움켜쥔 낡은 책가방을 보며
내 가슴은 사정없이 무너지는데
코 끝에 성가신 콧물을 문지르며
씩 웃는 네 얼굴은 말 못 할 맑음으로 눈부시다
목숨의 소중함과 사랑을 떳떳이 말하지 못하여
이제 내가 할 말은
‘춥지 않느냐’는 물음뿐
추위와 가난을 썩 앞질러 야무지게 걸음을 옮기는
조그만 들에 대고
네가 자라 더 거센 추위가 닥칠지라도
오늘의 이 눈빛 잃지 말고
힘차게 북을 치며 나아가라고
속으로만,
그러나 목이 터져라 나는 외치는데
들리느냐, 아하 우리들의 아이야
-「밤에 쓰는 편지」-
딸년을 안고/김사인
한 살 배기 딸년을 꼭 안아보면
술이 번쩍 깬다 그 가벼운 몸이 우주의 무게인 듯
엄숙하고 슬퍼진다
이 목숨 하나 건지자고
하늘이 날 세상에 냈나 싶다
사지육신 주시고 밥도 벌게 하는가 싶다
사람의 애비된 자 어느 누구 안 그러리
그런데 소문에는
단추 하나로 이 목숨들 단숨에 녹게 돼 있다고도 하고
미친 세월 끝없을 거라고도 하고
하여, 한 가지 부탁한다 칼 쥔 자들아
오늘 하루 일찍 돌아가
입을 반쯤 벌리고 잠든 너희 새끼들
그 바알간 귓밥 한번 들여다보아라
귀 뒤로 어리는 황홀한 실핏줄들
한 번만 들여다보아라
부탁한다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김사인
하느님
가령 이런 시는
다시 한번 공들여 옮겨적는 것만으로
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주실 수 없을까요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난 다리만 혼자서 허전하게 남아 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라는 시인데
(좋은 시는 얼마든지 있다구요?)
안되겠다면 도리없지요
그렇지만 하느님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는 말아주세요, 모쪼록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이 시는 이성선 시인의 ‘다리’라는 시와 ‘별을 보며’라는 시를 빌려온 것이다.
코스모스/김사인
누구도 핍박해 본 적이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지께 여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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