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0년 주보

연중 제7주일 2020년 2월 23일(가해)

모든 2 2020. 2. 23. 21:00

 

 

주르바란「성녀 루치아」104×77cm.

캔버스에 유채,워싱턴,내셔널 갤러리

 

 

  +  마태오 복음 5,38-48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눈은 눈으로,이는 이로,'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빰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ㅇ요하건든,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씀의 향기>


  마지막인 것처럼  -이상준 아우구스티노 관저동 주임-

 

  '첫 본당 주임 그리고 5년 차'라는 상황에 마주하고 있는 나의 모습과 더불어 정화와 사랑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기회의 시기인 사순을 준비하며 본당에서 있었던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또한 성찰을 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반성과 후회는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머리와 마음에서는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게 한다. 본당에서 어떠한 결정을 할 때,그리고 사람들을 대할 때 '정말 최선을 다했는가?'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 답이 예수님의 삶과 그분의 가르침에 맡겨진 것이라고 한다면,적어도 나는 그 상황에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일상에 있었던 여러 가지 상황과 일들로서 쉽게 대했던 것은 아닌지 말이다. 그리고 오늘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의 태도와 자세를 되돌아보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이성과 판단을 넘어 어쩌면 당시의 사람들이 당연하게 지켜오던 규정을 흔들어(?) 놓으신다. "원수를 사랑하여라."이 가르침은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많은 혼란을 주었을 것이다. 어쩌면 구약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내용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인간을 완성하시고 자신의 나라에 부르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지를 알고 있다면 그 내용이 당시의 백성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자 했던 그분의 뜻이 담겨져 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지향과 의지가 담겨 있고,동시에 그 삶의 선택을 통해 구원의 길을우리에게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인간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당신의 모범을 통해 당신의 자녀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어울리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기회 역시 허락하심을 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과 모범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 기회를 주셨고, 그 기회에 동참하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답은 '마지막'이라는 단어와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모든 사람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삶의 모습은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마지막은 아닐 지 몰라도 마지막'인 것처럼 사람에게 다가가시어 대하시고,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 순간을 만남을 통해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마지막으로 줄 수 있는 것처럼,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리고 지금의 우리를 대하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예수님의 모습과 삶이 담겨 있는 성사와 그분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성경을 통해서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그 기회를 끊임없이 주고 있다. 당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은 아닐 수 있지만 마지막인 것처럼 기회를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그 기회를 허락하신다.

  나는 과연 그렇게 신자들과 사람들을 대하였는지를 되돌아보면서,우리는 그 마지막을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그리고 그 기회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생명의 문화를 이루기 위한 키워드

생육성-생명을 전달하는 기쁨2

 

 

  '생육성'이란 생소한 이 말의 핵심은,생명을 전당하는 것이 주는 기쁨이다.

  철학자 파스칼이 말한 인간의 세 가지 차원(육체,정신,마음)을 따른다면,생명은 단순히 생물학적 차원만이 아니라 모든 차원,곧 육체적,정신적,영적 차원을 아우른다. 그리고 전달 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인식을 뛰어넘고 심지어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기술로써의 윤리마저 뛰어넘어,'사는 맛'(행복)을 전달한다.

 

  철학자 헤겔은 "장미는 이유없이 존재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어린 아기를 생각해 보자. 한 아기가 존재하고 살아가며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단순한 행복이며, 이 단순한 행복 자체가 창조의 정당성을 변호한다. 이 아이를 권리의 대상으로 삼을 어떠한 이유도 없다. 그는 개별적인 주체로서 자신의 인간성 안에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인간학적인 자명함은 신앙의 내용을 통해 더욱 배가된다. 곧 신앙의 내용이란,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삼위일체적이고 창조적인 기쁨인 생명을 나누는 것이다. 유일하신 하느님의 삼위일체적인 친교의 유일한 법칙이자, 창조 신비의 유일한 법칙은 "다름을 유지하면서 누리는 친교의 기쁨"이다.

  어느 날 첫영성체 교리 중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네, 그것 참 단순하네요.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거네요. 우리가 하느님께 가도록 하기 위해서요."아이의 말 속에서,우리는 성 레오 대(大)교황의 성탄 강론마저 들을 수 있다.

  이처럼 만일 우리가 '인간의 성별'이나,남성과 여성사이에서 '배제와 갈등,대립'에 관하여,'너무 단순하고 밋밋하게'대화하지 않으려면,그보다 오히려 '본래의 것', '원천'에 관하여,곧 생명을 전달하는 기쁨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여 숙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남녀 결합(부부)의 역사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인류의' 또는,'그리스도와 교회의'혼인에서 비롯된 모든 계약의 역사를 재발견할 것이다.

 

  따라서 '혼인'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학도 그리스도교신자 부부가 구체적인 상징을 제고한다고 말함에 있어,그 상징이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그것을 가시적으로 드러내 보여 준다는 것이다. 이때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인간적인 계약 안에서 드러나는 서로의 기쁨만이 아니다. 약속과 성실로 실현하는 시간 전체(인생)의 성화와 특별히 이 시간을 영원의 모상,영원의 출산으로 만드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곧 생명의 전달이 이루어지도록 출사하면서 탄생을 선사한다. 이어서 탄생한 아이게게 초연함 안에서 애착을 둔다. 이는 그 아이가 자신의 차례가 되면 그도 가서 생명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며, 가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복음이야말로,생명을 전달하는 우리들에게 전해준 삶의 기쁨으로,생육성에 대해 계속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영일 야고보 신부 주교회의 생명운동본부 대전교구 담당 -

 

 

 

 

주님!

기도합니다.

 

모든 분야의 정이로움이

이 땅의 순리가 되게 하시고

무지몽매함을 자행하는

우리의 한쪽도 버리지 마시고

진실을 깨닫고 행하여

그 상처 위에

아름다운 꽃 피게 하소서.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