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노초 고촐리「동방박사의 여행」(부분)
발다살의 모습,프레스코 벽화,피렌체,
메디치 궁(리카르도 궁)
+ 마태오 복음 2,13-15,19-23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박사들이 돌아간 뒤,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내가 너에게 일러 줄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헤로데가 죽자,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말씀의 향기>
사실 나도 한때 나자렛 사람 예수님의 이름을 반대하여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사도 26,9) -황인기 베드로 한산 주임-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나자렛은 예수님의 고향이요 그 가정의 연고지입니다. 나자렛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나자렛은 일상적인 생활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삶 거의 대부분이 나자렛의 일상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삶을 배우기 위해 성가정으로부터 30년을 감추어진 일상의 삶을 사셨습니다. "보다 큰 사랑을 향한 갈망으로 그에 대한 희망으로 30년 동안 온전히 인간이 되기 위해 신성을 하챃게 여기셨다."(마들렌 위땡: 예수의 작은 자매회의 우애회 설립자)
예수님은 반복되는 인간 삶의 일상에서 펼쳐지는 노동과 몸과 마음의 고단함,지루함,허탈함,무기력함,갈등,번민들을 모두 경험하면서 배우셨습니다. 당신의 신성으로 지루한 일상을 재미있게,갈등과 번민에 싸이게 하는 일을 극적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특별한 신적 전능을 발휘함 없이 사람으로서 온전히 겪어내심으로써 일상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일상을 온전히 겪어내신 것은 우리 인간 삶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은 일상에 가치를 부여하여 일상을 하느님 만남의 장소로 파악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것은 일상에 지쳐 있는 나,아무 의미를 찾지 못하는 나, 그래서 찌질해 보이는 내 삶이 긍정되는 일입니다.
소외되고 차별받던 지역 갈릴래아의 한 고을인 나자렛은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민족이 섞여 있고 왕래가 빈번했던 지역입니다. 외국인을 접촉하기를 극도로 경계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늘 죄인들의 도시,율범을 지키기 어려운 도시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분께서는 나자렛에서 그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배우십니다. 민족 사이의 경계,율법과 죄의 경계,계층 사이의 경계를 넘어 서십니다. 이 경계를 넘어감은 존재를 수용함이고 다른것을 수용함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나자렛에서 경계선을 연결선으로 만드셨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인간 삶의 모든 것을 배우십니다. 경계를 넘어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하면서 모든 인간의 아름다움과 인간 일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십니다. 복음 곳곳에서 보여 주시는 편견을 넘어서는 모습,한사람의 아름다움을 알아봐 주시고 삶을 긍정으로 이끄시는 모습은 나자렛의 성가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넌 엘사구나?" 소위 메이커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LH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랍니다. 그리고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이 기가막힌 말과 행동을 어디에서 배웠을까요? 성가정의 요셉과 마리아의 역할을 하시는 부모님 여러분,여러분의 아기 예수님인 자녀들은 가정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자녀들의 나자렛이 되어 주고 계십니까?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 주님이십니까?
한국 천주교와 이웃 종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 편찬-
49. 유교에도 믿고 섬기는 대상과 종교 의례가 있습니까?
"아시아는 영적인 것이 높이 존중되는 대륙이며 종교적 감각이 천부적으로 깊이 새겨진 대륙입니다."(요한 바오로2세,아시아 백성을 위한 담화,1981년 2월 21일)
서양의 종교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유교는 절대적 신념을 가지고 종교 행위를 실천해 왔습니다. 유교에서 최고의 절대자는 '천'(天)입니다. 본디 천은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는 상형 문자인 대(大)자 위에 선 하나를 그은 글자로, '인간위에서 인간을 굽어보고 있는 하늘' ,곧 지고무상(至高無上)하며 유일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이 천을 인격적으로 표현하는 호칭이 '상제'(上帝)입니다. 우리말로 '천'은 '하늘'에,'상제'는 '하느님'에 해당합니다. 천과 상제는 유교 경전이나 전통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절대자의 명칭입니다. 천과 상제는 만물의 근원이고,공경과 제사와 기도의 대상이며,의지와 감정을 지닌 영명(靈明)한 존재이고, 상선벌악의 주재자이며,인간에게 천명(天命)을 내리고 거두는 최고자입니다. 인간은 천과 상제를 우러러 공경하고 (敬天),두려워하며(畏天),받들고(泰天),섬기며(事天),그에게 제사를 드립니다(祭天).
유교의 의례는 크게 제천(祭天),제지(祭地),제선(祭先)으로 구분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성대하고 장엄한 것은 하늘에 드리는 제천 의식으로 이는 오직 천자(天子)인 황제만이 거행 할 수 있습니다. 제지는 산천에 드리는 제사로 제후(王)들의 몫이며, 일반백성은 조상에 대한 제선의식만을 거행합니다. 그 밖에도 공자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신성을 지닌 존재나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한 분의 성인 또는 선현으로 여겨지며 윤리적 스승으로 존경을 받습니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사잇길>
우리 가톨릭 교회를 자랑할 수 있나요?
얼마 전 한 잡지에서 청년들이 교회에 대한 주제로 간담회를 한 기사를 읽었다. 첫 질문은 교회에 바라는 것에 대한 나눔이었다. 간담회에 참석한 젊은이들은 여러 부류였는데 성당을 열심히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냉담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가 각자 교회에서 받은 상처와 안 좋은 기억들을 풀어놓았고,교회의 쇄신과 변화의 필요성을 성토했다. 다들 화가 난 느낌이었다. 사제와 수도자에게 받은 상처들,자신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교회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두 번째 질문은 반대로 교회에 대한 자랑과 좋은 점을 나누는 것이었다. 그런데 화가 식지 않았던지 계속 안 좋은 점만 이야기하기도 하고, 좋은 것에 대한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처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전에 민주화 운동 때나 노동 인권 운동에서 좋은 일을 했다고 하더라." "사회 복지에 관심을 갖고 어려운 이들을 도와준다고 하더라."우리나라에서 사회적으로 천주교가 인정받는 일들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자기 자신은 없었다.
간담회 내용을 읽으면서 비슷한 경험이 떠올랐다.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과 나눌 때면,교회가 바뀌고 변화되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잘못된 점과 부족한 점을 지적하였고,교회의 좋은 점과 자랑들을 자신의 체험이 아닌 타인의 체험이나 객관적인 사실들에서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안 좋은 모습에 대한 체험은 분명한데 왜 교회가 좋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 보며,우리 모두가 정화되고 변화되어야 하는 지점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좋은 일은 힘든 경우가 많고 편한 일은 좋은 일이기 어렵다. 좋은 일에 함께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가진 것을 내어 놓을 마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변화와 쇄신을 위한 모두의 노력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또 교회는 더 많은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단지 후원금으로써가 아니라 그 현장에 자신도 함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좀 더 많은 이들이 우리 가톨릭 교회에 대한 자랑을 자신의 체험으로 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더 많은 이들이 교회가 투신하고 있는 현장에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다.
-김용태 안드레아 신부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주님!
이 계절에
모두가
외롭지 않게 하소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순서 없이 함께 사랑되게 하소서
잔잔한 눈길로 마주보며
마음과 마음으로
화통한 평화의 웃음 웃게 하소서
글.그림.이순구 (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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