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9년 주보

사순 제 5주일 2019년 4월 7일(다해)

모든 2 2019. 4. 7. 22:00

 

 

해외 신학생 파견(2007년)

2007년 대전교구는 일본 오이타 교구로 최재경(사도요한),이건석(안드레아)신학생을 파견 하였다. 두 신학생은 공부를 마치고 2011년,2012년에 사제품을 받았으며 현재 일본에서 사목활동 중이다. 신학생을 현지 교구로 파견,양성하여 활동하도록 한 경우로는 첫 사례이다.

 

▲자료 제공 : 내포교회사연구소(041)362-5028

 

 

  + 요한 복음 8,1-11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올리브산으로 가셨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예수님께서 말하였다. "스승님,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말씀의 향기>

 

  누가 돌을 던지나? 그물을 버려라!   -손은석 마르코 산성동 주임

 

  어부들에게 그물은 물고기를 잡는 유능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물이 물을 퍼 올릴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촘촘히 그물을 다듬어 놓아도 그물코의 구멍은 물을 담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물의 유능함을 우리는 볼 수 없게 됩니다. 촘촘한 율법으로 하느님을 담아내려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부활 전 한 주간은 단식을 하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 중 어느 날 모세 압바에게 형제들이 찾아오자 그는 간단한 음식을 마련해 대접해 주었습니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규칙을 깬다는 생각에 본당 신부에게 가서 고하였습니다. 모세 압바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신부가 모세 압바를 보며 사람들 앞에서 "압바님은 사람들이 만든 계명은 어기셨으나 하느님의 계명은 굳게 지키셨군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인간이 만든 수많은 율법들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아무리 촘촘하게 만들어져도 하느님을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율법의 그물은 중요한 것을 담아내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것을 냉정하게 버리는 무능함도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의 필리피서에서 '의로움'에 해당하는 희랍어 '디카이오시넨'은 법정 용어로서 의롭다고 판정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오로가 볼 때 율법으로는 인간이 의롭다고 무죄판결 받을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즉 하느님이 의롭다 인정해 주는 길을 택한다고 합니다. 비록 모든 인간은 죄인이지만 그분께서 나를 무죄로 판결해 주심에 우리는 단죄 받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향해 돌을 던지려는 이들에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고 하십니다. 율법으로는 누구도 무죄 판결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간음한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예수님은 율법의 그물로 담지 못하는 것을 자비로 담아내십니다.

 

  구약 성경에서 자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하밈'은 '자궁(레헴)'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생명을 감싸는 자궁과 같은 자비야말로 그물코 없는 법, 그물 아닌 그물,하느님 담는 하느님 마음입니다. 사순 제5주일입니다. 율법으로 잃은 것,자궁 속에서 되찾으시길 기도드립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돌을  던질 수 있습니까? 그물을 치지 말고 버리십시오!"

 

 

 

  평화를 이루려면 피조물을 보호하십시오  -교황 베네딕도 16세-

 

  5.  명백히, 생태계 위기를 다른 관련 문제들과 분리하여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발전의 개념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간관,인간 상호 간의 관계와 인간과 나머지 피조물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발전 모델을 장기적으로 깊이 재검토하고, 아울러 경제의 의미와 경제 목표를 고찰하여 그 역기능과 오용을 바로잡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지구의 생태 건강이 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느 때부터인가 세계곳곳에서 그 증상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인류의 문화적 도덕적 위기가 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깊은 문화적 쇄신이 필요합니다. 인류는 모든 이를 위한 더욱 밝은 미래를 건설하는 데 튼튼한 초석이 될 수 있는 그러한 가치들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위기는, 그것이 경제적 위기든 식량 위기든,환경적 또는 사회적 위기든,궁극적으로는 도덕적 위기이며,그 모든 위기는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위기들은 인간이 함께 걸어가야 할 길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합니다. 특히 현재의 위기들은 이전의 성공한 경험들에는 의지하고 실패한 경험들은 단호히 버리는 새로운 참여 방식과 형태를 통한 연대와 절제의 생활방식을 요구합니다. 그럴 때에만 현재의 위기는 식별과 새로운 계획을 위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6.  우리가 보편적 의미에서 말하는 '자연'은'사랑과 진리의 계획'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 않습니까? 세계는 "어떤 필연성이나 맹목적 운명이나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피조물들을 당신의 존재와 지혜와 선에 참여시키고자 하시는,하느님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생겨났습니다." 창세기의 첫 장들은 세상에 대한 지혜로운 계획을 알려 줍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생각에서 생겨났으며, "땅을 가득 채우고" 하느님 자신의 '관리자' 로서 그 땅을 "다스리도록"(창세 1,28 참조 ),창조주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남자와 여자를 그 정점에 둡니다. 창조주와 인간 그리고 창조된 세계의 조화는, 성경에서 묘사하듯이, 아담과 하와의 죄로 파괴되었습니다. 이들 남녀는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했고, 자신들이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땅을 "다스리고" "일구고 돌보는"일이 변질되어,인간과 나머지 피조물 사이에 갈등이 생겨났습니다.(창세 3,17-19 참조). 인간은 이기심의 지배를 받게 되고, 하느님께서 내리신 명령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여 피조물을 완전히 지배하려는 욕구로 피조물을 착취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내리신 본래 명령의 참 의미는,창세기에서 명백히 보여주듯이,단순한 권위의 부여가 아니라 책임의 요구입니다. 선인들의 지혜는,자연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쓰레기 더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경의 계시로 우리는 자연이 창조주의 선물이며, 창조주께서는 인간이 "땅을 일구고 돌보는"(창세 1,15 참조)데에 필요한 원칙들을 자연에서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자연에 내재적 질서를 부여하셨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 속하며,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피조물을 맡기시며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협력자로 행동하는 대신에 하느님을 대신한다고 자처한다면, "인간의 지배보다 더욱 폭력적인"자연의 반란을 불러오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책임 있게 피조물을 관리하고 돌보며, 가꿀 의무가 있습니다.

 

 

 

인공지능마저 두려워하는 것

 

 

 

 

 

  얼마 전 신문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도둑을 잡을 수 있는 인공지능이 개발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도둑을 잡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뉴스거리가 될까 싶었는데, 조금 더 읽어 보니 그 인공지능은 결코 단순한 AI가 아니었습니다.

 

  절도 행위 중인 범인을 잡는 것이 아니라, 곧 절도 행위를 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는 잠재적 절도범을 찾아내는 능력을 지닌 인공지능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가게에 설치된 CCTV를 통해 손님들의 표정과 행동을 세밀하게 분석한다.

  2. 수상한 사람을 찾아내 스마트폰을 통해 점원에게 정보를 전송한다.

  3. 점원은 그 사람에게 접근해 말을 거는 등,절도 의지를 무력화하는 조치를 취한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개발된 이 인공지능 기사에 대한 사람들의 댓글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었습니다. 혹시 AI가 오작동하거나 지나치게 인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댓글 가운데 냉소적인 글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절도법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당당하게 들어와 물건을 훔친다면 그때는 AI도 전혀 속수무책일 거라는 댓글이었습니다.

 

  그 글을 읽는 순간 섬뜩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인공지능이라도 그런 사람은 결코 당해 낼 재간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잠재적 절도범을 찾아내는 AI보다 무서운 것은 자신이 행하는 행위가 죄라는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죄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마저 사라진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사순 시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죄에 대해 민감해지는 시기이어야 합니다. 작은 죄라도 크게 불편해 하는 사람에게만 부활의 신비를 체험할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

 

 

 

 

 

 

 

누가

그를

벌하리오.

 

그가

우리인 것을.

 

글.그림 이순구 (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