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9년 주보

사준 제4주일 2019년 3월 31일 (다해)

모든 2 2019. 3. 31. 22:00

 

 

대전교구 사제단(1979년)

40년 전 교구 사제 피정 중에 촬영한 사진이다. 대전교구는 1980년대까지 사제의 부족으로 사목활동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2018년 12월)은 380명의 사제들이 교구는 물론 군종,해외 본당 사목,해외 선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자료 제공 : 내포교회사연구소(041)362-5028

 

 

 

 

  +  루카 복음 15,1-3.11-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이,'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아버지,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말씀의 향기>

 

  아버지가 멀리서 달려오신다!   -안재현 사도요한 가양동 주임

 

  아버지가 멀리서 달려오신다. 버선발에 벅찬 노구를 끌고 달려오신다. 절룩절룩 달려오시는 아버지,상기된 얼굴엔 눈물과 웃음이 겹치신다. 맞다,분명히 내 아버지이시다. 하지만 마지막에 뵌 아버지 모습이 아니시다. 속은 얼마나 태우셨는지,백발은 더 무성하시고,주름은 더 깊고 굵게 패이셨다. 다 나 때문임을 나도 안다... 나는 울 자격도,아들이라 불릴 자격도, 아버지라 부를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탕자,죽은 아들이다~

  행여나 누가 방해할세라,아버지는 단박에 나를 힘껏 껴안으시고 입을 맞추신다. 아버지의 터질 듯한 심장이 내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고, 거친 숨소리가 나를 다시 숨쉬게 한다. 내 볼을 타고 흐르는 아버지의 눈물이,나를 다시 울게 한다. 아버지의 눈물이 이렇게 뜨거울 수가!

  아버니는 나의 목을 껴안아 죄의 짐에 눌려 굽은 몸을 일으켜 주신다. 속세를 향했던 내 머리를 하늘로 돌려놓으신다! 아버지는 가장 좋은 옷을 입히시고, 언약의 반지를 끼워 주시며,아들의 자격을 회복시켜 주신다. 심지어 발조차 헐벗지 않게 신발을 신겨 주신다. 신발을 신고 두번 다시 멀리 가지 말고, 옛날의 삶으로 돌아오라 하신다.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가 벌여졌고, 아버지는 힘껏 소리치신다.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이렇게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난생처음이다!

  큰 소리에 대문 밖을 보니,형이 보인다. 들에서 온 화가 잔뜩 난 형은,삽자루를 내동댕이치고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다. 구부정한 모습으로 나서시어 형의 손을 잡으시고 타이르시는 아버지.. 나의 아버지는 언제나 이런 분이시다. 속도 없으신 분! 지난 나의 과거에 눈물이 나고,속없으신 아버지의 모습에 눈물이 또 터진다. 눈물이 흘러,내 앞에 차려진 밥과 국은 아무리 양껏 먹어도 줄지 않는다. 나는 다시 살려고,우걱우걱 밥을 퍼먹는다. 고깃국이 아닌, 눈물국에 밥을 말아 먹는다. 다시 아버지의 아들로 '잘 좀'살아보려고!

 

  오늘은 사순 제 4주일이며,기쁨의 주일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복음 때문에 울고, 복음 때문에 웃습니다. 아,이래서 복음은 복음이구나! 싶습니다.

  아버지를 떠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서,삶의 자리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너무 멀리 떠나지 말고 돌아옵시다. 돌아왔다면,두번 다시 떠나지 맙시다. 고향집에 살진 송아지 잔치가 있듯,교회에는 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와 잔치가 있습니다. 그 옷을 입고,그 반지를 끼고, 그 신발을 신고, 어딜 갑니까? 아버지를 부르며,자녀답게 살아갑시다! 눈물국에 밥을 말아먹듯,오늘도 눈물로 사랑의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영원히 아버지의 아들딸로 '잘 좀' 살아보려고!!

 

 

 

  평화를 이루려면 피조물을 보호하십시오  -교황베네딕토 16세

 

  3. 이십년 전에,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 하는 평화,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는 평화"를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주제로 선택하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하느님의 피조물인 우리가 우리 주위의 모든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를 강조하셨습니다. '오늘날에는... 자연에 대한 마땅한 존중의 결여로... 세계 평화가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의식이 증재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새로운 생태학적 각성이 부각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무시해 버릴 일이 아니라 구체적인 계획과 사업으로 발전되도록 마땅히 권장하여야 할 일입니다." 선임 교황님들은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자주 언급하셨습니다. 그 예로,1971년에 바오로 6세께서는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반포 80주년에 "인간들이 자연을 무분별하게 착취하여 자연을 파괴하고 그러한 오용의 재앙이 이제는 바로 인간에게 미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신 바 있습니다. 덧붙여 "인간은 자연의 오염과 폐기물,새로운 질병과 절대적인 파괴력으로 끊임없이 위협을 받을 뿐 아니라 인간 사회의 체계마저도 이제 인간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감당할 수 도 없는 내일의 생활 조건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것은 전 인류 가족에 관계되는 광범한 사회 문제인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4. 교회는 구체적인 기술적 해결책에 의존하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전문가'로서 창조주와 인간 그리고 창조 질서의 관계에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노력합니다. 1990년에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생태계 위기'와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그 위기의 윤리적 성격을 강조하시면서 "새로운 연대의 절박한 도덕적 요구"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분의 요청은 오늘날 더욱 더 절실합니다. 위기 증대의 징후들이 보이고 있는데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무책임한 일일 것입니다. 기후 변화,사막화,광활한 농촌 지역의 황폐화와 생산량 감소,하천과 지하수 오염,생물 다양성의 상실,자연 재해 증가,적도와 열대 우림 지역의 남벌과 같이 현실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우리가 어찌 무관심할 수 있겠습니까? 자연 서식지의 파괴로 주거지와 흔히는 재산까지도 잃고 강제 이주의 위협과 불안으로 내몰린 "환경난민들"의 현상이 증대하고 있음을 우리가 어찌 모른척 할 수 있습니까? 자연 자원 이용을 둘러싼 실질적 잠재적 갈등 앞에서 어찌 무심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생명,식량,건강,발전에 대한 권리와 같은 인간의 권리 행사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입니다.

 

 

 

 

 

따뜻한 점 하나

 

 

 

 

 

 


  살다보면 가끔 민망한 경험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닫힌 유리문이 열린 줄 알고 씩씩하게 나가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유리문에 얼굴이 부딪히는 그런 경우입니다.
  얼굴은 얼얼하고 머리는 띵한데 창피한 나머지 아픈 티조차 내지 못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던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얼굴이 화근거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민망함이 사라지면 감사한 마음에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습니다. 그 순간은 창피하다기 보다는 매우 위험한 순간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렵하게 날아다니는 새들도 이런 위험한 상황에 자주 직면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곳곳에 만들어 놓은 유리 구조물에 충돌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은 겁니다.
  하루 3만 마리,1년에 약 1000만 마리의 야생조류가 도로변 투명 유리 방음벽이나 아파트 유리창,그리고 최신식 고층 유리 빌딩에 충돌해 소중한 목숨을 잃는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환경부에서 그런 안타까운 사건을 줄이기 위해,도로변 방음벽에 조그만 스티커를 붙여 새들에게 유리의 존재를 사전에 알아보게 하는 시범사업을 실시했습니다.
  6mm의 크기의 정사각형 모양의 스티커를 5cm간격으로 유리 방음벽에 붙이자 놀라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도로변에 즐비했던 야생조류의 폐사체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입니다.
  스티커로 인해 유리벽에 부딪히는 사고를 피할 수 있어 새들에게도 좋고, 점 크기가 크지 않아 자연 경광을 보는 데 지장이 없어 사람들에게도 불편함이 없는 행복한 공존..
  작은 점 하나하나가 소중해 보입니다. 사랑은 그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따뜻한 온기만 있다면 점 하나로도 충분함을 깨달으며 내 마음에도 점 하나를 조용히 찍어 봅니다.

   -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주님!

제 영혼의 누더기를

내려놓습니다.

 

부끄럽고

부끄러워

한없이 서러운

이 시대의 한 영혼을

받아주소서.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