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9년 주보

주님 수난 성지 주일 2019년 4월 14일(다해)

모든 2 2019. 4. 14. 22:00

 

 

몽골 출신 성직자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공부한 몽골 출신 엥흐(요셉)부제가 2016년 8월 28일 사제품을 받아 몽골지목구의 첫 사제가 되었다. 2018년 12월 14일 산자(베드로)신학생이 부제품을 받아 몽골 교회의 두 번째 부제가 되었다.

 

 

 

 

  +  루카 복음 22,14-23,5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시간이 되자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정히 바랐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

  예수님께서 잔을 받아 감사를 드리시고 나서 이르셨다.

  "이것을 받아 나누어 마셔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마시지 않겠다."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께서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을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그러나 보라,나를 팔아넘길 자가 지금 나와 함께 이 식탁에 앉아 있다. 사람의 아들은 정해진 대로 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사람의 아들을 넘기는 그 사람!"

  사도들도 자기들 가운데 그러한 짓을 저지를 자가 도대체 누구일까 하고 서로 묻기 시작하였다. 사도들 가운데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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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어떤 하녀가 불 가에 앉은 베드로를 보고 그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말하였다.

 

 

  <말씀의 향기>

 

  기대치  -송국섭 요셉 대전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장 겸 교리신학원장

 

  사람들은 자신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 일종의 기대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기대치가 있다는 말이지요. 물론 그 종류는 상대방에 따라 저마다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거는 기대치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부하 직원도 직장 상사에게 갖는 기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부모님들도 자기 자녀들에게 거는 기대감이 있을 텐데 때로는 그 기대치가 너무 커서 자녀를 부담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또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선거가 있습니다. 우리는 투표를 할 때 저마다 어떤 특정한 후보에게 나름대로의 기대감을 갖고서 그 사람에게 표를 행사합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기대를 걸었던 그 사람에게서 내가 원했던 기대감이 무너졌을 때 우리는 실망을 하게 되고 또 때로는 그 실망감이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큰 기대감이 한 순간에 커다란 분노로 뒤바뀌는 모습을 우리는 오늘 미사 중에 낭독될 복음 말씀 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미사 전 행렬 때의 복음 내용은 온통 환희로 뒤덮여 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구세주께서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는 소식에 제자들과 군중은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사 중에 이어지는 수난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그렇게나 환영하며 기뻐했던 그 군중이 마치 자기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이번에는 그분을 죽이라고,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악을 써가며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하십니다. 어쩌다가 이러한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요?

  그 당시 예수님을 맞이하며 환호했던 예루살렘 백성들은 분명 처음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칭했습니다. 하지만그들은 생각하고 있던,아니 기대하고 있던 메시아의 모습은 쉽게 말해서, 강력한 왕권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다시 예전의 명성과 부귀와 풍요를 가져다 줄 현실적인 임금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보여주셨던 행동이나 말씀은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메시아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것이었고, 거기에 백성의 지도자들의 선동까지 더해지자 그분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다 못해 결국 자기네가 품었던 기대감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대가 무너져 생긴 실망감은 분노를 넘어 급기야 그분을 죽이고 싶다는 살벌한 살의로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는 얼떨까요? 나는 과연 예수님께 어떤 기대를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혹여 내가 품었던 그 기대감이 무너지게 된다면 나는 예수님께 어떠한 마음을 품게 될까요? 또 한편으로는 혹시나 예수님에게도 나에 대한 기대치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요?  ... 참으로 많은 생각을 품게 만드는 오늘입니다.

 

 

 

 

벚꽃이냐 벗꽃이냐

 

 

 

 

  봄날은 나른하지만 그렇다고 지루하진 않습니다. 가끔씩 졸게 되는 오후라도 깨어 보면 분명 어제와 조금이라도 달라진 새로운 풍경에 마음이 설렙니다.

 

  오늘의 하루를 어제의 하루와 다르게 느끼게 해 주는 건 꽃들입니다. 분명 어제는 나뭇가지가 갈색이었는데 오늘은 살짝 노랑이거나 분홍인 것은 모두 꽃들 덕분입니다.

 

  꽃들이 여기 저기 꽃망울을 터뜨리면,그 어느 누구도 방안에 꼼짝 않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그런 강심장을 갖기란 불가능합니다. 특히 벚꽃의 유혹은 쉽게 떨치기 어렵습니다.

 

  일단 나가야 합니다. 벚꽃이 화들짝 피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지 들뜬 마음으로 서둘러야 합니다. 낮이건 밤이건 벚꽃 구경에는 시간의 구분조차 무의미해집니다.

 

  그런데 한 가지 신기한 건 꽃구경을 혼자서 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와서 사진도 찍고 나무 아래서 유쾌한 목소리로 수다를 떨어 봅니다.

 

  참 보기 좋은 풍경입니다. 벚꽃도 혼자 핀 벚꽃이 거의 없듯이,사람도 혼자 온 사람이 거의 없어 꽃과 사람이 하나로 섞여 춤을 추는 것 같은 행복이 여기저기 넘쳐납니다.

 

  벚꽃을 종종 '벗꽃'으로 잘못 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요? 벗과 함께 보는 꽃이라면 그 꽃을 '벗꽃'이라 해도 크게 잘못된 건 아닐 겁니다.

 

  "꽃구경 가자" "꽃놀이 가자"라는 말들은 결코 독백일 수 없습니다. 평소에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향한,함께하면 기쁨이 두 배로 커지는 관계를 향한 즐거운 고백에 가깝습니다.

 

  봄날은 나른하지만 그렇다고 지루하진 않습니다. 가끔씩 졸게 되는 오후라도 깨어 보면 분명 벚꽃놀이 함께 할 벗들이 꽃처럼 아름답게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작은 것에서

큰 밝음으로

환한 희생

그 빛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