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9년 주보

연중 제4주일 2019년 2월 3일 (다해)

모든 2 2019. 2. 3. 19:58

 

 

연무 양촌공소(1967년)

양촌공소(논산시 양촌면 인천리)는 1888년에 65명의 교우가 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다른 공소에 통합되었다가 1961년부터 별도의 통계가 나오는 공동체가 되었다. 한때 예비자가 '300명'이 될 정도로 선교가 활발했다고 한다.

 

 

 

 

  +  루카복음 4,21-30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네 병이나 고쳐라,'하는 속담을 들며,'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할 것이다."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말씀의 향기>

 

  빛이 되는 예언자  -노승준 세례자요한 대천해수욕장 주임

 

  오늘 말씀 전례는 '예언자'라는 소재로 우리에게 들려집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온갖 부정부패에 찌들어 멸망으로 향해 가는 사회에 하느님께 그 노력은 비난과 오해를 사게 되어 감옥에 갇히고 도망다니는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처음부터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절했지만 그 부르심 앞에선 핑계도 변명도 소용 없었다고 다만 사명 그 하나로 박해와 고난 속에 평생을 외롭게 걸어간 예언자였습니다.

 이것은 비단 예레미야만이 아닌 모세,이사야,아모스,호세야, 그리고 세례자 요한,사도들도 똑같이 겪었던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마저도 고향과 동족들로부터 배척받는 모습을 보면 예언자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빵을 좋아하고 기적을 좋아하며 명예와 권력을 좋아합니다. 시골 동네에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나왔다 하면 현수막을 걸어 환영합니다. 하다못해 고시에 합격하거나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해도 현수막이 세워지며 동시에 동네의 자부심도 세웁니다.

  이렇게 환영하는 것들은 예수님께서 광야의 유혹중에 다 배척하셨던 것입니다. 예언자는 빵을 약속하지 않고 명예와 권력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말씀을 이루신다는 약속을 전할 뿐입니다. 이 말씀을 먹고 받아들이기에는 쓰기도 하고 시기도 하기 때문에 예언자들은 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지난주 복음의 연장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환영받습니다. 고향땅의 자부심을 세우고 큰 자랑거리가 될 것처럼 사람들은 기뻐합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곧잘 하시던 기적도,어떤 혜택도 없는 것에 불만을 가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출신을 잘 안다는 자신감으로 무시하고 업신여깁니다. 그 빈정거림이 예수님의 귀에 들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구원의 은총이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주어지는 것을 언급하십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너무나 거북하고 불쾌한 나머지 예수님을 벼랑에 떨어뜨리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우리에게도 주어진 예언직은 이처럼 힘들 수 있습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부정부패,악습,폐단이 막연한 곳에 공정과 선의의 빛을 뻗쳐 나가기란 외롭고 힘든 싸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촛불 하나가 온 방을 비추듯이,하느님 말씀을 살아가고 전하는 우리의 삶이 빛이 되어 제대로 보게 해 주고 밝은 희망을 전해 준다는 믿음을 잃지 않고 우리의 소명을 다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무/김현승

 

하느님이 지으신 자연 가운데

우리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

나무이다.

 

그 모양이 우리를 꼭 닮았다.

참나무는 튼튼한 어른들과 같고

앵두나무의 키와 그 빨간 뺨은

소년들과 같다.

 

우리가 저물녘에 들에 나아가 종소리를

들으며 긴 그림자를 늘이면

나무들도 우리 옆에 서서 그 긴 그림자를

늘인다.

 

우리가 때때로 멀고 팍팍한 길을

걸어가면

나무들도 그 먼 길을 말없이 따라오지만,

우리와 같이 위으로 위으로

머리를 두르는 것은

나무들도 언제부터인가 푸른 하늘을

사랑하기 때문일까?

 

가을이 되어 내가 팔을 벌려

나의 지난날을 기도로 뉘우치면,

나무들도 저들의 빈 손과 팔을 벌려

치운 바람만 찬 서리를 받는다. 받는다.

 

 

 

 

 

 

머리띠 기러기 가족처럼

 

 

 

 

 

 

  에베레스트 산을 일 년에 두 번이나 넘어 날아가는 철새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을 날아 이동하는 그 새를 사람들은 '줄 기러기'혹은 '머리띠 기러기'라고 부릅니다.

 

  기러기 앞에 '줄'이나 '머리띠'라는 말이 붙은 이유는 다른 기러기와 달리 하얀색 머리 위쪽으로 말발굽 모양의 두 개의 까만 줄이 마치 머리띠처럼 또렷하게 나 있기 때문입니다.

 

  독특한 줄무늬 말고도 이 머리띠 기러기는 다른 새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부모 자식 간의 관계로 깊은 감동을 줍니다.

 

  엄마가 알을 품고 아빠가 보초를 서며 천적으로부터 알을 보호하는 것은 다른 새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화된 아이들의 몸집이 절반 정도 커지게 되면 신기한 일이 생깁니다.

 

  그때쯤이면 엄마아빠의 털갈이도 시작되는데,털갈이 동안엔 엄마아빠는 날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번에 아이들이 엄마아빠 곁에서 보초를 서며 끝까지 엄마아빠를 보호합니다.

 

  14년 만인 2017년 머리띠 기러기가 우리나라 파주에 그 모습을 나타내 사진 애호가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젠 우리가 다시 관심을 가져야 할 차례인 것 같습니다. 며칠 있으면 가족이 모여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고마운 존재였는지 확인하게 될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에베레스트 산을 넘는 머리띠 기러기의 힘은 그들의 독특한 신체적인 특징에서가 아니라,그들의 가족 간의 깊은 믿음과 사랑에서 비롯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 봅니다.

 

  누구도 저 혼자서 일어나 날고 있지 않음을 확인해 보는 훈훈한 설날 보내시길 기도합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꽃이 피거든온 누리를사랑하고
잎이 나거든모든 이들을존경하고
그렇게 평화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