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어서 오너라, 은총을 받은 이여!”
모두들 숨이 멎는 것 같다고 표현했던 그림이 있습니다. 워싱턴 국립미술관의 심장인 저 그림, 바로 반 에이크(Van Eyck)의 ‘수태고지’입니다. 많은 수태고지가 있으나 에이크의 수태고지가 빛나는 것은 천사와 마리아의 눈높이 때문입니다. 눈높이가 그들 관계의 온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천사는 대천사 가브리엘입니다. 가브리엘이 입고 있는 저 화려하고 화사한 옷, 한 번 만져보고 싶지요?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날개까지 저 섬세한 옷은 권력과 권위의 상징이라기보다 영광의 상징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저 옷은 결핍도, 자만도 없이 충만한 존재의 외화(外華)입니다. 우리 속의 수호천사가 바로 저런 모습 아닐까요?
그 천사가 마리아를 향해 풀어놓은 말은 그림의 일부입니다. “아베 그라티아 플레나(AVE GRA(TIA) PLENA).” 천천히 반복해서 발음해 보십시오. 아베 그라티아 플레나! 그 뜻이 뭔지 몰라도 따뜻해지는 문장이지요? 대천사에게서 나온 축복의 말은 이것입니다. “어서 오너라, 은총을 받은 이여.”
마리아를 친숙하게 느끼는 미소와 몸짓으로 봐서 말씀(Logos)을 전하는 천사가 가지고 온 것은 “은총”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은총의 내용이 뭐지요? 그 은총이라는 것은 그림의 제목처럼 수태입니다. 분명 수태는 은총이지요? 그런데 상황은 처녀가 아이를 가진 겁니다. 처녀가 임신했을 때는 돌로 내리치는 나라에서 처녀 마리아의 수태가 어찌 온전한 은총일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는 놀랐습니다. 그 놀람은 일차적으로는 두려움에서 온 것이겠습니다. 스스로 선택하지도 않은 운명인데 그게 사람들에게 돌을 맞아야 하는 모멸적인 것이라니요!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놀랄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림 앞에서 사람들이 숨이 멎는 거 같다고 표현하는 것은 마리아의 두려움에 공감하기 때문은 아닐 겁니다. 그림은 바로 그 다음 순간, 두려움이 신비로 변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얼굴을 보십시오.파란옷의 순수한 그녀는 자기 힘으로 세상을 살아온, 의지가 굳은 여인의 얼굴입니다. 그런 여인이 뭔가 자신을 완전히 압도하고도 남을 신비와 환상과 기적을 본 것입니다. 그것이 가브리엘의 “은총”의 말과 만나 축복이 된 것이지요. 만일 마리아가 가련형의 여인이었다면 그 크나큰 운명의 바람에 휘청거리며 비틀거렸겠지요?그렇다면 그게 무슨 은총이겠습니까? 강요된 은총은 은총이라기보다 폭력인 걸요. 보십시오. 저 그림의 힘은 천사의 미소가 자연스레 마리아의 신비로 흐르고, 마리아의 신비와 경이가 천사의 온화함과 짝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저 그림에 매료되는 것은 우리가 바로 그 신비를 알고 있기 때문인 거겠지요?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로지 경이만이 있는 그 축복! 그 축복받은 경이와 신비의 힘으로 거듭나 마리아는 무거운 운명에 토를 달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아이를 온전하게 지킬 수 있는 엄마의 힘을 자기 안에서 발견하고 키워가게 된 겁니다.
이제 그림의 배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바닥의 타일이나 벽면에, 삼손에서 모세 그리고 다윗에 이르기까지 구약의 유명한 영웅들과 사건들이 삽화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 모두가 아이를 가진 마리아의 신비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아이를 가진 마리아는 돌연변이로 태어난 예외적 존재가 아니라 오래된 전통이 품어 키운 전통의 꽃이라는 거겠지요.
신묘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이생에서 키워내야 할 우리의 소중한 꿈, 새로운 태양이 수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연히 던져진 왜소한 존재가 아니라 우주와 자연과 역사가 마침내 낳은 세계의 주인공인 겁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품고 있는 신의 아이를 지켜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에 눈뜨는 순간 우리는 부드럽게 우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의 수호천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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