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2) 클림트의 ‘다나에’
이주향 | 수원대 교수·철학
경향신문 입력 : 2011-01-09 20:59:51ㅣ수정 : 2011-01-10 02:37:52
혁명 같은 사랑을 꿈꾸는 여인
잠을 자고 있는 걸까요? 꿈을 꾸고 있는 걸까요? 그녀는 꿈 같은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곡옥처럼 예쁜 자태로 사랑을 연주하는 여인, 한 치의 두려움도 없이 사랑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긴 저 여인은 누굴까요?
클림트, 다나에, Gustav Klimt (1862–1918), Danae, 1907-08, oil on canvas, 77 × 83 cm, Leopold Museum, Vienna, 오스트리아 개인소장.
저, 세상을 바꿀 꿈을 꾸고 있는 여인은 바로 다나에네요. 과연 제우스와 사랑에 빠진 여인답습니다. 티치아노의 다나에는 황금소나기로 변한 제우스가 빛나고, 렘브란트의 다나에는 남자를 기다리는 따뜻한 연인의 그리움이 강조되어 있다면, 클림트의 다나에는 사랑 속에서 혼연일체가 된 관능적 여인의 모습입니다. 저 그림은 관능이 한낱 말초적 감각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총체적인 경험임을 알려주는 교과서 같습니다.
다나에의 몸짓과 표정에 매혹되어 살짝, 그녀가 처한 현실이 뒤로 밀려나지만, 보십시오, 그녀는 거의 정사각형의 틀에 갇혀 있습니다. 저 틀은 의도된 겁니다. 청동의 탑이지요. 아버지의 탑입니다. 클림트는 아버지의 탑에 갇혀있었던 여인을 해방할 힘이 뭔지 알고 있었던 거 같지요?
다나에는 아르고스의 공주입니다. 당연히 아버지인 왕이 금이야, 옥이야, 하는 아버지의 관옥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인 아크리시오스(Akrisios)왕이 신탁을 받습니다. 신탁은 언제나 그 사람의 콤플렉스를 건드리지요? 왕에게 내린 신탁은 금지옥엽인 다나에가 낳은 아들이 왕을 죽일 거라는 거였습니다.
신탁에 사로잡힌 왕은 딸을 잡습니다. 육중한 청동의 탑을 세우고, 딸을 가두고, 자물쇠를 채우고, 보초를 세웁니다. 다나에는 아버지의 탑에 갇혀 있습니다. 새로운 경험이 흘러들어올 것 같지 않은 육중한 탑 속에 외롭게 갇혀있는 거지요. 안전하지만 존재이유도 없는 답답한 그곳은 어쩌면 우리의 처지 아닌가요?
현대를 사는 우리는 아버지의 탑에 갇혀 있습니다. 돈의 탑에 갇혀 있고, 시선의 탑에 갇혀 있습니다. 갇혀 있는 우리는 탐욕의 노예고, 권력의 노예고, 시선의 노예고, 체면의 노예고, 시간의 노예고, 하다못해 다이어트의 노예입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먹고, 놀고, 편하게 자지 못합니다. 많이 벌어도 언제나 2% 부족하고, 한 목숨 살리기 위해 너무 많은 걸 가지고 있지만 ‘나’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활동적 자폐가 아버지의 탑에 갇혀 있는 현대 도시인의 특징입니다.
그곳에서 하늘의 신 제우스를 만난 것입니다.나는 철두철미하게 방어의 벽 속에 갇혀 있는 다나에를 만나기 위해 황금 빗물로 스며든 제우스의 사랑에 감동합니다. 왜 나는 감동을 받는 걸까요? 아, 제우스가 왔습니다. 황금소나기로 왔습니다. 황금소나기로 내려와 스며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보십시오, 황금빛 환상적 사랑에 반응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나에의 표정과 자태를. 사랑은 막을 수 없습니다. 청동의 탑 속에 갇혀서도 완벽하게, 완벽한 세상, 꽉 찬 세상을 만드니까요.
클림트의 다나에는 꽉 찬 느낌이 들지요? 사랑을 나누는 다나에는 감옥의 탑을 황홀한 사랑으로 꽉 찬 성소로 바꿉니다. 그 변화의 에너지로 아버지의 딸은 아버지를 벗어납니다. ‘나’의 삶에 스며든 하늘로 인해 다나에는 하늘을 품고 아버지의 탑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형식은 쫓겨난 거지만, 내용은 해방입니다.
다나에의 사랑은 혁명 같은 사랑입니다. 내 속의 하늘을 품어야 혁명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클림트의 다나에는 바로 혁명 같은 사랑의 얼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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