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5) 안토니오 카노바의 ‘에로스와 푸시케’

모든 2 2018. 8. 24. 21:34

 

ㆍ세상을 등질 힘 

 

  사랑은 불입니다. 타오를 때는 진정시킬 수 없습니다. 다 타게 기다려야 합니다. 타오르면서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사랑의 무늬는 그 자체로 춤입니다. 사랑의 춤을 출 때는 돈이나, 힘이나 계략으로는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멈추게 하지요? 

 

  저 아름다운 사랑의 춤을 추고 있는 남자는 사랑의 신 에로스입니다. 아무에게나 장난처럼 사랑의 화살을 날려 책임질 수 없는 사랑에도 빠지게 만드는 악동이지요. 사랑이 장난인 그는 스스로 사랑에 빠지는 일이 별로 없는데, 그가 사랑에 빠져 있네요. 

 

  에로스와 짝이 되어 사랑의 춤을 추는 저 여인은 누구지요? 그녀가 바로 인간의 딸 푸시케입니다. 아프로디테의 질투를 사서 누구와도 결혼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여인입니다.

 

  아름다움의 여신이 아름다움 때문에 질투하는 거, 이해되십니까?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멀고 귀먹게 하는 아프로디테인데, 그렇기 때문일까요? 그녀의 눈은 그녀보다 예쁜 존재를 참지 못하고 그녀의 귀는 그녀보다 예쁘다는 말을 듣는 자에게 분노합니다. 그것이 아름다움의 여신을 모독하는 행위라나요. 

 

  주변에 아프로디테적인 존재들을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녀 앞에서 김태희나 하지원이 예쁘다고 하면 됩니다. 그러면 불같이 화를 내지요. 걔네들이 뭐가 예쁘냐고, 단박에 반박의 칼이 날라 오는데, 오히려 박경림이 예쁘다고 하면 차분해집니다. 그런 아프로디테적인 존재와 연애하고 싶다면 이런 말을 잘 날려야 합니다. 나는 너보다 예쁜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너는 있니?

 

  이제 아시겠지요. 평범한 푸시케의 언니들은 결혼을 잘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이슬 같이 청초한 푸시케가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 아프로디테보다 예쁜 그녀에게 아프로디테의 저주가 걸린 겁니다. 아프로디테가 남자들이 그녀에게로 가는 길을 사사건건 막고, 그녀와 결혼할 수 있는 존재는 죽음뿐이네요. 할 수 없이 일상에서 버려진 채 죽음과 결혼해야 하는 그녀 앞에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가 나타납니다. 물론 어머니로부터 받은 임무 때문입니다. 에로스의 임무는 푸시케와 죽음이 사랑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뻔뻔하게 드러난 의도가 사람을 배반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요? 에로스의 화살촉이 의도를 배반하고 실수로, 에로스를 상처내고, 급기야 에로스는 엄마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푸시케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실수지요! 그러나 실수였을까요? 프로이트는 실수는 없다지요? 어쨌든 실수 속에 숨어 있는 그것이 푸시케를 성장시킵니다. 

 

  푸시케는 사랑의 신 에로스와 사랑에 빠집니다. 에로스는 두 가지 조건을 달고 밤마다 푸시케를 찾아옵니다. 나를 보려 하지 말라! 새벽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묻지를 마라!

 

  사랑이 위험한 것은 사람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나를 보려 하지 말라’는 에로스의 계명이 저절로 지켜지는 거지요.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이 상대에 대해 제대로 얘기하는 경우가 별로 없는 겁니다. 

 

  어쨌든 푸시케는 행복했습니다. 세상에, 무지막지한 죽음과 구차하게 살 줄 알았는데, 신적인 사랑이라니요. 푸시케는 새벽이면 떠나가고 밤되면 돌아오는, 감미롭고 정다운 사랑이 그저 좋았습니다. 저 조각을 다시 보십시오. 에로스와 푸시케를 그리고 조각한 것이 많이 있지만, 안토니오 카노바의 저 조각이 유명한 이유가 보이지 않습니까? 저기엔 처음으로 사랑을 해 본 사람처럼 한 점의 불안도 없이 사랑을 믿는, 신선한 설렘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를 보지 않고 사랑이 이끄는 대로 이끌립니다. 

 

 

 

 

  에로스와 짝이 되어 사랑의 춤을 추는 저 여인은 누구지요? 그녀가 바로 인간의 딸 푸시케입니다. 아프로디테의 질투를 사서 누구와도 결혼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여인입니다.

아름다움의 여신이 아름다움 때문에 질투하는 거, 이해되십니까?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멀고 귀먹게 하는 아프로디테인데, 그렇기 때문일까요? 그녀의 눈은 그녀보다 예쁜 존재를 참지 못하고 그녀의 귀는 그녀보다 예쁘다는 말을 듣는 자에게 분노합니다. 그것이 아름다움의 여신을 모독하는 행위라나요. 

 

  주변에 아프로디테적인 존재들을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녀 앞에서 김태희나 하지원이 예쁘다고 하면 됩니다. 그러면 불같이 화를 내지요. 걔네들이 뭐가 예쁘냐고, 단박에 반박의 칼이 날라 오는데, 오히려 박경림이 예쁘다고 하면 차분해집니다. 그런 아프로디테적인 존재와 연애하고 싶다면 이런 말을 잘 날려야 합니다. 나는 너보다 예쁜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너는 있니?

 

  이제 아시겠지요. 평범한 푸시케의 언니들은 결혼을 잘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이슬 같이 청초한 푸시케가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 아프로디테보다 예쁜 그녀에게 아프로디테의 저주가 걸린 겁니다. 아프로디테가 남자들이 그녀에게로 가는 길을 사사건건 막고, 그녀와 결혼할 수 있는 존재는 죽음뿐이네요. 할 수 없이 일상에서 버려진 채 죽음과 결혼해야 하는 그녀 앞에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가 나타납니다. 물론 어머니로부터 받은 임무 때문입니다. 에로스의 임무는 푸시케와 죽음이 사랑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뻔뻔하게 드러난 의도가 사람을 배반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요? 에로스의 화살촉이 의도를 배반하고 실수로, 에로스를 상처내고, 급기야 에로스는 엄마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푸시케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실수지요! 그러나 실수였을까요? 프로이트는 실수는 없다지요? 어쨌든 실수 속에 숨어 있는 그것이 푸시케를 성장시킵니다. 

 

  푸시케는 사랑의 신 에로스와 사랑에 빠집니다. 에로스는 두 가지 조건을 달고 밤마다 푸시케를 찾아옵니다. 나를 보려 하지 말라! 새벽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묻지를 마라!

 

  사랑이 위험한 것은 사람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나를 보려 하지 말라’는 에로스의 계명이 저절로 지켜지는 거지요.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이 상대에 대해 제대로 얘기하는 경우가 별로 없는 겁니다. 

 

  어쨌든 푸시케는 행복했습니다. 세상에, 무지막지한 죽음과 구차하게 살 줄 알았는데, 신적인 사랑이라니요. 푸시케는 새벽이면 떠나가고 밤되면 돌아오는, 감미롭고 정다운 사랑이 그저 좋았습니다. 저 조각을 다시 보십시오. 에로스와 푸시케를 그리고 조각한 것이 많이 있지만, 안토니오 카노바의 저 조각이 유명한 이유가 보이지 않습니까? 저기엔 처음으로 사랑을 해 본 사람처럼 한 점의 불안도 없이 사랑을 믿는, 신선한 설렘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를 보지 않고 사랑이 이끄는 대로 이끌립니다. 


  로맹가리가 말했습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은 사랑으로 세상과 맞서 싸울 힘을 얻는 게 아니라 세상을 등질 수 있는 힘을 얻는다고. 저 조각이 보여주는 진리 같지 않습니까? 나는 생각합니다. 저렇게 세상을 등질 힘을 얻어야 세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도 생기는 거라고. 푸시케는 사랑의 동작 속에서 모든 것을 까맣게 잊고 사랑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리고 아십니까? 그 사랑과 함께 사랑의 그림자이자 사랑의 춤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힘인 의혹도 함께 생겨난다는 것을!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 가능성은 루벤스의 ‘잠든 에로스를 지켜보는 푸시케’(다음주) 속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