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어처구니 / 이덕규

모든 2 2018. 6. 17. 16:50

 

어처구니 / 이덕규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마늘밭에 덮어 놓았던 비닐을

겨울 속치마 벗기듯 확 걷어버렸는데요

거기, 아주 예민한

숫처녀 성감대 같은 노란 마늘 싹들이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요

나도 모르게 그걸 살짝 건드려 보고는

갑자기 손끝이 후끈거려서 또

그 옆, 어떤 싹눈에 오롯이 맺여 있는

물방울을 두근두근 만져보려는데요

세상에나! 맑고 깨끗해서

속이 환히 다 비치는 그 물방울이요

아 글쎄 탱탱한 알몸의 그 잡년이요

내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에 그냥 와락,

단번에 앵겨붙는 거였습니다

 

어쩝니까 벌건 대낮에

한바탕 잘 젖었다 싶었는데요

근데요 이를 또 어쩌지요

손가락이, 손가락이 굽어지질 않습니다요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2003, 문학동네> 중에서 -

 

 

 한 대학 총장이 공연을 위해 무대에 오른 자신의 제자를 가리키며 “이런 자그마한 토종이 감칠맛이 있다” 등의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성차별적이고 여성 비하적인 발언이라며 네티즌들도 가세했다. 이런 공인의 말실수는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오래전 일본의 극우 망언정치가인 후지오 문부성장관이 사석에서 “강간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성적 능력이 없으면 남자로서의 인생은 끝났다”는 식의 발언으로 자리에서 내쫒긴 외국의 사례에서부터 “안경 쓴 여자는 매력이 떨어진다”는 ‘소신’을 밝혔다가 사표를 쓴 환경부 고위 간부가 계셨는가 하면 “여자는 좀 얼빵한 맛이 있어야”한다는 발언으로 호된 망신을 당한 지방경찰청장도 있었다.

 

 당사자에겐 어처구니없는 일일지도 모르나 21세기는 ‘여성의 시대’임을 채 깨닫지 못했거나 세상이 달라졌음을 실감하지 못한 인사들의 거듭된 악수임이 분명하다. 

 

 그런걸 보면 시인이 좋을 때도 있다. 시에선 ‘아 글쎄 탱탱한 알몸의 그 잡년이요 내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에 그냥 와락, 단번에 앵겨붙는‘ 이런 농후한 표현도 가능하니 말이다. 가능만이 아니라 투명한 물방울에 탁월한 상상력을 주입하여 그 시리도록 깨끗한 영롱함이 더욱 돋보인 훌륭한 작품으로 오히려 상찬까지 받으며,’손가락이 굽어지지 않는‘ 고감도 에로티시즘도 더불어 체험할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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