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시의 힘/ 이진엽

모든 2 2018. 4. 13. 23:22



시의 힘/ 이진엽



그대의 방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잠시 놀랐었지

가을 들판이 그려진 액자

그 곁에 세워진 책장의 모서리 밑에

누군가의 시집 한 권이 꼬옥 깔려 있음에

아냐, 놀랄 것도 없었어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그대는 얼마나 책장과 씨름하다가

그 지혜를 얻었겠는가

한 권의 작은 시집

그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소중한가를

그대는 절실히 느꼈으리

비록 읽히진 않아도

혼신의 힘으로 무거운 원목을 받치고 있는

저 시집의 넉넉한 힘

시의 언어가 모이면 얼마나 굳센가를

세상은 비로소 깨달았으리

 

- 시집『겨울 카프카』(시학, 2013)

 


  책꽂이로 직행한 이후 단 한 번 누구의 손을 탄 적 없거나, 지난 신문지들을 묶어 내보낼 때 함께 버려질 수 있는 처지에 비해 책장의 모서리 밑에' 떠받치고 있는 시집 한 권의 굳건한 힘은 얼마나 듬직한가. 시집이란 대개 그리 두껍지도 얄팍하지도 않아 이런 용처에 전격 기용되기엔 안성맞춤의 물질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몇 겹으로 접은 신문지를 쑤셔 박는 것 보다, 짝이 맞지 않은 화투장을 하나씩 올려놓는 것 보다야 한결 고상한 품격이 아닌가. 짐작컨대 책방에서 돈을 주고 샀을 리는 만무할 터이고 누구로부터 증정 받은 시집이겠는데, 그 시집을 낸 당사자 시인이 이 탁월한 변용의 정경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따져보면 그 책장 깊숙한 곳에 세워져 있거나 책장 바깥에서 깔려 누운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으리오. 어쩌면 시의 힘이란 그렇듯 맞아떨어지지 않은 아귀로 균형을 잡지 못해 기우뚱하는 세상의 한쪽 모서리를 살짝 받쳐주는 그 정도의 에너지가 아닐까. 시와 시인이 홀대받고 시집이 읽히지 않은 시대에 그 만큼이라도 세상에 기여할 수 있다면 감사하고도 또 갸륵한 일 아닌가. 시인의 한 수로서 충분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시인이라고 모두 그런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아무 시나 다 그런 힘을 지닌 것도 아니리라.


  199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비평 활동도 겸하고 있는 이진엽 시인은 시인이 되려면 먼저 설한풍을 견디며 항아리 속에서 발효되는 김치를 보고 무엇인가를 배워라고 주문한다. 그러면서 진리를 추구하고 진실하게 살고자하는 최소한의 정신과 품격이 그 속성 안에 아름답게 고동치고 있지 않으면 참다운 시인이 되기 어렵다고 조언한다. 궁극적으로 시는 원고지 위에서가 아니라 그 시의 주제를 정직하게 실현하려는 매순간의 삶 속에서 완성된다는 시론을 피력하고 있다. 따라서 시와 시인은 등가의 관계를 맺어야 하며, 모름지기 존재의 깨달음없이 섣불리 시 쓰기에 나서는 일은 삼가는 게 옳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치열함이나 절차탁마를 거치지 않은 이번 내 시집은 불량품일 수밖에 없고 내놓기 부끄러운 시들임에 틀림없다. 다만 지난 첫 시집이 내 어머니를 제1독자로 겨냥했듯이 이번 시집도 시는 좆도 모르는 평생 제 손으로 시집 한권 사서 읽어보지도 않았을 무식한내 오랜 친구들을 주 고객층으로 삼았다는 것이고, 그것이 실은 내 한계이자 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혼도 없고 삶도 없는 기표들의 조합만으로 집적된 거품의 시집들과 함께 화분이나 뜨거운 냄비 받침대 대용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는 매일반일 것이다.


  그리고 시와 시인은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고매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해서 반드시 시를 잘 쓰는 것은 아니다. 어디 시인에게만 해당되는 부조리일까만 밑뿌리가 썩어 냄새가 진동해도 명망 높은 시인이 되고 착한 독자들은 그 시에 감동받기도 하는 것이다. 찝찝하지만 지나갈 도리밖에 없다. 일찍이 이상화 시인은 <시인에게>란 시에서 한 편의 시 그것으로 새로운 세계 하나를 낳아야 할 줄 깨칠 그 때라야/ 시인아, 너의 존재가 비로소 우주에게 없지 못할 너로 알려질 것이다이라며 시의 막중한 존재의 이유를 설파했다시가 시대와의 불화를 겪지 않을 때가 어디 있으랴만, 시의 위력과 무력이 동시에 느껴지는 이 시대야말로 역설적이게도 시인은 축복일 수 있다.


 ‘시의 언어가 모이면 얼마나 굳센가를 세상은 비로소 깨달을 혁명적인 때를 맞이할 것이라 믿는다. 내 시는 빼고 그렇게 힘을 쓸 시들이 봇물처럼 쏟아지길 기대하며 또 응원한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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