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박노해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뜨리는 칠흑 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신기루인가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
산 것이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세계 속에는 어둠이 이해할 수 없는
빛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
야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정신이
패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깜박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시집『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느린걸음, 2010)
박노해 시인이 오랜 침묵정진 속에서 육필 시 304편을 담아 12년 만인 지난 2010년에 출간한 시집의 맨 마지막에 수록된 시이자 표제작이기도 하다. 바이블에 버금가는 두툼한 시집이 마치 경전처럼 느껴졌는데, 실제로 길 잃은 시대에 목숨을 건 희망 찾기의 시편들이 회초리가 되는가 하면 보듬어 위로가 되어주는 시편들로 가득하다. 새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내 일상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내가 아는 것과 사는 것의 간극에 전류를 흐르게 하여 자괴감과 함께 뼈아픈 성찰을 안겨준다.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이기적인 삶에 경각심을 일깨우면서 명료하고 정직하게 우리의 심장을 찌르는 시들이다.
‘박노해의 시를 읽고 아프다면 그대는 아직 살아있는 것’이라는 희망 섞인 위로의 언사도 전해진다. 칼날처럼 불의한 시대의 심장을 찌르고 꽃잎처럼 상처 난 가슴에 피어나는 그의 시는 단 한 줄로도 치명적이다. 이럴 때 그저 겉멋에 취한 언술이나 내뱉으며 거짓 희망만을 부풀린 시들은 얼마나 무력한가. 가슴 속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장식과 허영의 시들은 또 얼마나 부끄러운가. 하지만 그의 시는 수많은 길을 돌아 나온 끝에 정직한 절망과 상처와 슬픔과 기도만큼 깊다. 참혹한 세계 분쟁의 현장과 험난한 오지마을의 울부짖음과 한숨만큼 울림은 크다. 그리고서 ‘사람만이 희망’이란 믿음을 다시 전한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고 자기약속을 한 바 있다. 여전히 자본의 횡포와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그는 소외계층을 끌어안고 약자들을 위하여 전장도 마다않고 달려가 변함없는 자기 사상의 일관성과 정체성을 행동으로 굳건히 보여주고 있다. 그 무렵부터 ‘생명·평화·나눔’을 기치로 내건 사회단체에서 ‘적은 소유로 기품 있게’ 살아가는 대안적 삶의 비전을 제시하는 등 사회진보운동에 진력해왔다. 그런 그를 진영논리를 앞세우는 측에서는 변절자니 위선자로 부르기도 한다. 사상의 탄력성에서 오는 말랑해진 감성적 말투가 그런 오해를 샀을지는 모르지만 진보적 가치를 버렸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는 세계의 구석구석 분쟁지역을 돌며 평화운동을 하면서 낡은 똑딱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모아 전시회도 가졌다. 이 시집에도 그 길에서 길어 올린 성찰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겼다.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역경과 고난 가운데서도 지켜야할 삶의 원칙과 잣대를 일깨우며 따뜻한 위안과 위로를 건넨다. 호롱불 하나를 들고 있는 께로족 청년은 시인의 또 다른 자아이며 시인은 존재의 망루에서 구원자를 기다리듯이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는 결국 시인을 향한 자기 자신을 위한 말이다. 어렵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똑 같이 외친다.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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