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마종기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많은 전화 소리가 당신 방을 완전히 채울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에서 보낸 전화 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
그 입술 근처나 가슴 근처를 비벼대고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
다시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 시집 『변경의 꽃』 (지식산업사, 1976)
접선되지 않은 전화벨 소리로 전해지는 사랑이라니 감동이다. 아날로그시대로 한참 거슬러가서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다. 보고 싶다 말하기도 어려운 사람, 그 사람에게, 받지 않는 전화란 걸 알면서도 전화를 걸어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피는 뜨거워지고 혈류는 빨라지며 허파꽈리는 긴박하게 오물거리면서 사랑이 작동된다. 다른 사람도 이런 경험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게도 당신의 보이지 않는 뒷모습을 보며 비슷한 전화질을 해본 특별한 경험이 있다. 지금은 짝사랑의 여인이었는지 헤어진 뒤의 그리움 때문인지조차도 분간이 어려운 오랜 기억이다.
어쨌든 당시 이장희의 ‘그건 너’의 노랫말처럼 그러다가 당신이 받으면 끊곤 하였는데 다행히 바보처럼 울지는 않았다. 정말 이 시처럼 당신에게 옮겨가는 신호음만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전화벨이 거듭 울릴 때마다 커져가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싫지 않았으며, 전화소리가 만들어가고 채워가는 풍경들 속에서 ‘은근한 소리의 눈’을 가질 수 있었던 게 위안이고 행복이었다. 지금처럼 누구나 개인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않고 밤낮 없이 조물거리는 텔레토피아 세상에선 상상할 수도 없고 이해하기는 더욱 힘든 그림들이다.
잠시라도 휴대전화가 없으면 불안초조해하고 한참동안 전화가 안 오면 등을 돌리거나 보낸 문자에 응답이 없으면 씹혔다며 배신감마저 드는 계산적이고 치밀한 시대이니 말이다. 사랑의 모든 진행은 휴대전화로 피드백 되고 사랑을 전하던 전화로 연인과 작별하는 세상이고 보면, 아무런 표시도 없이 내가 보낸 소리의 공명만 가득한 당신의 방에서 혼자서 사랑을 전하며 마치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끊임없이 써대는 짓거리라니. 얼마나 청승맞고 멍청하고 미련한 사랑인가. 그러나 서둘지 말고 한번 생각해 보라. 이 진화되지 않은 구닥다리 사랑법이 단호하고 즉각적인 이 시대의 사랑 놀음에 비해 얼마나 들썩이지 않고 고전적인지를.
내가 가진 휴대전화의 품질을 믿을 수 없는데다가 내 부주의와 게으름이 더해져 전화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 핑계를 둘러대자면 가장 큰 요인으로 배터리가 엄청나게 빨리 닳아 폰이 꺼져있는 상태가 날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때그때 충전하면 별 문제없겠으나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 그리고 꺼져 있을 때 걸려온 전화는 폰을 켜도 부재중 전화로 표시 되지 않는다. 옛날 같으면 대꾸 없이 ‘신호가 가는 소리’를 사랑의 이름으로 즐기기도 하겠지만 요즘은 짜증부터 내고 때로는 전화를 받지 않는 사람의 생활습관이나 인간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확실히 내 전화생활 습관은 문제적이다. 배터리가 방전될까 전전긍긍하는 이 시대와는 많이 동떨어져있다. 내 경우 배터리가 완전 방전된 후 충전을 하는 일이 다반사다. 이렇게 되면 자동차의 연료가 완전히 떨어진 뒤 급유하는 것과 같아 배터리는 물론 폰의 품질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배터리의 수명을 단축시키지 않으려면 평소 폰의 사용 습관부터 점검하는 게 중요하다. 폰의 밝기도 조절하고 저절로 가동하는 애플리케이션과 와이파이도 평소엔 꺼두는 게 좋은데 이런 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다. 지금은 배터리가 20%이상 남아도 갑자기 훅 가버린다. 이럴 때 누군가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전화를 해온다면...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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