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고라니에게 몸살을 옮다 / 박승민

모든 2 2018. 4. 13. 23:16



고라니에게 몸살을 옮다 / 박승민



메밀밭이 있던 눈밭에서 고라니가 운다.

희미한 비음이 눈보라에 밤새도록 쓸려온다.


나는 자는 척 베개에 목을 괴고 누웠지만

다시 몸을 뒤척여 민물새우처럼 등을 구부려 돌아누워 보지만

눈바람에 실려오는 울음소리가 달팽이관을 자꾸 건드린다.

바람소리와 울음소리가 비벼진 두 소리를 떼어내 보느라 눈알을 말똥거린다.


눈밭에 묻힌 발이 내게 건너오는지 흘러내리는 찬 콧물이 옮겨오는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코가 맹맹하고 팔다리가 자꾸 쑤신다.


어떤 생각만으로도 몸살은 오는지

몸살은 몸속의 한기를 내보내서 몸을 살리라는 뜻인데

나도 모르는 어떤 응달이 아직 살고 있는지 귀를 쫑긋한다.


아내에게는 고라니에게 몸살을 옮았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혼자 약 지으러간다.



- 시집 슬픔을 말리다(실천문학사, 2016)


 

 1969년에 방송된 김수현 작가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저 눈밭에 사슴이>란 라디오 드라마가 있었다. 줄거리는 모르겠고 어머니가 몸 낮추어 열심히 듣던 모습만 생생하다. 고라니는 사슴과에 속하는 조그마한 동물이다. 같은 사슴과인 노루보다도 연약하지만 강한 생명력으로 이미 사슴과 노루가 사라져 버린 야생에서 꿋꿋이 살아남아 있다. 노루가 많이 서식하는 한라산을 제외하면 웬만큼 숲이 우거진 산이나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지대에는 어디서든 볼 수 있다. 그러니 지금은 ‘저 눈밭에 사슴이’가 아니라 ‘저 눈밭에 고라니’쯤 되겠다.


 고라니가 좋아하는 먹이는 나무뿌리나 나무의 어린 싹이다. 그러므로 이런 먹이가 지천인 봄은 고라니가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계절이다. 하지만 겨울엔 나뭇잎도 나무 열매도 없으므로 고라니로서는 먹고 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게다가 눈까지 내려 그나마 남아 있는 풀이나 나무뿌리조차 찾을 수 없게 되면 하루하루 목숨을 잇는 것조차 힘겹고 생존이 불투명하다.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큰 눈이 내리면 굶어 죽는 고라니도 속출한다. 이런 때면 많은 고라니들이 먹을 것을 찾아 사람 사는 마을까지 내려온다.

 하얀 눈밭에서 사슴이 노니는 모습은 얼핏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보일 테지만 그들에겐 잔인한 겨울을 견디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시인은 그렇게 메밀밭까지 내려온 고라니의 ‘눈바람에 실려오는 울음소리’를 듣노라니 잠이 오지 않는다. 몸을 뒤척이는데 ‘눈밭에 묻힌 발이 내게 건너오는지’ 으쓱 오한이 든다. ‘어떤 생각만으로도 몸살은 오는지’ 이건 분명히 ‘고라니에게 몸살을 옮은’것이다. 내 몸속에 이미 존재하는 ‘나도 모르는 어떤 응달’과의 조응이 이뤄지면 고라니의 절박함이 바로 내 처지로 공감이 되고 연민하게 되는 것이다.

 쉬 납득이 되지 않을 수 있어 ‘아내에게는 고라니에게 몸살을 옮았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혼자 약 지으러간다’ 이렇듯 여릿여릿한 심성을 지닌 사람이 박승민 시인이다. 그 박승민 시인이 지난 주말 영주에서 열린 대구경북작가회의 2018총회에서 새 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동안 중추적 위치에서 조직을 잘 이끌어왔던 김용락 시인이 중임의 임기도 끝났고 ‘한국국제교류진흥원’ 원장으로 발탁됨에 따라 ‘부득이’ 새 지회장을 뽑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경북지역에서 문학적 역량과 사무국장 경력도 갖춘 64년생 ‘젊은 피’ 박승민 시인에게 맡겨졌다.

 기우이며 오지랖일지 모르겠으나 한 가지 염려되는 부분은 가뜩이나 대구 경북이란 보수적 풍토에서 각종 문학관련 지원과 참여기회로부터 ‘작가회의 패싱’이 심화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대구경북에서 작가회의 회원이란 사실만으로도 용기가 필요하고 편견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불편할 수 있다는 김용락 전 지회장의 말에 비추어보면 우려가 없지 않다. 그동안 ‘작가회의’는 ‘문인협회’와의 불균형으로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던 것도, 관에서는 ‘작가회의’를 아웃사이더 임의단체쯤으로 인식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대구지역에서는 연임된 김수상 사무국장의 책임과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대구에서는 많은 회원이 작가회의 회원인 동시에 문인협회 회원이기도 하다. 내 경우도 등단 후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가입해야 한다기에 지역문협 회원이 되었고 2006년엔 사무국장까지 2년 했다. 올해는 문협도 대구시인협회도 수장이 다 바뀌었다. 이러한 때 균형을 맞추어 서로 존중하고 협력관계를 유지해간다면 문인협회로서도 지역사회에도 국가적 관점에서도 나쁠 게 없다. 진보는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해결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신뢰하며 저 눈밭의 고라니에게도 연민의 시선을 보낼 줄 아는 존재이다. 작가회의의 존재감을 살려내고 그 책무를 다할 때 지역문화의 안정감과 역동성도 담보될 것이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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