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버리긴 아깝고/ 박철

모든 2 2018. 4. 13. 23:17



버리긴 아깝고/ 박철

 

 

일면식 없는

한 유명 평론가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서명한 뒤 잠시 바라보다

이렇게까지 글을 쓸 필요는 없다 싶어

면지를 북 찢어낸 시집

 

가끔 들르는 식당 여주인에게

여차여차하여 버리긴 아깝고 해서

주는 책이니 읽어나 보라고

 

며칠 뒤 비 오는 날 전화가 왔다

아귀찜을 했는데 양이 많아

버리긴 아깝고

 

둘은 이상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뭔가 서로 맛있는 것을

주고받은

그런 눈빛을 주고받으며



- 시집 작은 산(실천문학사, 2013)


 

  시집을 내본 경험이 있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이와 유사한 상황에서 씁쓸함을 겪었음직하다. 시집을 내는 방식에는 자신이 소요경비를 모두 부담하는 자비출판과 상업적 판매를 염두에 둔 기획출판이 있다. 그런데 기획출판은 전체 시집의 5% 안팎, 넉넉히 추정해도 10%를 밑돌고 나머지는 거의 자비로 출판하는 것이 문단의 현실이자 비애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처럼 어중간한 시인이 기획출판을 하게 되면 오히려 출판사 측에 손해를 끼치진 않을까 그 부분이 또 걸리고 염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기획출판의 경우 초판은 인세를 시집으로 받는 게 상례다보니 나도 초판 10% 인세에 해당하는 만큼 계산해 시집으로 1백여 권을 받았다. 그제(21) 받자마자 몇몇 개인적으로 선주문 받은 곳에 택배로 보내고 표4를 써주신 두 분 시인께만 전해드렸는데 책이 절반도 채 남지 않았다. 두루두루 신고도 하고 책 빚을 갚으려면 출판사에 정가의 70% 현금지불하고 구입해야 하는데, 출판사 측에선 한번 시장 판매를 해보겠다는 의욕 때문인지 살림살이를 축내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인지는 몰라도 저자 구입을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다.


  아무튼 그런 처지임에도 월요일엔 증정 시집을 1차 발송할 계획이다. 내 목록엔 일단 일면식도 없는 평론가와 덮어놓고 유명 시인은 송구스럽지만 제외다. 물론 보내고 싶어도 주소 파악이 되지 않아 못 보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박철 시인의 이렇게까지 글을 쓸 필요는 없다싶은 이유에 추가하여 괜히 시집을 보내고선 아니, 이게 무슨 시야’ ‘시는 좆도 모르는 놈이따위의 좋은 소리 못 들을 것에 겁을 먹거나, 읽지도 않고 획 내동댕이쳐지지는 않을까 하는 지레짐작도 그 이유이다.


  하지만 박철 시인 정도의 문학적 역량과 문단에서의 비중을 고려한다면 어떤 평론가라도 마냥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자기 시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스스로 대견해하는 일부 시인들처럼 마구 평론가들에게 들이대며 자랑하고자 하는 수작도 아닐 것이며, 공연히 존재감을 드러내거나 생색내기 위함도 아닐 것이다. ‘면지를 북 찢어낸까닭도 내 시집에 관심 가져주고 문단 활동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은 얄팍한 기대감으로 시집을 보내는 여느 시인들처럼 평론가에게 읽히는 것이 싫었던 것이리라.


  다른 이들의 그런 의도를 굳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시인은 자존감 훼손이라 생각되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낙장 된 시집을 시인은 이웃식당 여주인에게 줘버렸다. ‘버리긴 아깝고란 말에는 정중하게 생색내듯 주는 게 어색했고 상대에게 부담을 주기 싫었던 까닭이 반영되었다. 그런데 그 시집으로 뜻밖의 아귀찜대접을 받았다. 물론 식당여주인의 버리긴 아깝고라는 말 역시 시인이 책을 건네며 민망함을 덜 요량으로 덧붙였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집이라는 특별한 선물을 받고 그 고마움을 시인의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이상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뭔가 서로 맛있는 것을 주고받은시인으로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평론가에게 보내기보다 백번 잘 한 짓이라 생각했으리라. 이렇게 매콤한 아귀찜이 되어 돌아오는 시를 쓰기만 해도 시인은 참 행복하겠다. 나도 이런저런 고민이 없는 건 아니지만 꼭 보내고 싶은 곳만 시집을 보내고자 한다. 내 시운동의 궁극적 목표 가운데 하나가 시집의 무상증정 풍토가 바뀌어 시집을 사서 읽는 분위기의 조성이다. 시원찮은 내 시집 역시도 언감생심 그 같은 대접을 받으면 좋겠지만, 내 아는 사람 가운데 아무리 그래봐야 소용없을 분들에게는 도리 없이 시집을 보내드릴 작정이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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