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나비 사랑/임영조
해 저문 양수리 호반가든
저녁놀 쓴 나비부인 대여섯
평상에 앉아 소주잔을 돌린다
얇게 썬 시국과 갖가지의 소문을
석쇠 위에 뒤적뒤적 굽는다
숯불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취기로
색이 진한 입담이 무르익는다
막가는 정치 경제 문학을 씹고
우상을 씹고 치정을 씹다 도로 삼킨다
식욕과 성욕은 왜 아무리 씹어도
덜 익은 고기처럼 질긴 것일까
나도 넌즛 한 마리 나비가 되어
두 귀가 팔랑팔랑 그쪽으로 기운다
추녀 끝에 빛부신 살충등이 설마
나락인 줄 모르고 날아드는 불나비
눈먼 사랑도 더러는 열락이 될까
뉴욕 하늘 찌르던 쌍둥이 빌딩
현란한 불빛이 새 아침 열 때
난데없이 날아든 불나비 두 마리
급소를 향해 일침 놓고 재가 된
살 떨리는 경악도 우기면 순교라고?
날마다 한 소절의 득음을 찾아
막막하고 하얀 사막 헤매는 나도
그 어림없는 짝사랑도 어쩌면
부싯돌 사랑 같은 것일까
가슴 속에 숨긴 불씨도 누가 보면
위험한 불나비 사랑일까?
-시집『시인의 모자』(창비, 2003)-
삼겹살 노릿하게 익어갈 무렵 또 다른 안주가 뜨겁게 달궈진다. '얇게 썬 시국과 갖가지의 소문을 석쇠 위에 뒤적뒤적 굽는다' 이 땅에 사는 사람만큼 안주거리의 푸짐한 혜택을 누리는 나라가 또 있을까. 어디서든 벌어지는 시국좌담회에 세워지는 정치전망대다. 요 몇 달 동안은 가뜩이나 넘치는 안주접시 위에 15년 전 뉴욕 쌍둥이빌딩을 향해 ‘난데없이 날아든 불나비 두 마리 급소를 향해 일침 놓고 재가 된 살 떨리는 경악’보다 더 충격적인 두 불나비 최순실 박근혜가 날마다 공수하는 싱싱한 안주꺼리들로 애꿎은 빈 술병의 개수만 늘리고 있다.
비단 술집만이 아니다. 잠삼이사의 안주삼아 술집에서나 씹다말고 내뱉는 수준의 말들이 종편채널을 휘젓고 얍삽한,교활한,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밉상인, 이율배반적인 정치평론가들은 살판이 났다. 이 땅은 온통 정치가 술을 먹이고 안주가 되어 사람들을 핏발선 대폿집 우국지사로 만든다. 하지만 그동안 공동의 책임은 무책임이 되었고, 서툰 노변정담은 화로 속의 재로 남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당연히 장차는 달라지겠지만, 그래야 마땅하겠으나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뱉어낸 낱말들이 널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안주감은 늘 새로운 메뉴로 다시 바뀌고 바뀔 준비가 되어 있다. '숯불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취기로 색이 진한 입담이 무르익는다' '막가는 정치'뿐 아니라 '경제, 문학을 씹고 우상을 씹고 치정을 씹다 도로 삼킨다' 그럼에도 이게 어디냐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옛날 자정사이렌이 울리면 사람들의 발목이 일제히 붙들려 적막강산이었던 시절,무슨 입이라도 벙긋할라치면 가재미눈이 되어야 했고, 대폿집에서 신중현의 ‘미인’을 젓가락 두드려가며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로 바꿔 부르는 것조차 잘못 걸리면 경을 쳤다.
그게 또 장기집권을 비꼬는 노골적이고 악의적인 개사라면서 붙잡혀가서는 아무리 영자를 애타게 그리는 심정으로 불렀다고 해명을 해도 소용없이 곤욕을 치러야 했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 지금도 국방부는 무슨 영문인지 '아리랑'을 금지곡으로 묶고, 문체부는 삐딱한 영화에 출연했다고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민중'이란 단어에 경기를 일으키고 있지만 그래도 세상 참 좋아졌다. 건성건성 박수를 친 것도 죄가 되어 죽임을 당하는 저 공포집단에서 죽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건강 박수를 쳐대는 것에 비하면 얼마나 너그러운 나라인가. 감사할 일인가.
나라가 이 판국인데도 자기 정치나 하려들고, 제 주판알만 튕기며 자기 계산에만 열중해있는 정치인들을 보면 무척 실망스럽고 화가 나지만 '나도 넌즛 한 마리 나비가 되어 두 귀가 팔랑팔랑 그쪽으로 기운다' 시인은 ‘날마다 한 소절의 득음을 찾아 막막하고 하얀 사막 헤매’다 일찌감치 저 세상으로 건너갔지만, 나는 소질 없는 시의 급소보다는 정의와 양심, 자유와 평화가 넘실대는 통일된 조국. '그 어림없는 짝사랑'을 향해 '가슴 속에 숨긴 불씨' '누가 보면 위험한 불나비사랑'을 한해가 다가는 저물녘 노래방에서 아무렇게나 불러재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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