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신영복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서화 에세이 『처음처럼』 (랜덤하우스, 2007)-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된 서울대 경제과 출신 27세의 대학 강사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 간 감옥을 살고 나와 옥중 서신을 모아 출간한 책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이후 조용하면서도 견고한 정신세계로 다시 우리를 이끈 책이 <처음처럼>이며, 강의 녹취록을 재구성해 2015년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라는 부제로 펴낸 책이 <담론>이다. 선생의 1주기를 맞아 그 <담론>을 펼쳐든다. 신영복 선생 특유의 따뜻한 인생관과 세계관이 묻어나는 글을 읽다보면 문장의 길이에 상관없이 긴 여운을 남기는 구절을 자주 만난다. 그래서 봤던 것을 가끔 다시 들추어 읽을 정도로 선생의 글을 좋아하고 선생을 존경해왔다.
삶에 대한 사색, 생명에 대한 외경, 함께 사는 삶, 성찰과 희망에 대한 여러 글들 가운데서 이 시적 문장이 가장 묵직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세상을 살다보면 숱한 난관과 부딪히고 그때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내면서 마음을 굳세게 하건만, 단호한 결심 또한 쉽게 무너지는 일이 잦았다. 선생께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일관된 주제가 바로 역경을 견디는 자세에 관한 것이다. 이 시에 이은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라는 구절이 그 핵심이다. 수많은 처음이란 결국 끊임없는 성찰이며, 날마다 갱신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이리라.
나목이 잎사귀를 털어내고 자신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성찰의 자세가 바로 책에 나오는 ‘碩果不食’의 진정한 의미라고 할 수 있겠다. 본래 주역에 나오는 말로서, ‘석과불식’이란 과실나무에 달린 가장 큰 과일, 즉 씨 과실은 먹지 않고 땅에 묻는다는 의미다. 다 빼앗겨도 종자는 지키라는 뜻이다. ‘처음처럼’과 ‘석과불식’의 의미가 일맥상통한다. 봄이 되어 씨 뿌릴 곡식을 남겨 둬야 이듬해를 살 수 있다는 뜻이고, 자기의 욕심을 억제하고 후손에게 복을 끼쳐주라는 교훈이 담겨있다. 머지않아 새로운 정권으로 교체될 터이지만, 우리가 희망의 씨종자로 지켜야 할 것들은 사람이든 정신이든 깔쥐뜯어 함부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그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로 만드는 일입니다. 사람은 다른 가치의 하위개념이 아닙니다.사람이 '끝'입니다. 절망과 역경을 '사람'을 키워 내는 것으로 극복하는 것, 이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입니다. 최고의 인문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욕망과 소유의 거품, 성장에 대한 환상을 청산하고 , 우리의 삶을 그 근본에서 지탱하는 정치 경제 문화의 뼈대를 튼튼히 하고 사람을 키우는 일, 이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이고 희망의 언어입니다” <담론>의 뒤표지에 놓인 글이다. 선생의 정신적 지문이 잔뜩 묻은 글을 읽으며 새날 풋기운으로 진정한 세상의 새봄을 맞기로 다시 내 마음 내가 보듬는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삶과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일”임을 가슴에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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