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8년 주보

연중 제2주일 2018년 1월 14일(나해)

모든 2 2018. 1. 14. 22:30

  

세종도원성당(공주지구)

본당 설립:2015. 1. 9. 주보 성인:성 베드로 

 

  +  요한 복음 1,35-42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

 

  그때에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무엇을 찾느냐?"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하시니,그들이 함께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말씀의 향기>

 

  "와서 보아라"  -박진홍 요셉 주교좌 대흥동 성당

 

  올해 우리 대전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입학을 희망하는 예비 신학생이 세명이라고 합니다. 프랑스 선교사 신부님들께서 목숨 걸고 신학생 세 명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던 1836년 조선시대 이야기가 아니라,2018년 지금,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25년 전 대전교구 신자들이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드리고 모금도 하며,겨우 마련한 대전가톨릭대학교 ! 23명의 첫 입학생을 보며 하느님께 감사드렸던 그날을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상황앞에 서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너무나 뻘줌해진 느낌이듭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건 미래를 생각 못하고 무리하게 신학교를 만든 생각부터 잘못된 거야!'라며 강 건너편에 서서 비겁한 비난이나 중얼거리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아담 하와 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못된 습관! 무슨 일(?) 생기면 희생양 하나 뽑아서 책임 전가부터 하려는 습성을 그대로 살려서 '성소국장 나와! 책임져!' 라고 소리를 지를 것인가?

  저는 이 시점에 오늘 복음을 통해 "와서 보아라"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체험을 합니다. 교회는 '어디에 묵고 계시냐?' 고 질문을 하는 이 시대 앞에서 어떤 응답을 하며 살아왔던가?하는 반성과 함께 말입니다.

  거룩한 교회는 그 안에 너무나 소중한 보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소중한 보물을 지키려는 마음이 잘못 표현되어 거룩함이 '두려움'이나 '엄격함'또는 '어두움'이나 '무거움'드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거룩함이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감히 가까이 다가서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을 맞을 것 같은..'이미지로 비춰지고 있는 건 아닌지요? 그래서 그에 대한 반발로 교회를 무시하려는 이들이 나타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거룩함의 이미지는 마굿간에 태어난 아기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미지여야 합니다. 모두가 사랑받고 모두가 용서받는 곳,그래서 그 사랑에 감사하며 모두가 사랑을 드릴 수 밖에 없는 그곳이 거룩한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교회가 이 시대에 보여 주어야 할 것은 '거룩함'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은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성소는 '성소 생태계(?)'가 만들어져야 숨을 쉴 수가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세속적 욕심을 채우는데 도움을 주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 사랑을 실천하는 곳,기도로 천상의 교회와 끊임없이 대화를 주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 사랑을 실천하는 곳,기도로 천상의 교회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이들이 사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곳이야 말로 거룩한 아기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고,거룩한 부르심을 들을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야기해 줍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교회가 어떤 곳이냐고 물어볼 때, "와서 보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그 거룩한 삶을 스스로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via의 시선(듣는 오늘)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조금 이른 저녁 시간,성당에 들어갔습니다. 한사람이 보입니다. 누군지 알지 못합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궁금해집니다. 지금 이 시간,저 사람은 하느님과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

 

  말이 줄었습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겠습니다. 가급적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많은 말을 하고 살아야 하는 삶이지만,가급적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말을 하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충분한 시간이면 좋습니다.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말을 해야 하는 시간이 될 때까지 주로 소리를 듣습니다. 보고 듣고 써보고 그리고 시간이 차면 말합니다.

 

  말을 하지 않으면 많이 듣게 됩니다. 듣는 행위는 밖의 것을 안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선택입니다. 들음은 자신의 몸 밖의 것에 열려있는 자신을 드러냅니다. 들을 수 있을 때 아니 듣고자 하는 지향이 있을 때 나와 대화를 나누는 이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와 이웃 사이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많은 말을 듣습니다. 말을 들으면서 알아차립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분별하게 됩니다. 말의 오용이 발생시키는 말의 퇴폐화와 더불어 말을 하고 있는 인간의 사복개천같은 모습을, 말을 들으면서 말을 듣기가 싫어집니다.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알아차리기 위해서 말을 합니다. 자신의 입을 통해서 내뱉는 말을 처음 듣는 사람은 자기자신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을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말은 파동으로 전해집니다.그리고 파동의 출발점은 언제나 자기 자신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자신의 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그 사람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대부분 이런 사람들은 타인을 속이기 위해서 자신을 대부분 이런 사람들이거나 자신이 해야 할 말과 다른 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제단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봅니다. 잠시 그를 위해 기도하고 강복합니다. 잠시 말을 멈추고 듣는 그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필요를 넘치도록 채워주시기를 희망합니다.

 

 

복 많이 깨달으세요!

 

 

  해가 바뀌고 나서 한동안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주로 지인들로부터 온 신년 축하 메시지였습니다.

 

  새해 덕담을 전하는 고마운 마음들을 느끼며 저 또한 답글로 제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받은 문자 메시지나 제가 보낸 답글 또한 거의  천편일률적이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시는 일 모두 성취하세요."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달라도 덕담은 비슷비슷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던 중,정말 독특하고 기발한 문자 메시지 하나를 받게 되었습니다.

 

  "새해에는 복 많이 깨달으세요!"

 

  짧지만 그 자체로 소중한 깨달음을 주는 덕담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복을 받는 것과 복을 받고 있음을 느끼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복을 받는 건 '행운'을 바라는 것이고,복을 받고 있음을 깨닫는 건 '행복'을 경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라지 않아도 주어진 고마운 것들은 생각보다 많은데,우린 그것들을 종종 잊기에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엉뚱하게 언제 행운이 내게 찾아올까 기다립니다.

 

  매 순간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그 자체가 은총임을 깨닫는 지혜로 한 해를 기쁘게 살아야겠습니다. 여러분도 "새해에는 복 많이 깨달으세요!"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세상이 큰 밝음 하나였음 좋겠다.

아니다

가끔은 흐리고 바람이 불어도 좋겠다.

그러다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좋겠다.

 

그래도

어느 날에는 꽃이 필거니까

그리고 이쯤 어딘선가

향기가 퍼질 테니까.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