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 오백리길

대청호 오백리길 20구간 문의과거마을길[2]

모든 2 2017. 9. 23. 08:51




문의 문화재단지












아! 신화같이 다비데군들/신동문


서울도/해 솟는 곳/동쪽에서부터/이어서 서 남 북/거리거리 길마다/손아귀에/돌 벽돌알 부릅쥔 채/

떼지어 나온 젊은 대열/아! 신화같이/나타난 다비데군들


혼자서만/야망 태우는/목동이 아니었다/열씩/백씩/천씩 만씩/어깨 맞 잡고/팔짱 맞 끼고/

공동의 희망을/태양처럼 불 태우는/아! 새로운 신화/젊은 다비데군들


고리아테아닌/거인/살인전제 바리케이트/그 간악한 조직의 교두보/무차별 총구 앞에/

빈 몸에 맨 주먹/돌알로써 대결하는/아! 신화같이/기이한 다비데군들


빗살치는/총알 총알/총알 총알 총알 앞에/돌 돌/돌 돌 돌/주먼 맨주먹 주먹으로/

피비린 정오의/포도에 포복하며/아! 신화같이/육박하는 다비데군들


저마다의/가슴/젊은 염통을/전체의 방패삼아/관혁으로 내밀며/쓰러지고/

쌓이면서/한발씩 다가가는/아! 신화같이/용맹한 다비데군들


승천하는/아우성/혀를 깨문/앙까님의/요동치는 근육/뒤틀리는 사지/약동하는 육체의/

조형의 극치 이루며/아! 신화같이/싸우는 다비데군들


마지막 발악하는/총구의 몸부림/광무하는 칼날에도/일사불란/해일처럼 해일처럼/밀고 가는 스크램/

승리의 기를 꽂을/악의 심장 위소를 향하여/아! 신화같이/전진하는 다비데군들


내 흔드는/깃발은/쓰러진 전우의/피묻은 옷자락/허영도 멋도 아닌/목숨의 대가를/

절규로/내흔들며/아! 신화같이/승리 할 다비대군들


멍든 가슴을 풀라/피맺힌 마음을 풀라/막혔던 숨통을 풀라/짓눌린 몸뚱일 풀라/

포박된 정신을 풀라고/싸우라/싸우라/싸우라고/이기라/이기라/이기라고


아! 다비데여 다비데들이여/승리하는 다비데여/싸우는 다비데여/쓰러진 다비데여/

누가 우는가/너희들을 너희들을/누가 우는가/눈물아닌 핏방울로/누가 우는가/

역사가 우는가/세계가 우는가/신이 우는가/우리도/아! 신화같이/우리도/운다.


-4.19의 한 낮 에





미원(米院) 수산리(秀山里) 고인돌


이 고인돌은 미원면 수산2리 원미마을 앞 도로의 동쪽 25m 지점에 있었던  고인돌로

1978년 청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조사 되었다.

 

당초 고인돌의 위치는 남북방향이었으며,규모는 길이 240cm 너비120cm 높이 70cm로 고임돌이

없는 남방식(南方式) 고인돌이다.


조성시대는 청동기시대로 추정되며,1997년 7월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문의(文義) 아득이 고인돌


이 고인돌은 대청댐 건설로 수몰된 가호리(佳湖里) 아득이 마을에 있던 고인돌로서

1977년 12월에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발굴 조사된 것이다.


덮개돌은 2개로 북쪽의 것은 304*125*43~53cm의 규모이고,남쪽의 것은 278*150*40~55cm의

규모로 총 214개의 구멍[性穴]이 있으며,건립시기는 쳥동기(靑銅器)시대로 추정된다.


고인돌은 선사시대의 거석(巨石) 기념물로 장례의식(葬禮儀式)의 산물이다.


대청댐 수몰로 이전(移轉)되었던 이 고인돌을 1997년 4월 이곳으로 이전(移轉)하였다.



내수(內秀) 탁평리 고인돌


이 고인돌은 내수읍 도원 사거리에서 충주 방면으로 1km쯤 지나 오른쪽 야산 위에 있었던

고인돌로 이곳 주민들은 성황당(城隍堂)이라고도 불렀다.


최근까지 고인돌의 개석(蓋石)을 제단(祭壇)으로 사용하여 정월 동제(洞祭)를 지내왔다고 한다.


규모는 가로 200cm,세로 120cm,높이 40cm로 청동기 시대에 조성되었다.


1997년 5월 이곳으로 이전(移轉)하였다.









































































여막


여막은 묘소 또는 궤연(혼백이나 신주를 모셔 두는 곳) 가까이에 지어놓고 상주가 탈상 할때까지 거처하는 곳이다.

이곳에 설치된 여막은 강내면 연정리 한양조씨 문중의 조육형과  부친 조병천(2000년 4월 작고) 이 대를 이어

시묘(부모 상을 당하여 묘소옆에 여막을 짓고 생활하며 묘를  보살피는 일)를 하여 주변으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어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여막과 묘소를 재현하였다.


특히,조병천옹은 지난 1957년 부친이 사망하자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눈이오나 비가오나 3년동안 생식을 하며

시묘생활을 했으며 선친묘소에 공장이 들어서자 이장(묘소를 옮김)한 뒤 또다시 3년동안 여막에서

시묘생활을 했다.


우리의 옛조상들은 효(孝)를 백행지본(百行之本)으로 여기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하였으니 위 두사람의

효행은 인륜(人倫)과 천륜(천륜)이 사라져가는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