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그리고 시

역대 정지용문학상 수상작

모든 2 2014. 8. 13. 10:29

 

서한체(書翰體) (1회)/박두진

 

 노래해 다오. 다시는 부르지 않을 노래로 노래해다오.

단 한 번만 부르고 싶은 노래로 노래해 다오.

저 밤하늘 높디높은 별보다도 더 아득하게

햇덩어리 펄펄 끓는 햇덩어리보다 더 뜨겁게,

일어서고 주저앉고 뒤집히고 기어오르고

밀고가고 밀고 오는 바다

파도보다도 더 설레게 노래해다오.

꽃잎보다 바람결보다 빛살보다 더 가볍게,

이슬방울 눈물방울 수정알 보다 더 맑디맑게 노래해다오.

너와 나의 넋과 넋, 살과 살의 하나 됨보다 더 울렁거리게,

그렇게 보다 더 황홀하게 노래해다오.

환희 절정 오싹하게 노래해다오.

영원 영원의 모두, 끝과 시작의 모두, 절정 거기 절정의 절정을 노래해다오

바닥의 바닥 그 심연을 노래해다오.

 

 

해변가의 무덤 (2회)/김광균

 

 꽃 하나 풀 하나 없는 荒凉한 모래밭에

墓木도 없는 무덤 하나

바람에 불리우고 있다.

가난한 漁夫의 무덤 너머

파도는 아득한 곳에서 몰려와

허무한 자태로 바위에 부서진다.

 

 언젠가는 초라한 木船을 타고

바다 멀리 저어가던 어부의 모습을

바다는 때때로 생각나기에

저렇게 서러운 소리를 내고

밀려왔다 밀려나가는 것일까.

 

 오랜 세월에 절반은 무너진 채

어부의 무덤은 雜草가 우거지고

솔밭에서 떠오르는 갈매기 두어 마리

그 위를 날고 있다.

 

 갈매기는 생전에 바다를 달리던

어부의 所望을 대신하여

무덤가를 맴돌며 우짖고 있나 보다.

 

 누구의 무덤인지 아무도 모르나

오랜 조상때부터 이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태어나

끝내는 한줌 흙이 되어 여기 누워 있다.

 

 내 어느 날 지나가던 발길을 멈추고

이 黃土 무덤 위에 한잔 술을 뿌리니

해가 저물고 바다가 어두워 오면

밀려오고 또 떠나가는 파도를 따라

어부의 소망일랑

먼― 바다 깊이 잠들게 하라.

 

 

작은 연가 (3회)/박정만

 

 사랑이여, 보아라

꽃초롱 하나가 불을 밝힌다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너와 나의 사랑을 모두 밝히고

해질녘엔 저무는 강가에 와 닿는다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流水와 같이 흘러가는 별이 보인다

우리도 별을 하나 얻어서

꽃초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

눈 밝히고 가다가다 밤이 와

우리가 마지막 어둠이 되면

바람도 풀도 땅에 눕고

사랑아, 그러면 저 초롱을 누가 끄리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우리가 하나의 어둠이 되어

또는 물 위에 뜬 별이 되어

꽃초롱 앞세우고 가야 한다면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눈 밝히고 눈 밝히고 가야 한다면.

 

 

구룡사 시편(龜龍寺詩篇). 겨울노래(4회)/오 세 영

 

 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 그늘 지고 산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도

간 데 없고

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온 데 없다.

길 끝나 산에 들어섰기로

그들은 또 어디 갔단 말이냐.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는 폭설(暴雪)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인데

어제는 온종일 난(蘭)을 치고

오늘은 하루 종일 물소리를 들었다.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석류 (5회)/이가림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 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이상 견딜 수 없구나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등켜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몸을 휩싸고 도는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트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주소서

 

 

 

 큰 노래 (6회)/이 성 선

 

큰 산이 큰 영혼을 가른다.

우주 속에

대붕(大鵬)의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설악산 나무

너는 밤마다 별 속에 떠 있다.

산정(山頂)을 바라보며

몸이 바위처럼 부드럽게 열리어

동서로 드리운 구름 가지가

바람을 실었다. 굽이굽이 긴 능선

울음을 실었다.

해지는 산 깊은 시간을 어깨에 싣고

춤 없는 춤을 추느니

말없이 말을 하느니

아, 설악산 나무

나는 너를 본 일이 없다.

전신이 거문고로 통곡하는

너의 번뇌를 들은 바 없다.

밤에 길을 떠나 우주 어느 분을

만나고 돌아오는지 본 일이 없다.

그러나 파문도 없는 밤의 허공에 홀로

절정을 노래하는

너를 보았다.

다 타고 스러진 잿빛 하늘을 딛고

거인처럼 서서 우는 너를 보았다.

너는 내 안에 있다.

 

 

승 천(昇天)(7회)/이수익

 

내 목소리가

저 물소리의 벽을 깨고 나아가

하늘로 힘껏 솟구쳐 올라야만 한다.

소리로써 마침내 소리를 이기려고

가인(歌人)은

심산유곡 폭포수 아래서 날마다

목청에 핏물어리도록 발성을 연습하지만,

열길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쉽게 그의 목소리를 덮쳐

계곡을 가득 물소리 하나로만 채워 버린다.

그래도 그는 날이면 날마다

산에 올라

제 목소리가 물소리를 뛰어넘기를 수없이 기도하지만,

한번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는

폭포는

준엄한 스승처럼 곧추앉아

수직의 말씀만 내리실 뿐이다.

끝내

절망의 유복자를 안고 하산한 그가

발길 닿는 대로 정처없이 마을과 마을을 흘러다니면서

소리의 승천을 이루지 못한 제 한(恨)을 토해냈을 때,

그 핏빛 소리에 취한 사람들이

그를 일러

참으로 하늘이 내리신 소리꾼이라 하더라.

 

 

마음의 고향6 (8회)/초설(初雪)이시영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참새 떼 왁자히 내려앉는 대숲마을의

노오란 초가을의 초가지붕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토론 잎에 후두둑 빗방울 스키고 가는

여름날의 고요 적막한 뒤란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추수 끝난 빈 들판을 쿵쿵 울리며 가는

서늘한 뜨거운 기적소리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빈 들길을 걸어 걸어 흰옷자락 날리며

서울로 가는 순이 누나의 파르라한 옷고름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아늑한 상큼한 짚벼늘에 파묻혀

나를 부르는 소리도 잊어비린 채

까닭 모를 굵은 눈물 흘리던 그 어린 저녁 무렵에도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싸락눈 홀로 이마에 받으며

내가 그 어둑한 신작로 길로 나섰을 때 끝났다

눈 위로 막 얼어붙기 시작한

작디작은 수레바퀴 자국을 뒤에 남기며

 

 

 

 백두산(白頭山) 천지(天池) (9회)/오탁번

 

1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가까워 장백소나무 종비나무 자작나무 우거진 원시림 헤치고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순례의 한 나절에 내 발길 내딛을 자리는 아예 없다 사스레나무도 바람에 넘어져 흰살결이 시리고 자잘한 산꽃들이 하늘 가까이 기어가다 가까스로 뿌리내린다 속손톱만한 하양 물매화 나비날개인 듯 바람결에 날아가는 노랑 애기금매화 새색시의 연지빛 곤지처럼 수줍게 피어있는 두메자운이 나의 눈망울 따라 야린 볼 붉히며 눈썹 날린다 무리를 지어 하늘 위로 고사리 손길 흔드는 산미나리아재비 구름국화 산매발톱도 이제 더 가까이 갈 수 없는 백두산 산마루를 나 홀로 이마에 받들면서 드센 바람 속으로 죄지은 듯 숨죽이며 발걸음 옮긴다

 

 

2

솟구쳐오른 백두산 멧부리들이 온뉘 동안 감싸안은 드넓은 천지가 눈앞에 나타나는 눈깜박할 사이 그 자리에서 나는 그냥 숨이 막힌다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백두산 그리메가 하늘보다 더 푸른 천지에 넉넉한 깃을 드리우고 메꿎은 우레소리 지나간 여름 한 나절 아득한 옛 하늘이 내려와 머문 천지 앞에서 내 작은 몸뚱이는 한꺼번에 자취도 없다 내 어린 볼기에 푸른 손자국 남게 첫울음 울게 한 어머니의 어머니 쑥냄새 마늘냄새 삼베적삼 서늘한 손길로 손님이 든 내 뜨거운 이마 짚어주던 할머니의 할머니가 백두산 천지 앞에 무릎 꿇은 나를 하늘눈 뜨고 바라본다 백두산 멧부리가 누리의 첫새벽 할아버지의 흰 나룻처럼 어렵고 두렵다

 

 

3

하늘과 당 사이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 천지가 그대로 하늘이 되고 구름결이 되어 백두산 산허리마다 까마득하게 푸른 하늘 구름바다 거느린다 화산암 돌가루가 하늘 아래로 자꾸만 부스러져 내리는 백두산 천지의 낭떠러지 위에서 나도 자잘한 꽃잎이 되어 아스라한 하늘 속으로 흩어져 날아간다 아기집에서 갓 태어난 아기처럼 혼자 울지도 젖을 빨지도 못한다 온 가람 즈믄 뫼 비롯하는 백두산 그 하늘에 올라 마침내 바로 서지 못하고 젖배 곯아 젖니도 제때 나지 못할 내 운명이 새삼 두려워 백두산 흰 멧부리 우러르며 얼음빛 푸른 천지 앞에 숨결도 잊은 채 무릎 꿇는다

 

 

 

세한도 가는 길(10회) /유안진

 

서리 덮인 기러기 죽지로

믐밤을 떠돌던 방황도

오십령(五十領)고개부터는

추사체로 뻗친 길이다

천명(天命)이 일러주는 세한행 그 길이다

누구와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라신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

자욱자욱 붉게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눈 내리는 대숲가에서 (11회)/송 수 권

 

대들이 휘인다

휘이면서 소리한다

연사흘 밤낮 내리는 흰 눈발 속에서

우듬지들은 흰 눈을 털면서 소리하지만

아무도 알아듣는 이가 없다

어떤 대들은 맑은 가락을 地上에 그려내지만

아무도 알아듣는 이가 없다

눈뭉치들이 힘겹게 우듬지를 흘러내리는

대숲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삼베 옷 검은 두건을 들친 백제 젊은 修士들이 지나고

풋풋한 망아지떼 울음들이 찍혀 있다

연사흘 밤낮 내리는 흰 눈발 속에서

대숲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밤중 암수 무당들이 댓가지를 흔드는 붉은 쾌자자락들이 보이고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넘는

미친 불개들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

 

 

 

하늘의 그물 (12회)/정 호 승

 

하늘의 그물은 성글지만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다만 가을밤에 보름달 뜨면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기러기들만

하나 둘 떼지어 빠져나갑니다

 

 

 

등신불 (13회)/김 종철

 

등신불을 보았다.

살아서도 산 적 없고

죽어서도 죽은 적 없는 그를 만났다.

그가 없는 빈 몸에

오늘은 떠돌이가 들어와

평생을 살다간다.

 

 

'백학봉(白鶴峰).1' (14회)/김 지 하

 

멀리서 보는 白鶴峰

슬프고 두렵구나

가까이서 보면 영락없는

한 마리 흰 학,

봉우리 아래 치솟은

저 팔층 사리탑

고통과

고통의 결정체인

저 검은 돌탑이

왜 이토록 아리따운가

왜 이토록 소롯소롯한가

투쟁으로 병들고

병으로 여윈 지선(知詵)스님 얼굴이

오늘

웬일로

이리 아담한가

이리 소담한가

산문 밖 개울가에서

합장하고 헤어질 때

검은 물위에 언뜻 비친

흰 장삼 한자락이 펄럭.

아 이제야 알겠구나

흰 빛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을.

 

 

낙산사 가는 길 . 3 (15회)/유 경 환

 

세상에

큰 저울 있어

저 못에 담긴

고요

달 수 있을까

산 하나 담긴

무게

달 수 있을까

달 수 있는

하늘 저울

마음일 뿐.

 

 

 

돌아가는 길(16회)/문정희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 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세한도 (17회)/유자효

 

뼈가 시리다

넋도 벗어나지 못하는

고도의 위리안치

찾는 사람 없으니

고여 있고

흐르지 않는

절대 고독의 시간

원수 같은 사람 그립다

누굴 미워라도 해야 살겠다

무얼 찾아 냈는지

까마귀 한 쌍이 진종일 울어

금부도사 행차가 당도할지 모르겠다

삶은 어차피

한바탕 꿈이라고 치부해도

귓가에 스치는 금관조복의 쓸림 소리

아내의 보드라운 살결 내음새

아이들의 자지러진 울음 소리가

끝내 잊히지 않는 지독한 형벌

무슨 겨울이 눈도 없는가

내일 없는 적소에

무릎 꿇고 앉으니

아직도 버리지 못했구나

질긴 목숨의 끈

소나무는 추위에 더욱 푸르니

붓을 들어 허망한 꿈을 그린다

 

 

 너를 사랑한다(18회)/강은교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로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아득한 성자(19회)/조오현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마음 화상(20회)/김초혜

 

           그대가

그림 속의 불에

손을 데었다면

나는 금세

3도 화상을 입는다

마음의 마음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화상을 입는다

 

 

바이올린 켜는 여자(21회)/도 종환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살고 싶다

자꾸만 거창해지는 쪽으로

끌려가는 생을 때려 엎어

 

한손에 들 수 있는 작고 단출한 짐 꾸려

그 여자 얇은 아랫턱과 어깨 사이에

쏙 들어가는 악기가 되고 싶다

왼팔로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진

내 몸의 현들을 그녀가 천천히 긋고 가

노래 한 곡 될 수 있다면

내 나머지 생은 여기서 접고 싶다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연애하고 싶다

그녀의 활에 내 갈비뼈를 맡기고 싶다

내 나머지 생이

가슴 저미는 노래 한 곡으로 남을 수 있다면

내 생이 여기서 거덜 나도 좋겠다

바이올린 소리의 발밑에

동전바구니로 있어도 좋겠다

거기 던져 주고 간 몇 잎의 지폐를 들고

뜨끈한 국물이 안경알을 뿌옇게 가리는

포장마차에 들러 후후 불어

밤의 온기를 나누어 마신 뒤

팔짱을 끼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싶다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살 수 있다면

 

 

 

발견의 기끔(22회)/이동순

 

누더기처럼

함석과 판자를 다닥다닥 기운

낡은 창고 벽으로 그 씨앗은 날려 왔을 것이다

거기서 더 이상 떠나가지 못하고

창고 벽에 부딪쳐

그 억새와 바랭이와

엉겅퀴는 대충 그곳에 마음 정하고 싹을 틔웠을 것이다

사람도 정처 없이

이렇게 이룬 터전 많았으리라

다른 곳은 풀이 없는데

창고 틈새에만 유난히 더부룩 돋았다

말이란 놈들이 그늘 찾아

창고 옆으로 왔다가 그 풀을 보고

맛있게 뜯어먹고 갔다

새 풀을 발견한 기쁨 참지 못하고

연신 발굽을 차며

히히힝 소리 질러댔다

 

 

백제시 (23)-酒君*/문효치

 

가슴속에
매 한 마리 키우네

 

서늘한 기류 밖
푸른 별 하나 낚꿔챌

 

매 한 마리
숫돌에 부리를 갈아 날을 세우고
옹이를 찍어 발톱에 힘을 기르네

 

날마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별 하나 표적을 찾아

 

눈을 닦고 있는
매 한 마리 자라고 있네

 

*일본 황실에 매 사냥법을 가르쳐준 백제인.

 

 

옥상의 가을(24회)/이상국

 

옥상에 올라가

메밀 베갯속을 널었다

나의 잠들이 좋아라 하고

햇빛 속으로 달아난다

우리나라 붉은 메밀대궁에는

흙의 피가 묻어있다

지구도 흙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가을이 더 잘 보이고

나는 늘 높은 데가 좋다

에쨌든 세상의 모든 옥상은

아이들처럼 거미줄처럼 몰래

혼자서 놀기 좋은 곳이다

이런 걸 누가 알기나 하는지

어머니 같았으면 벌써 달밤에

깨를 터는 가을이다.

 

 

 

그리운 나무(25)/정희성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로 갈수 없어
애틋한 그 마음 가지로 벌어
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
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
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기라
아아,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
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

 

 

 

꽃 · 2 (26)/나태주

 

예뻐서가 아니다
잘나서가 아니다
많은 것을 가져서도 아니다
다만 너이기 때문에
네가 너이기 때문에
보고 싶은 것이고 사랑스런 것이고 안쓰러운 것이고
끝내 가슴에 못이 되어 박히는 것이다
이유는 없다
있다면 오직 한 가지
네가 너라는 사실!
네가 너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사랑스런 것이고 가득한 것이다
꽃이여, 오래 그렇게 있거라.

 

 

사랑 세 쪽(27)/이근배

말더듬이
말더듬이가 되고 싶어요
어머니
사랑 앞에서는
더더욱,

호박꽃
꿀을 따러 들어온
벌이 남기고 간
고 다디단 것
쪽!

대낮
꽁지가 붙은
잠자리 한 쌍
허공에 떠 있다

암컷 부르는
매미 울음 들끓는
대낮.

 

국  물(28)/신달자

메루치와 다시마와 무와 양파를 달인 국물로 국수를 만듭니다

바다의 쓰라린 소식과 들판의 뼈저린 대결이 서로 몸 섞으며

사람의 혀를 간질이는 맛을 내고 있습니다

 

바다는 흐르기만 해서 다리가 없고

들판은 뿌리로 버티다가 허리를 다치기도 하지만

피가 졸고 졸고 애가 잦아지고

서로 뒤틀거나 배배 꼬여 증오의 끝을 다 삭인 뒤에야

고요의 맛에 다가옵니다

 

내 남편이란 인간도 이 국수를 좋아하다가 죽었지요

바다가 되었다가 들판이 되었다가

들판이다가 바다이다가

다 속은 넓었지만 서로 포개지 못하고

포개지 못하는 절망으로 홀로 입술이 짓물러 눈감았지요

 

상징적으로 메루치와 양파를 섞어 우려낸 국물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바다만큼 들판만큼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몸을 우리고 마음을 끓여서 겨우 섞어진 국물을 마주보고 마시는

그는 내 생의 국물이고 나는 그의 국물이었습니다

 

시계(29)/김남조

   

그대의 나이 90이라고

시계가 말한다

알고 있어, 내가 대답한다

그대는 90살이 되었어

시계가 또 한 번 말한다

알고 있다니까,

내가 다시 대답한다

 

시계가 나에게 묻는다

그대의 소망은 무엇인가

내가 대답한다

내면에서 꽃피는 자아와

최선을 다하는 분발이라고

그러나 잠시 후

나의 대답을 수정한다

사랑과 재물과 오래 사는 일이라고

 

시계는 즐겁게 한판 웃었다

그럴 테지 그럴 테지

그대는 속물 중의 속물이니

그쯤이 정답일 테지……

시계는 쉬지 않고 저만치 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