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동성당(대전서부지구)
본당 설립:1998.2.2/주보성인:그리스도의 평화
+ 요한 복음.2,1-11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셨다.>
그때에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하고 말하였다.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둑에 물을 채워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다.
그들은 곧 그것을 날라 갔다.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물을 퍼 간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방장이 신랑을 불러 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된다.
<말씀의 향기>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혹시'기적을' -김영곤 안드레아 대산 주임
오늘 요한복음에서 보면,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열리는데 그곳에 예수님니도 제자들과 함께 초대를 받는다. 그때 마침 잔치집의 도우미들이 당황하며 허둥대는 모습을 보고 성모님은 즉시 위기를 감지한다. 그리고 조용희 예수님께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보아서는 성모님도 잔치집에 어떤 큰 책임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대인들의 잔치에 포도주는 중요한 품목 중 하나이다. 당시 분위기를 반증 할 수 있는 것은,랍비들은 잔치상에 포도주가 없으면 '기쁨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잔치집에 포도주는 그만큼 비주이 컸다. 그래서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신랑신분의 수치로 여길 정도였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여인이시여,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말을 하며 망설이고 있는 예수님 앞에서 성모님은 도우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갈릴래아 카나에서 첫 번째 기적을 행한다.
일반적으로 포도주는 맛 좋은 포도에 효모와 적당량의 다당을 섞어 발효시켜서 수년 혹은 수십 년간 숙성 과정을 거쳐야 맛 좋은 포도주가 탄생하게 된다. 즉 세월을 녹여 좋은 포도주를 만드는 것인데 예수님은 갈릴래아 카나에서 맹물로 좋은 포도주를 만드신 첫 번째 기적을 행한다. 그리하여 위기에 놓인 잔치집의 흥겨운 분위기는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물론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잔치가 망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흥겨움이 반감되는 것은 분명하다. 어떻게 하든 포도주는 있어야 했는데,성모님의 재치로 카나의 기적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해서 잔치집의 낭패는 신랑 신부도 모르는 사이 깨끗이 해결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갈릴래아 카나 혼인 잔치의 기적을 한번 살펴보았으면 한다. 카나 혼인 잔치의 기적은 소박한 가정의 잔치집에서 행한다. 즉 삶의 평범한 사건들 가운데서,또한 기적을 행한 이유는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져 신랑 신부를 수치와 어려움에서 구하기 위함이다.
갈릴래아 카나 혼인 잔치의 기적은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게 한다. 여기서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집은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을 생각하게 한다. 믿음은 기쁨을 향한 우리의 노력인데, 우리가 새로운 삶의 기쁨을 원한다면 예수님과 성모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 물이 포도주로 변한는 것과 같은 기적의 주인공이 된다는 확신을 갖고 살자.
대.가.대.협 대전지구 '오라토리오'를 소개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대.가.대.협 대전지구 '오라토리오'지구장을 맡고 있는 강찬신 스테파노입니다. 대전교구 오라토리오는 대전 가톨릭 대학교 협의회(대.가.대.협)소속으로 총 15개 대학의 가톨릭 학생회가 모여 활동하는 가톨릭 대학생들의 신앙 공동체입니다. '오라토리어(Oratorio)'는 기도를 위한 방 혹은 장소라는 뜻으로 단순한 대학교 내의 동아리가 아닌 가톨릭 학생회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현 대전지구는 담당 신부님 수녀님이신 김은석 요셉 신부님,김 아우구스티노 수녀님 그리고 지구장 강찬신 스테파노,부지구장 홍상철 가브리엘 그리고 총무 유소정 크리스티나로 이루어져 대전지구를 위해 봉사하고 있습니다.
대전 지구는 타 지구(공주.논산.세종.천안지구)중 가장 많은 가톨릭 학생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동부에는 대전대 우니따스,대전보건대 프란치스코,우송대 코이노니아,한남대 아니빔 4개의 대학교가,중부에는 중부대 라떼라노 1개의 대학교,남부에는 대전과학기술대 시나피스,목원대 피데스,배재대 체나 3개의 대학교,북부에는 대덕대 카리타스,충남대 비아,카이스트 시나래,한밭대 베리타스 4개의 대학교가 마지막으로 의과대학인 건양의대 룩스,을지의대 루하 2개의 대학교로 총 15개의 가톨릭 학생회로 이루어져,대학생으로서 신앙생활을 하고있습니다.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는 가톨릭 학생회들이 대부분이지만,이제 막 신설되고 재개된 가톨릭 학생회들 또한 있어 많은 관심과 기도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가톨릭 학생회이기 때문에 신앙을 바탕으로 기도모임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가톨릭학생회 담당 신부님,수녀님,그리고 선교사님들과 함께하는 미사,전례력에 맞추어 진행하는 여러 행사들(사순,부활,성탄,도보성지순례 등),친목도모행사 및 대.가.대.협 본부 연간 행사에 참여를 하며, 젊은이로서 대학생다운 신앙 생활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제 이 글을 읽으신 여러분들께 대학 생활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값지고 아름다운 것인지 같이 느끼고 전달해 드리고 싶습니다. 쉴 틈 없는 일상 속,그분을 잊어버리고 주일 미사에만 참여하는 대학생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 학생회를 통해 좋은 분 안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즐거움은 저에게 큰 활력소가 되었고, 하느님과 친구가 될 수 있는 소중한 기회 또한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하신 말씀처럼,저희는 하느님을 만났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며 신앙인으로서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함께 해요!
-강찬신 스테파노/대.가.대.협 대전지구 지구장-
<이충무의 행복나침반(93)>
'노쇼' 신자 말고 '예스쇼' 신자
행복예약,의무아닌 기쁨
관광,호텔,외식업 분야 등에서는 예약이 필수인 경우가 많습니다. 만족스러운 서비스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이런 점에서 '예약'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나 제공받는 사람 모두를 위해 참 편리한 제도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예약을 해 놓고도 예약 날짜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고객이 나타나지 않으면 얼마나 황당할까요? 영업상의 손실도 손실이지만,그런한 무책임한 행위 때문에 다른 고객들이 입게 될 피해는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관련업계에서는 이렇게 예약을 해 놓고 사전 통보 없이 약속을 파기하는 행위를 전문용어로'노쇼'(no-show)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무책임한 약속위반을 상습적으로 하는 고객들을 '노쇼족'이라고 분뷰하기도 하죠.
그런데 이 '노쇼'가 비단 관광이나 호텔,외식산업 분야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일주일에 한번 하느님이 마련해 주시는 마음의 양식을 예약한 우리도 종종'노쇼'신자가 될 때가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아무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다 지치실 리 없습니다. 우리가 그 자기를 채우지 않는다고 우리를 원망하실 리 또한 없습니다. 하지만 그 빈자리를 바라보시는 그 망음엔 얼마나 깊은 주름이 잡힐까요?
제가 주일 미사에 꼭 참석하는 건 최소한 '노쇼'신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일주일에 단 한번인 그 소중한 예약좌석마저 제 편의대로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하느님을 슬프게 할 일인지 상상이 되지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변함없이 우리를 위한 자리를 언제나 따뜻하게 데워 놓고 기다리십니다. 변하는 건 우리 자신입니다. 세례을 받으며 하느님의 행복식탁에 가기로 한 예약을 편의대로 취소하는 건 나약한 우리 자신일뿐입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그 약속이 어떤 약속인지 결코 잊지 않고,열심히 하느님의 부름에 '예'하고 달려가는 '예스쇼'(yes-show) 신자가 되기 위해 올한 해도 성당을 향한 기쁨의 발걸음을 재촉해 보렵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주님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행동을
거듭나게 하시어
이 땅을
참회하게 하소서
오늘이 내일로
되지 않게 하소서.
글.그림 이순군(베네딕도)
사랑과 수난 -마틴 슐레스케-
악기를 손봐 달라며 내 작업실에 오는 체리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는 그 표징이나 말투가 꼭 아이를 병원에 데려온 부모 같습니다.
사실 많은 연주자에게 이런 상황은 병원에 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며칠간 내 작업실에 악기를 맡기고 갈라치면 그들은 전신 마취에 동의하고 아이를 수술데에 눕힌 부모처럼 불안해하지요. 얼마 전에 한 첼리스트가 찾아왔습니다. 며칠 뒤에 중요한 솔로 연주를 해야 하는데 첼로의 A현이 완전히 막힌 소리가 난다며,이런 상태로는 솔로 연주를 할 수가 없다고 나감해했습니다. 음악가에게 악기는 거의 신체일부나 마찬가지입니다. 첼로의 음이 변한 상태를 설명할 때,그는 마치 자기 오른팔이 마비되거나 손가락이 아픈 것처럼 말합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악기는 그의 일부입니다. 음악가는 악기로 자신의 모든 것을 표현하니까요. 악기는 그의 목소리입니다.
첼리스트가 나의 작업실에 앉아 괴로운 표정으로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충격적인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계시의 순간이었다고 할까요?
나는 그 첼리스트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첼리스트의 모습에서,인간이 막힌 음을 낼 때 고통스러워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본 듯했습니다.
열린 음을 되찾고 싶어 하는 첼리스트의 심정에서,나는 인간이 제 음을 찾지 못하고 막혀 버렸을 때 못내 안타까워하는 하느님의 심정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악기입니다.
약간 과장하자면, 나는 바이올린 제작자로서 작업대에 내 목숨을 바칩니다.
그러나 이는 죽음에 목숨을 내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의 생명, 즉 나의 시간과 힘,내 생각과 감정,나의 수고와 창조성을 탄생하는 악기에 내줍니다.
악기의 울림을 위해 그렇게 합니다. 나는 나의 생명을 사랑으로 내줍니다.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수난을 봅니다. 수난은 고통과 사랑이 함께 녹아 있는 말입니다. 사랑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고통 없는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사랑하기에 고통스러운가요? 사랑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 마틴 슐레스케 "가문비 나무의 노래"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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