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일꾼 CATHOLIC WORKER

한 다리 건너면 다 가족이고 지인인데

모든 2 2022. 6. 25. 21:41

 

다리 건너면 다 가족이고 지인인데

류근

 

 

  아침에 들비 데리고 산책하러 나가는데 현관 문고리에 우유와 유산균 음료가 매달려 있습니다. 순간, 최근에 “요구르트 아줌마”가 된 지인이 생각났습니다. 중국에서 사업하다가 코로나 여파로 견디지 못하고 돌아와서 남편은 공사현장에 잡부로 나가고 부인은 우유라도 배달하자고 나선 것입니다. 요즘 중국에서 철수한 분들 가운데 이런 처지가 된 분들이 많다고 해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인수인계를 보통 3주 이상 받는다고 하는데 전임자가 단 3일 동행한 후 손을 놓는 바람에 천애고아 같은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배달처 숙지가 아예 안 된 것은 물론이고 배달 카트조차 손에 익지 않은 상황. 하필이면 처음 보급소장이 된 30대 직원이 함께 나섰지만 둘 다 초보이다 보니 시각장애인 둘이 길을 나선 것과 마찬가지였겠지요.

  둘이서 새벽 5시 30분에 일을 시작해서 저녁 5시까지 배달을 해도 겨우 마칠까 말까 했답니다. 여기저기서 항의전화도 쇄도했다지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보급소장과 눈이 마주쳤는데,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고 하는군요. 막막하고 외로운 순간에 서로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그 말을 듣는 제 눈시울도 시큰했습니다.

  저도 이 집으로 이사 와서 20여년 가까이 우유와 유산균 음료를 받아서 먹고 있습니다. 그동안 배달하시는 분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배달하시는 분은 늘 문 밖에 계시고 저는 늘 문 안에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 사이에 사람이 바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우유와 유산균 음료는 바뀌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다만 그동안 몇 번, 아침에 배달이 되어있지 않아서 짜증을 낸 적이 있습니다. 이 아주머니 너무 불성실한 거 아녀? 출근 시간 전엔 배달을 해야 마땅한 거 아녀? 확 끊어버릴까? 뭐 이랬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 지인이 그런 일을 한다고 하니까 생각이 막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배달 아주머니도 사람인데 어찌 사정이 생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계처럼 날마다 정확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그것 좀 늦게 먹는다고 생계에 지장이 생기거나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누구나 생각지도 못 했던 처지에 몰릴 수 있습니다. 세상을 갑과 을로 나눠서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반지성의 부끄러운 작태입니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자들이 비굴과 비겁의 역사를 저질렀습니다. 지옥의 변두리 같고 소돔성의 한복판 같은 세상은 배려와 감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오늘 아침 요구르트 배달해 주신 분들께, 식당에서 반찬 옮겨다 주시는 분들께, 항의전화 문의전화 받아주시는 분들께, 직업병 앓아가며 일하시는 분들께, 길에서 광고전단 나눠주시는 분들께... 배려와 감사의 마음을 가져봅시다. 한 다리 건너면 다 가족이고 측근이고 지인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