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일꾼 CATHOLIC WORKER

누구나 나만의 방이 필요하다

모든 2 2022. 6. 25. 20:27

 

누구나 나만의 방이 필요하다

최현숙

 

고통의 기록에 대한 답 없는 의심

 

가난에 대한 관찰이나 경로 찾기가 단지 구경이나 간접체험 정도로 멈추거나 심지어 '대변' 따위를 명분 삼아 생활비를 벌고 필명도 얻는 것이라면, 남의 가난을 팔아먹는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관음증이나 노출증 혹은 가학이나 피학 등 분열적이고 이율배반이고 뒤엉킨, 그래서 더 질겨 죽어서나 쓸모없어질, 힘줄과 신경줄이 자신 안에 있다.


“나는 왜 가난과 고난을, 고통을 듣고 관찰하고 쓰는가? 아니 그 전에 쓰고 싶은가?” 이 의심이 이른 아침 황 노인을 확인하러 가는 미경의 동력이고, 자살예고일 수도 있는 문자를 읽으면서 무의식중에 솟아올라온 심란함과 설렘의 이유다. 이번 경우는 심란해서 더 설렌다. 까놓고 말해 ‘남’의 심란함이다. 자신은 당하지 않고 잘 관찰하고 기록하면 된다.

물론 미경 자신에게 닥쳐오는 고통 역시, 당하는 김에 관찰하고 쓴다. 그 경우 당연히 설렘은 나중에 오고 심란함이 먼저 온다. 그럼에도 가장 독한 재미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다. 관찰 대상과의 밀착도가 높고, 더 독하게 노려볼 수 있어서다. 그래봤자 이쪽에도 “왜 쓰는가? 왜 쓰고 싶은가?”에 대한 적확한 답은 없다. 의심만 이어지고, 죽으면 의심도 끝이다.

늙음과 죽음에 관한 말 모으기

황문자 뿐 아니라 없이 사는 노인들은 죽음에 대한 생각과 말이 명확하고 간략하다. 그 단순명료함이 미경은 좋다. 많이 배웠다는 노인들이 늙음과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의 퇴거에 대해 논하는 담론과 철학에 대해 아무리 맛들여보려 해도, 미경은 흥미도 동의도 가지 않는다. ‘평온한 적요’니 ‘만년의 양식’이니 ‘비수의 한스러움’이니 ‘자기 권태와 자기 보상을 동시에 느끼는 풀 길 없는 아포리아’ 등은 미경의 언어가 아니다. 가난하고 못 배운 노인들의 말도 아니다.

늙어빠진 몸과 그 몸으로 살아가는 일상생활과 매일 매일 더 낡아져 죽음에 더 가까이 가는 구체적이고 피할 수 없는 상황들이 미경은 궁금하다. 가난하고 못 배운 노인들은 그 이야기를 아주 잘 할 줄 안다. 입에 붙어있고 넘쳐나, 노상 뇌까리고 질질 흘린다. 물론 그런 노인들의 생각이 배운 자들과 권력자들이 만든 지배담론과 고정관념들로 오염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노인들 자신의 말을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오염된 말들 속으로 들어가 헤매고 뒤적거리며, 그들의 말과 몸과 삶과 느낌과 생각을 찾아내고 싶다.

삶이든 죽음이든 죽음 처리든 툭하면 “존엄” 어쩌고를 붙여 값을 먹여 팔고, 돈으로 회칠하는 일들을 차갑게 구경한다. “존엄”의 뜻을 도무지 모르겠고 알려 하지 않는다. 존엄사 역시 마찬가지다. “자살”이나 “자유나 죽음”이라는 낱말이면 됐지, 스스로 죽음을 결단하고 실행하는 일에 구태여 “존엄”이라는 뻥치기 단어를 붙여 절차와 비용에 합리화까지 추가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순전히 개인적인 주거방식이자 욕망

아래는 페북이 알려주는 6년 전 오늘의 기록이다. 2020년 이후 홈리스 판에 있다 보니 ‘주거권’, ‘적정 주거’ 등이 나의 사회적 의제가 되었지만, ‘사회적’ 말고 순전히 개인적인 주거방식에 관한 글이다.

6년 후인 지금 내 원룸은 조금 더 작아졌다. 하지만 아래 글에서 언급한 “책상과 컴퓨터를 놓고, 생각하고 읽고 쓰고, 누워 자고 쉬고, 씻고 밥 해먹고 빨래 널며, 사람 하나 불러 섹스를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기에 족한 공간”임은 여전하고, 조금 좁아진 김에 조금 더 단출해졌다. 지난주 만난 일랑이가 “할머니 집에 가서 놀고 싶다.”고 말했고, 나는 “할머니 집은 글 쓰고 책 읽기를 위한 방이라서 일랑이가 와서 놀기에는 너무 좁아. 대신에 할머니가 일랑이네 집에 가서 같이 책도 보고 놀고 할게!”라고 말했다. 이 말을 일랑이가 충분히 이해하는 때가 언젠가 오려니 한다. 안 오면 말고.

사실 독거를 시작한 50대 중반 이후 내게 방/집은 “나만을 위한 공간”이다. 그 이전 어린 시절이나 독거 이전에도 늘 “혼자만의 방”을 원해 왔고, 그래서 50대 중반 이후의 독거와 원룸은 내게 최고의 선택이다. 일상을 해결하고 나를 살아가는 일에 필요한 최소한의 살림살이만 있는 공간이어서, 화분과 동물은 물론 그림이나 장식품들도 없다. “필요하면 바깥에 나가면 얼마든지 있는데 그걸 왜 내 공간에 들여 놓고 사느냐?”가 내 질문이다. 사실 넓은 집을 보면 우선 “대체 저 넓은 공간을 누가 청소하고 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게 사는 맛이라면 그건 그 사람의 선택이자 사는 이유일 테고, 그 청소와 공간에 성별과 계층과 비용 등을 따지면 그건 사회 문제여서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생각하고 읽고 쓰고, 누워 자고 쉬고, 씻고 밥 해먹고 빨래 널며, 사람 하나 불러 섹스를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 이외의 삶의 필요들은 방 바깥의 세상과 공간들과 사람들 속에서 충분히 하고 사는 느낌이다. 많은 사람들과 복작거리며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나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나, 그 이중성은 내게 잘 정리되어져 있다.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홈리스행동 생애사 기록팀, 후마니타스, 2021)의 주인공 한 분인 이석기가, 64세에 난생 처음 한뎃잠을 벗어나 양동 쪽방 한 칸을 얻고서는 “나는 이걸로 만족한다!”고 말한 대목이 내 안에 깊게 남아 있다. 그의 마음을 좀 알만하고, 그럼에도 방/집에 대한 그와 나의 내력은 많이 다르다. 그로서는 “마침내 얻은 방 한 칸”이라면, 그만큼 빈곤하지 않은 나는 “사는 방식으로서 선택한 방 한 칸”인 측면이 상당하다.

2016년 2월 16일. 화. 밤 11시.
오늘 대체로 눈

오랜만에 눈을 맞으며 걸었다. 오후 3시 전까지는 오락가락하는 눈발을 즐겼다. 30분이면 족할 것으로 예상했던 원룸 최종계약이, 집주인이 말한 것과 다른 대출 건으로 펑크가 났다. 4시로 약속되어 있던 여성 노인 인터뷰를 연기했다. 다른 원룸을 구하기 위해 4시부터 6시 30분까지 대흥동 인근을 헤맸다. 다리와 몸이 피곤하고, 마음도 좀 지쳐갔다. ‘예순 나이에 원룸 전세를 구하러 돌아다니는 독거 여성’이라는 팩트에 관한 타인의 시선. 찬바람과 눈발에 귀찮은 허기까지. 두 살 먹은 작은 아들을 업고 뙤약볕 아래 월세 단칸방을 얻으러 다니던 이십대 후반 시절도 기억났다. 피곤한 김에 “처량함”까지 장착하려는 나를 향해 ‘이러지 맙시다.’를 뇌까렸다.

그러다가, 그런 나의 외면과 내면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배시시 웃어졌다. 이것이 내가 이미 선택했고 계속 선택해 나가는 자유임을 다시 수긍했다. 자유란 편함이나 선택 항목의 많음이 아니라, 몸과 처지와 선택 항목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는 것이다.

‘하나 있기는 하다.’면서도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복덕방 영감을 앞세워, 계약하려던 것보다 조금 작지만 햇볕은 더 들어오는 원룸을 가계약했다. 게다가 내가 깊게 만나려는 독거노인들의 지역과도 조금 더 가까워졌다. “책상과 컴퓨터를 놓고, 생각하고 읽고 쓰고, 누워 자고 쉬고, 밥 해먹고 빨래 널며, 사람 하나 불러 섹스를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기에 족한 공간이다. 십대 말 이십대 초 극한 혼돈의 시절에 갈망하던 그 존재 방식에, 이렇게 도달했구나...

문제꺼리로서의 엄마가 없는 안도와 아쉬움

산 자 입장에서, 그게 누구든 누군가의 죽음이 길고 깊게 절망적일 수 있는가? 자신에게 큰 영향력을 주고 있는 사람의 갑작스런 죽음이라면 당분간 혼돈스러울 수 있겠다. 그 혼돈은 시간이 해결할 문제다. 하지만 대부분의 죽음은 사람 하나가 늙고 병들어 차차 죽어가다가 마침내 도착하는, 빼도 박도 못하게 정확하고 당연한 기대값이다. 멸을 향해 계속 가다가 마침내 멸에 도달하는, 모두가 기다리고 기대하는 결국이다.

때로 너무 힘들어 보여 “어서 가세요, 편히 가세요.”라는 마음과 말로 도착점을 향한 안간힘에 힘을 보태기도 한다. 마치 마라톤 결승선 근방의 풍경과 닮았다. 대부분의 죽음은 충분히 준비되고 예상되고 결국 이루어진 현상이다. 타인의 죽음에 대해 길고 깊게 절망 운운하는 것은, 물적 관계에 치우친 통념이나 관습적 감정이며, 과장이거나 거짓말이다.

엄마의 사망 3년 째 될 때까지 가끔 머리 한쪽 끝의 심란한 느낌과 함께 엄마가 떠올랐다가, “아차, 엄마는 이제 없지.” 하는 안도의 마음이 오면서 배시시 웃곤 했다. 심란한 느낌과 함께 엄마가 떠오른 이유는, 죽음 전 3년 정도 그녀가 자식들과 남편에게 중요한 문제꺼리였기 때문이다. 특히 치매가 진행되면서는 돌봄 내용과 방식을 자주 바꿔야했다. 수시로 대응하고 동원되며 자주 의논하고 결정해야 했고, 그럼에도 엄마는 늘 자식과 남편에게 억지를 부렸고, 때론 그녀의 감정과 변덕에 맞춰 기나긴 논의에서 나온 결정을 번복해야 했다. 죽음에 바짝 다가가면서는 그녀의 소멸 과정에 대해 시시각각 더 긴밀하게 논의하며 윤리적 고민 속에서 실행하고 책임져야 했다.

그 모든 과정은 구성원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들”이었다. 물론 내게는 공부꺼리이고 글의 소재이기도 해서 내 감정은 다른 구성원들과는 많이 달랐다. 나는 대체로 엄마로 인한 문제들이 반갑고 흥미로웠으며, 소멸과정에서도 내게 생애에 대한 관찰과 성찰의 기회를 주는 엄마에게 몰래 혼자 고마워했다. 물론 그 다름에 대해 다른 구성원들과 적당한 조정과 합의를 만들거나 적어도 가장해야 했다.

그러니 ‘문제꺼리’란 싫고 귀찮다는 의미가 아니라 수시로 동원되어 해결해야 할 불확실하고 부정기적이고 돌발적이며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존재로서의 죽어가는 엄마를 말한다. 이 집안의 경우 경제적 여건 덕에 감정적으로 훨씬 덜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가족, 노쇠, 죽음, 계급에 대한 각자의 태도에 따라 구성원 각자들 간에 다양한 차이는 있었다. 죽음이란 죽어가는 자에게도 종지부이고, 산 자들에게도 그 죽음이나 문제꺼리들과의 종지부이다.

엄마의 죽음으로 당시든 이후 지금까지든 내게 슬픔은 없다. 구태여 말하라면 엄마의 몸과 말을 더는 만날 수 없는 “아쉬움”은 있고, 그것은 문제꺼리로서의 엄마가 이제 없는 것으로 인한 “안도”의 이면이다. 한편 내 기억과 해석 속에서 그녀는 언제라도 내게 소환되어 나와 다시 만난다. 그녀의 삶과 죽음, 말과 행동, 웃음과 울음, 열정과 상처를 반복해 떠올리고 재해석하며 그녀가 내 안에서 작용하게 하는 것은, 그녀가 살았을 때든 죽고 나서든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녀는 죽었고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자기만의 방 By 이명주. 2014.2.17. 오른손-아크릴

 

2013년 출간된 나의 첫 구술생애사 작업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를 읽고 이영주님이 2014년 오늘 쓴 글이다.

이 글을 2022년에 다시 읽으며 엄마가 40대 중반에 썼던 일기가 떠올랐다. 숨 막히는 “아버지의 집”에서는 도저히 “자기만의 방”을 만들 수 없어 큰 딸인 나는 툭하면 가출하던 무렵 어느 날, 또 집 나가서 안 들어오는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을 혼자 일기장에 쓴 글이었다. “엄마는 이 일기를 그 집 어느 구석에서 썼을까?”가 일기장을 발견하고 내가 한 첫 질문이었다.

여든 살에 살림살이를 다 버리고 노인요양시설로 들어가면서도 엄마는 그 일기장을 챙겨갔던 거다. 그 일기장을 엄마의 장롱 속 깊은 곳에서 내가 찾아냈을 때, 엄마는 치매가 진행 중인 여든 중반의 노파였고, 나는 이제야 20대의 혼돈과 방황이 좀 해석이 되던 육십 근처 중늙은이 여편네였다.

일기에서 엄마는 내 가출을 걱정하면서도 일면 부러워했고. 자신과는 다른 큰딸의 생애를 예감하기도 했다. 자식 다섯에 늘 집과 집 근처에 있는 서방이랑 살면서, 경제적 가장의 책임은 짊어지고 권력은 여전히 가부장인 서방에게 준 채 미워하던 그 분열적인 상황을 살아낸 열정적이고 똑똑하고 그래서 더 미쳐버릴 것 같던 엄마에게, 얼마나 자기만의 방이 목말랐을지... 그 시절 아버지를 미워하느라 엄마를 미워할 새가 없었던 게 그녀와 나 사이에선 커다란 다행이다. 내가 책을 내기 시작하자 엄마는 “난 니가 작가가 될 줄 알았어!”라는 말을 하며 좋아했다. 첫 책의 주인공 세 명 가운데 하나가 엄마였다. 나의 재료가 되어준 엄마구나. 부자여서 안 끼어주려다가 끼어줬는데...

“너는 왜 그러고 사냐?”와 “나도 너처럼 살아봤으면 좋겠다!”가 큰딸에 대한 어미이자 한 선배여성의 분열적 긍지이자 체념한 욕망이었다. 1933년생 엄마와 1957년생 딸 모두 자기 시절과 위치를 치열하게 살았다. 결국 가부장제에 남아 드글드글 싸운 여자와 자신의 가부장들을 차례차례 깨고 나와 “자기만의 방”을 만끽하며 다른 가부장들과 싸우는 여자. 내 열정은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거다. 자기가 들입다 번 돈으로 일찌감치 가족 납골묘를 사놓고 뼛가루로 가장 먼저 들어앉은 엄마. “넌 이혼했으니 죽으면 여기로 들어오라.”는 엄마와 가족들의 배려 따위에 “최씨네고 안씨네고 문씨네고 모두 내 송장 인수를 포기하라.”며 “공영장례”와 뼛가루 훨훨 날려버리기를 미리 도모하는 딸.

 

향이 붉은 동백보다 훨씬 진해요

이성균은 목수 일을 40년 가까이 해온 남자고, 60대 후반인 지금도 가끔 일이 들어온다. 미경이 이 지역을 맡을 때 이미 등록되어있었다. 아직은 젊은 노인이지만 이미 허리 협착증이 심해 언제 목수 일이 끊길지 모른다. 일 할 수 없게 되면 기초수급을 신청하면 된다고 했더니, 아직 그 지경은 아니라며 얼굴이 굳어지기도 했다. 그도 엔간히 말 트기 어려운 남자였다.

그와 통화할 때면 휴대폰 저쪽에서 자주 새들이 재잘거렸고, 일이 없어 방안에 들어앉아 있는 날이다. 그런 날이면 새들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그의 안부를 물었다. 전화 불통이 이틀 이상 이어질 때면 일 못 나간 지 오래되어 전화 받을 기분이 아닌 날이다. 초기에는 방문하면 방안에서 인기척만 하곤 했고, 후원물품이라도 전하게 되면 부엌문을 여는 둥 마는 둥 한 채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얼른 문을 당겨 닫았다. 옥상 한 쪽에다 여러 개의 분재와 화초를 기르고 있다. 생일 선물로 내복을 전하러 간 날 미경은 옥상에 서서 혼자 머리를 굴렸다. 부엌문을 조금 밀고 얼굴을 보이는 그에게 얼른 분재 하나를 지목하며 이름을 물었다.

“백동백이에요. 남쪽에는 많은데 서울서는 흔치 않아요. 향이 붉은 동백보다 훨씬 진해요. 해남에서는 4월이면 꽃이 피는데, 여기서는 5월은 되어야 피더라고요.”

그는 부엌문을 열고 나와 백동백에 대해 길게 설명했다.

“저는 붉은 동백나무를 정확하게 구분하기 시작한 지도 얼마 안됐어요.”

미경이 웃자 그도 따라 웃었다.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다른 화분들에 대해서도 이름과 습성과 꽃의 색깔들에 대해 세세한 설명을 이었다. 독거노인 전수조사 때 옥상에 선 채 그가 간단히 답한 것들로는 그를 아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그날 얼굴과 말들을 통해 그를 좀 알 수 있었다. 그의 새를 보러 그의 방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건 훨씬 나중이다. 그날 이후 전화 불통은 훨씬 줄었고, 불통인 날은 나중에라도 그가 전화를 했다.

“전화 못 받았네요. 별일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