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일꾼 CATHOLIC WORKER

도로시 데이 영성센터 2022년 봄호

모든 2 2022. 6. 25. 20:13

 

눈물의 성모, 거룩한 갈망

한상봉

 

by Margaret Adams Parker

 

 

  "한 어머니가 죽은 이들을 안고 있었다. 그 아들은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여기서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는 작가 그 자신입니다. 독일의 판화가이자 조각가인 케테 콜비츠가 만든 이 작품의 이름은 피에타입니다."

 

  음악평론가 진회숙의 <베를린에서 만난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라는 유튜브 영상물을 보면, 처음에 한참동안 비를 맞고 있는 ‘피에타’ 조각상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장면을 설명하는 멘트가 이어집니다. 진회숙은 1990년대에 베를린을 여행하면서 훔볼트 대학 옆에 있는 노이에 바헤(Neue Wache)에서 처음 케테 콜비츠(Käthe Schmidt Kollwitz, 1867-1945)의 작품을 만났다고 고백합니다.

  노이에 바헤는 본래 독일제국 왕궁의 경비초소였는데, 동독 시절에는 파시즘의 희생자를 기리는 장소였다가 통일 후에는 전쟁과 폭력의 희생자를 기리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진회숙은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를 보고 온 몸에 전율이 흐르는 듯 했다고 전합니다. 아주 넓은 홀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조각상은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껴안고 있는 형상인데, “자식 잃은 어미의 동물적인 모성애를 마치 통곡처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회숙은 단박에 비발디가 작곡한 <눈물의 성모>(Stabat mater)를 떠올렸습니다. 여러 작곡가들이 눈물의 성모 또는 슬픔의 성모를 작곡했지만 대부분 웅장한 오케스트라를 동반합니다. 하지만 비발디의 곡은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고통이 어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절대적인 슬픔이라는 것을 암시하려는 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독창자 혼자 노래합니다. 사순절이면 늘 예수의 죽음에 관해 생각해 봅니다.

  십자가 처형은 위대한 현자의 억울한 죽음이든 실패한 혁명가의 죽음이든, 아니면 자비하신 하느님의 죽음이든 누군가의 죄를, 사회 주류세력이나 불공정한 사회구조의 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당한 권력이 살해한 ‘희생자’였습니다. 그래서 봄이 오면, 사순절이 시작되면 우리는 신앙 안에서 ‘희생자’들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그들의 고독한 죽음에 대해 탄식하게 됩니다. 지금도 우리 곁에서 알게 모르게 숨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통령선거를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진보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은 민주주의, 더 많은 형제애와 자비와 정의에 대한 갈망이 조롱받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국민들은 자기 수준에 맞는 대통령을 선택한다고 합니다. 나 자신의 욕망을 후보들에게 투사하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는 나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거룩한 갈망’에 따라 살았던 시절이 있습니다. 나를 접고 너의 손을 잡아주던 아름다운 기억이 지금도 내게 생생하게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진회숙이 케테 콜비츠를 만난 것처럼, 나는 최근에 우연한 기회로 진회숙을 만나 잠시 행복합니다. 그이가 ‘거룩한 갈망’을 다시 찾아줄지도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본래부터 음악을 전공한 진회숙은 <우리 기쁜 젊은 날>(삼인, 2018)에서 자신이 학생운동과 반독재 투쟁의 대열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고 고백합니다. 특별한 이념적 세례나 정치의식 없이 대학생활을 하다가 야학 출범식에서 특송을 하게 되면서, 그것이 인연이 되어 야학 교사가 되고, 야학에 수업을 들으러 온 또래의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비로소 사회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합니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헤르만 헤세와 루이제 린저, 로맹 롤랑과 T.S. 엘리엇같은 문학책만 읽던 진화숙은 야학교사들과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파울로 프레이리의 <피압박자를 위한 교육> 같은 책들을 읽으며 다른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극적으로 생각이 바뀌던 때를 진회숙은 이렇게 전합니다.

  “공부를 통해 나는 서서히 의식화되어 갔다. 어렴풋하게나마 내가 처한 현실이 어떤 것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갑자기 지혜의 샘물을 먹은 것처럼 내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삶의 다른 국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난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런 자책감과 동시에 그동안 내가 몸담았던 집단에 대한 깊은 회의가 밀려 왔다. 어떻게 세상에 대해 저렇게 무관심할 수 있지? 그들이 특권 의식이라는 최면 상태에 빠져 몽롱한 자족감을 즐기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역시 같은 젊은이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기득권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신념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 엄청난 간극에 나는 경악했다.”

  진회숙의 ‘회심’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사건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굳이 그리스도교적 언어를 말하자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능력이라는 ‘복음적 감수성’을 그녀가 이미 지니고 있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종이가 물에 닿으면 젖어드는 것처럼, 순결한 영혼은 아파하는 이들 곁에서 아프고, 기뻐하는 이들 곁에 기뻐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를 두고 ‘형제애’라 불렀습니다. 만인이 하느님 안에서 자매형제임을 깨닫는 것이 ‘회심’이며 ‘의식화’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들의 마음에 닿으려는 애쓰는 것이 ‘거룩한 갈망’이겠지요.

  사순절에 ‘피에타’의 침묵을 다시 생각합니다. 아들의 죽음 앞에 고요히 비를 맞고 있는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 말할 수 없는 슬픔을 홀로 견디고 있음을 알려주는 비발디의 ‘눈물의 성모’를 생각합니다. 이반 일리치는 <깨달음의 혁명>(사월의 책, 2018)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역설적인 침묵에 대해 말합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태어난 마리아의 아들은 그의 백성들 손에 죽었고, 그의 친구 손으로 버려졌으며, 그가 사랑하면서도 구원할 수 없었던 유다에게 배신당했습니다. 자신의 친구 한 명을 구원하는 데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 신의 육화, 그것이 보여주는 절정의 모순을 조용히 묵상해 봅니다.”

  희망 없음과 절망 속에서도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을 때, 문득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여주기 시작한다고 시몬 베유는 말합니다. 늘 사랑에 실패하더라도 다시 사랑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가련한 얼굴들 앞에서 고개를 돌리지 말라고 말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그 절망이라도 고스란히 안고 있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문득 부활절 아침이 저희에게도 오겠지요. 그리 믿어야 신앙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