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도 빛이신 당신을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오세정 신부(2013년, 공세리성지성당)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2)"
+ 루카복음 11,1-13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었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하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말씀의 향기>
하느님! 당황하셨어요? -아버지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 최상순 비오 황새바위성지 전담
요즘, 유행어 중에 하나가 "고객님! 당황하셨어요?"라는 말이랍니다. 보이스피싱을 소재로 한 개그인데,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대로 고객이 순순히 따라줘야 일이 되는데, 고객으로부터 뜻하지 않는 대답이 뛰어나올 때, 본인의 당황스러움을 오히려 고객에게 "당황하셨어요?"라고 말하면서 어물쩡 넘어가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냅니다. 당황스러운 사람은 정작 고객이 아닌 본인이고, 그 원인 역시 본인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도 거꾸로 상대방에게 당황했냐고 묻는 이 역설적인 상황이 참으로 재미있어 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위대한 신비를 믿고 거행하며, 또한 살아계신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가지의 많은 기도를 드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서 당혹스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마음 단단히 먹고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하였지만, 응답이 없거나 오히려 기도 내용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경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쉽게 낙담을 하게 되고, 기도의 맛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참으로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모든 기도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주님의 기도'를 손수 일러 주십니다. 그리고 나서 친구의 간청과 부자지간의 사랑을 예로 들면서,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르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루카 11,9)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말해 이렇게만 기도하면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기도는 분명, 내가 원하고 바라는 소원이 하늘에서 꼭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뜻으로 드리는 주술적인 주문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고 바라시는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말 그대로 가장 완전한 기도입니다. 그렇기에 기도 그 자체가 곧 내 삶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기도를 통해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닌,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기다리는 쪽은 기도드리는 내가 아닌, 오히려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이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답답하다면, 혹시 "하느님! 당황하셨어요?"라고 하면서 하느님을 더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어떨까요?
청소년 바로보기(35)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 그리고 교회의 소명 2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실 때, 예수님은 결코 기계적, 기능적으로 그 사람을 치유하시지 않았습니다. 병자의 눈을 들여다보는 순간 아마도 예수님의 마음에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사람의 깊은 한이 고스란히 전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깊은 마음과의 만남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예수님이 느끼셨던 이 측은한 마음이 그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 가장 큰 힘이었습니다. 죄인이기에 감히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수조차 없이 조용히 체념하고 가슴만 치며 살아가던 깊은 영혼의 상처와 한을 온 마음으로 끌어 안이 주시고,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님과의 만남은 존재의 변화를 일구어냈습니다. 존재의 변화는 다시 예전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는 온전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 참되고 완전한 스승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능력이나 자격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존재 자체"를 보고 다가가셨고, 마음과 마음의 만남을 통해 전재진 조건 없는 수용과 존중은 깊은 영혼의 치유를 가져왔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청소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원적인 대안을 예수님은 이미 2000년 전에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오늘의 세상 속에서 청소년들은 조건 없는 수용과 존중을 경험할 기회가 벼로 없습니다. 성적과 스펙이 아이들의 존재가치를 대변합니다. 학교에서, 학원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한 번 잘 돌아보십시오. '아이들이 문제다'라는 판단은 있지만 아이들이 왜 그럴 수 밖에 없는지, 그들이 무엇을 목말라하는지에 대한 성찰은 별로 없습니다. 그저 현실적인 대안과 문제의 해결만 논의할 뿐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 올바로 살아가기 위해 율법 규정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스스로도 그렇게 살았던 바리사이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아이들에게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고 따를 것을 요구합니다. '아이들을 위해서'말이지요. 그런데 그런 세상의 시선으로는 아이들의 영혼을 만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삶 안에서 이미 담겨 있는 아름다움과 작은 행복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조금은 지쳐있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생명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모법을 따라 마음으로 그들을 만남으로써 '존재자체가 수용되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존재의 수용' 경험은 자신을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자아 존중감의 뿌리가 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아이들은 당당한 "나"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교회는 참스승이신 그리스도의 모범과 진리를 간직하고 있기에 오늘의 청소년들에게 '기쁨과 희망'이 될 수 있고, 세상이 제시하지 못하는 '청소년 문제'에 대한 근원적 대안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만 합니다.
-오종진 신부. 복수동 주임-
미사 속 숨은 보화
감사 기도문의 요소 -성찬 제정과 축성
그리스도께서 최후 만찬 때에 제정하신 성찬은 그분의 말씀과 행동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빵을 들고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라고 하시고 잔을 들고 "이는 너희를 위하여 흘릴 내 피의 잔이다."라고 하심으로서,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몸과 피로 축성하시고 이 몸과 피를 봉헌하셨으며 사도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주시고 같은 신비를 길이 거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바치는 "성찬 제정문"은 그 자체로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축성"할 뿐 아니라 그분의 십자가상 제사를 성사적으로 재현하는 감사기도의 절정입니다. 성찬 제정문은 몸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게 합니다.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28) - 김두한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제3편-제1부-제1장-제7절 : 덕(德)
덕(德)은 선을 실천하고자 하는 몸에 밴 마음가짐입니다. 우리는 흔히 훌륭한 품성이나 바람직한 인격을 보고 '덕이 있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노력에 따라 덕을 기르고 이를 실천하여 고귀한 인품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유학에서는 덕을 갖춘 사람을 군자(君子)라 하고, 그를 존중하고 따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교에서, 덕은 자신의 인격적 완성에 있지 않습니다. 덕이란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지키는 것, 항상 하느님께 향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덕(인간적인 덕)이 있지만,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갖출 수 없는 덕(신적인 덕)이 있습니다. 이 신적인 덕은 우리들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행동하여 구원의 자격을 얻게 하고자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불어넣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인간적인 덕'은 현명, 정의, 용기, 절제입니다. 이 네 가지의 덕은 모든 덕의 '중추적'역할을 한다 하여 사추 덕(四樞德)이라고 부릅니다. 현명의 덕은 우리가 참된 것을 식별하고 그것을 실행할 바른 방법을 선택하게 합니다. 정의의 덕은 하느님께 마땅히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게 합니다. 용기의 덕은 어려움과 유혹 중에도 우리의 도리(道里)를 바르게 걷게 합니다. 절제의 덕은 우리의 능력과 재물과 시간 등을 바르게 사용하고 절도와 중용을 지키게 합니다. 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추덕을 꾸준하게 추구하도록 은총을 내려 주십니다.
다음으로 '신학적 덕'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입니다. 이 세 덕은 하느님을 향한 덕이기에 향주덕(向主德)이라 부릅니다. 향주덕의 근원과 동기와 대상은 '성삼위 하느님'입니다. 향주덕은 성령의 은총에 원천이 있고,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에 목적이 있으며, 그리스도를 본 닫는데 그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신덕)으로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거룩한 교회가 가르친 것을 모두 믿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께 우리 자신을 의탁하고 믿는 바를 실천합니다. 우리는 희망(망덕)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바라고 참 행복을 기대합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결코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보답하고자, 우리는 사랑(애덕)으로 하느님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다.(1 요한 4,19) 우리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갑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덕의 바탕이며 귀결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이슬과
한낮의 스치는 바람
그리고
저녁하늘의 향기
이 하루가 감사함을
온 마음 가득히
기도드립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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