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홍정수 신부(2013)
"너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
+ 루카복음 10,38-42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말씀의 향기>
단 한 사람이라도.. "생명을 사랑하게" - 강창원 마르티노 농민회 담당
오늘은 농민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일구려고 구슬땀을 흘리며 노력하는 농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농민회 담당 신부를 하면서 농민들과 대화를 많이 하게 되는데, 그들과의 대화는 너무나도 무거우면서도 어렵기만 합니다. 그 이유는 현재 우리 농촌의 어두운 현실 때문입니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이상 기온,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한 값싼 농산물의 수입, 농촌 인구 감소, 농촌인구의 고령화, 4대 강 사업으로 인한 여의도 면적의 31배 크기의 농지의 감소, 원자재 가격의 상승 대비 농산물의 가격인하로 인한 수입의 감소 등등으로 인해 한숨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농민분과의 대화에서 복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유기농을 고집하면서 농사를 짓는 분이신데, 제가 '농약을 치면서 편하게 농사지으시면 좋을 텐데'라는 질문에 '에이, 신부님! 모르시는 말씀이유,제가 농약을 안치고 농산물의 생산한 것을 단 한 사람의 소비자라도 먹고 좋다고 느끼면, 제가 나이가 들어 아니 이 세상에 없더라도 그 소비자는 그 농산물을 찾을 것이고, 찾는 사람이 있다면 누군가는 농사를 지을 것 아니겠소. 그러니 큰 걱정하지 않아요, '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검게 그을린 얼굴에 미소를 띠시고 되려 저를 위로하신 모습이 가슴깊이 새겨집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이신 사랑의 농부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단 한 사람을 통해서 온 인류를 구원하자는 복음의 빛을 밝혀 주셨습니다. 이렇듯 우리 농촌의 현실이 아프고 어렵더라도 '단 한 사람이라도' 당신께서 주신 생명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있다면,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분이라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농촌과 생명을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이' 되어주십시오.
그 단 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며, 그 단 한 사람이 하느님의 생명을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유일한 상속재산이며, 농민들에게 희마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농민 여러분!
사랑합니다. 힘내십시오.
청소년 바로보기(34)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 그리고 교회의 소명 1
오늘의 세상은 성과와 결과를 중시합니다. 성적이 말도 안 되게 떨어졌을 때, 아이들은 어떤 피드백을 받게 될까요?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집에서도 아들은 꾸지람을 들어야 합니다. '평소에 그렇게 놀기만 하니까 성적이 이 모양이지. 이렇게 해서 도대체 어느 대학에 가려고 그러니?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냐?'얼마나 안타까우셨으면 이렇게까지 혼내시겠습니까? 마음은 좀 아프지만 혼나고 나서라도 정산을 좀 차리기를 바라는 그 간절한 마음을 왜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혹시 그 처참한 성적표를 내미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6월 모의 수능이 끝나고 나면 교목실에 들르는 고3 녀석들이 꽤 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들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합니다. "신부니, 저 어떻게 하죠?" 이 짧은 말 안에 얼마나 많은 감정과 생각이 담겨 있는지 모릅니다. 순간 아이들의 복잡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며 아무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꼭 안아주며 등을 토닥여 줍니다. 그러면 그 커다란 사내 녀석들이 얼마나 서글프게 우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에게 형편없는 성적표는 자신의 꿈이 무너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동안 마음 졸이며 준비해 온 모든 노력들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확인하는 것이고,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지를 공적으로 확인받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자기가 꿈꾸는 학교에 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순간 아이들이 감당해야 할 좌절감은 아마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일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님도, 선생님도 이런 절박한 마음을 읽어주지 않습니다. 그저 그들의 잘못을 탓하며 나무랄 뿐입니다. 너무나도 쓰리고 아픈 자신의 감정을 전혀 읽어주지도, 이해해 주지도 못하고 오히려 야단을 치는 분들께 마음의 벽을 쌓아가는 것이 과연 아이들만의 잘못일까요? 이는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내 마음을 전혀 읽어주지 않은 채 쏟아지는 수많은 요구와 질책 속에서 우리 역시 지쳐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시선을 그렇게 '상처받은 나'를 바라봐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라사이들의 시선이지요. 그들의 시선은 사람을 향해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율법을 지켰느냐 아니냐 하는 것만을 보고, 기준을 채우지 못한 사람은 '죄인'으로 단정지을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을 심판할 수 있는 권하늘 지니신 예수님은 '죄인'이 아닌 '하느님께서 창조해 내신 소중한 사람'으로 , 당신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사람'으로 바라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 마음속의 깊은 한을 당신 마음으로 받아들이셨고, 온 마음을 다해 그들에게 다가가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바로 이 모범을 따르는 것, 이것이 오늘의 세상에서 바로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우리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고귀한 소명 아닐까요?
-오종진 신부. 복수동 주임-
미사 속 숨은 보화
감사 기도문의 요소-감사와 찬양
예수님께서 빵과 잔을 드시고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제사를 바치는 사제 역시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느님의 구원 업적, 특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면서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것이 감사기도의 본질적 요소가 됩니다.
감사는 기념과 떼어놓을 수 없는 긴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있기에 기념하게 되는 것이고, 기념을 통해 감사의 마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특히 감사기도의 전반부인 "대화", "감사송", "거룩하시다"등은 감사와 찬양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시작부분인 감사송과 끝부분인 마치 영광송은 감사기도문 전체를 하나의 장엄한 감사와 찬양의 기도가 되게 합니다.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27) -김두한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제3편-제1부-제1장-제2절 : 인간의 품위와 소명
지금까지 우리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제1편과 제2편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이 무엇이고, 파스카 신비에 어떻게 참여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품위'를 깨닫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이제 제3편으로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전반적으로 제3편의 제1부는 성령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합니다. 제1부는 인간의 존엄성과 소명(제1장), 그 소명을 이루고자 하는 인류 공동체(제2장), 그리고 이를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의 법과 은총(제3장)에 관한 교리를 담고 있습니다. 제2부는 십계명을 하느님의 사랑(제1장)과 이웃사랑(제2장)으로 나누어, 계명 하나하나 설명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되었습니다.(창세 1,26-27)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향하고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며 ' 참 행복에 초대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인간의 존엄성, 곧 우리의 품위는 근거합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에 우리는 진. 선. 미를 사랑하고 영혼과 지성과 의지를 지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능력에 힘입어 자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를 남용하여 유혹에 넘어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업적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새 삶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원죄 때문에 잃었던 고귀한 품위를 되찾은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품위에 맞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산상 설교(마태 5-7장)에서 찾을 수 있고, 그 설교의 '참행복'(마태 5,3-12)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궁극적인 목적을 담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행복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채워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은 도덕적으로 자유와 양심에 따라 사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령의 빛과 힘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갑니다. 이 모든 길은 예수님을 통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누구이신지 밝혀 주셨고,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소명을 지니고 있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전 생애를 통해 몸소 보여 주신 인간의 품위와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
그들이 손에
돌보아지는
곡식, 채소, 과일
우리에게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 > 2013년 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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