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38
이빨이 억세고 뭇짐승의 왕인 사자가
다른 짐승을 제압하듯이
궁벽한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자비와 고요와 동정과 해탈과 기쁨을
적당한 때에 따라 익히고
모든 세상을 저버림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의 일부다. 여기서 사자란 그저 용맹하기만 한 짐승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자란 불교에선 법신(法身), 곧 깨달음을 얻은 부처를 상징하고, 무소는 인도에서 상서로운 존재로 여겨 귀하게 다룬다. 살면서 그 삶 이상의 것을 꿈꾸는 사람은 ‘자비와 고요’를 모두 익혀서 행해야 하는데, 세상을 사랑하여 자신을 기꺼이 봉헌하는 자비를 베풀고 참된 진리를 얻기 위해 고요히 수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세상을 여의지도 않으면서 홀로 걸어갈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세상 한복판에 참여하면서, 그 세상에 또한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참 어려운 말이다. 그 난감함을 피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절간에 들어앉거나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일까, 생각한다. 아니면 성직자가 되어 항상 부족하다 느끼는 에너지나마 한 곳에 집중하려고 애쓰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만인을 사랑하기 위해서 한 사람을 사랑하기를 그친다”는 말이 나온 걸까?
우리가 생활 속에서 가장 많이 걸려 넘어지는 것이 ‘가족’의 문제이다. 평생 해로를 약속한 아내, 남편과 자녀들은 축복이면서 걸림이고, 보금자리이면서 감옥이 된다는 것일까? 문제는 ‘가족주의’일 것이다. 세상의 중심을 가족이라 부르고, 가족의 이익을 위해 가족 아닌 것을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치열한 경쟁사회 안에서 가족만이 변함없는 내 편이라는 안타까운 결론이 낳은 가족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예수님이 제안하신 것이 ‘새로운 가정’이다. 혈육을 넘어 마음으로 공감하고 뜻으로 연대하는 공동체를 통하여 내 사랑의 그물을 더욱 넓게 치라는 것이다. 확장되는 사랑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꿈이 여기서 지금 실현될 수 있는 까닭이다.
〈백학>(cranes)이란 노래가 있다. 감자토프라는 다게스탄 시인의 음유시에 러시아의 작곡자 프리엔껠이 곡을 붙인 것이다. 러시아와 적대관계로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는 체첸 전사들의 영광된 죽음을 찬미하는 내용으로 우리에게는 〈모래시계〉라는 방송 드라마의 주제곡으로 널리 알려졌다. 체첸에선 전사를 지기트(Jigit)라고 부르는 데, 고정된 신분이 아니라 용맹과 의리, 그리고 도덕성을 보인 카프카스인이면 누구나 지기트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산악 유목민족이었던 체첸 족은 험난한 자연과의 투쟁, 그리고 주변 이민족과의 전쟁을 치르며 생존해 왔기 때문에 무(武)를 숭상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백학〉은 자기 백성을 위해 전쟁터에 나간 병사들을 그리워하는 자의 슬픈 노래라는 것이다.
나는 가끔 생각하지
피로 물든 들녘에서 돌아오지 않는 병사들이
잠시 고향 땅에 누워 보지도 못하고
학으로 변해버렸다고.
그들은 옛적부터 지금까지 날아만 갔어, 그리고 우리를 불렀지.
왜, 우리는 자주 슬픔에 잠긴 채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잃어야 하는지.
날아가네 날아가네, 저 하늘의 지친 학의 무리들
저무는 하루의 안개 속을 무리지은 대오의 그 조그만 틈새,
그 자리가 혹 내 자리는 아닐는지.
그날이 오면 학들과 더불어
나는 회청색의 어스름 속을 끝없이 날아가리,
대지에 남겨둔 그대들의 이름을
천상 아래 새처럼 목놓아 부르면서.
돈벌이가 아니라 더 큰 일을 하라고, 나가서 세상을 구원하라면서 비좁은 방구석에서 자식을, 남편을, 아내를 놓아 줄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이미 고난을 예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다르게 말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한다. 그분은 그 고난과 슬픔이 마지막 말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부활 없이 그리스도교 신앙이 성립되지 않듯이, 가족에 대한 견해가 옳게 정리되지 않으면 복음과 세상 사이에서 긴장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저 밀리는 대로, 타성에 젖은 생활을 하다가 이승을 하직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훗날 우리를 낳으신 그분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하게 될까 더듬거리며 다시금 얼버무리지 않기 위하여 가족에게 ‘있을 때 잘 하고, 필요할 때 어깨에 손을 얹어 주는’ 지혜가 필요 하다.
가족이란 이 지상을 더불어 건너가자고 약속한 도반(道伴)이다. 길벗이 되는 가족은 서로 돕고 함께 걸어가되, 구속하지 않는다. 자녀들 조차 피로 맺은 길벗이며, 어른들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가장 확실한 협력자다. “너희가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까지 말하지 않던가.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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