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가고 싶다

덜 붐비고 더 평화로운

모든 2 2021. 2. 12. 17:22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37

 

책을 읽다가, 갑자기 내 딸 결이 생각을 하며 잠시 속으로 웃었다. 윌리엄 코퍼스웨이트가 쓴 <핸드 메이드 라이프>라는 책인데, ‘손으로 만드는 기쁨, 자연에서 누리는 평화’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이 책의 한쪽에선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가질 것을 권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과 나날을 아름다움보다 추함을 더 자주 마주보며 살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매일을 하루같이 ‘칙칙하고 허무 맹랑한 것, 천박하고 겉만 번지르르한 것’에 시달리며 산다는 것인데, 인천에서 지금 잠시 빌려 살고 있는 인천 집만 돌아봐도 금방 그게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이 연립주택에서 무슨 작업이라도 한답시고 창가에 책상을 두고 앉아 있으면, 아침녘부터 소음에 시달린다. 생선이며 청과물을 싣고 다니며 확성기를 틀어대는 사람들이 수시로 번갈아 품목을 바꿔가며 골목을 훑고 지나간다. 골목길 담벼락은 물론이고, 심지어 연립주택 3층 현관문까지 올라와서 턱하니 광고지를 붙여 놓는데, 밖에 나가 보면 사방에 알록달록한 전단이 깃발처럼 어지럽게 나부낀다. 여기저기에 내다 버린 쓰레기며 낡은 가구들이 흉물스럽다. 그럴 때면 문 닫아 걸고 향을 피우거나 음악을 틀어 소란한 주변을 깨끗이 날려 보내고 싶다. 거리에 나서면 상가의 현란한 불빛이 마구잡이로 시선을 끌고, 걷다 보면 사람이 발길에 걸려 넘어질 듯 위태롭다. 한마디로 도시엔 무엇인가가 지나치게 많다.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시도 때도 없이 들이대면 피곤한 법인데, 이곳엔 쓰레기도 많고 사람도 많고 소음도 많고 불빛도 너무 많다. 새로운 가구, 새로운 시설, 새로운 느낌. 그 새로움이란 것이 오히려 번거롭다. 그 새로운 물건 뒤에는 낡아서 또는 보기에 지루해서 버려진 물건들이 그득그득 쌓여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담양에 갔다가 오는 길에 매실을 사 온 적이 있었다. 광대정 산골생활이 떠올라 그 매실로 효소를 담갔는데, 문제는 발효시키고 난 매실 찌꺼기를 딱히 쓸 데가 없었다. 시골이라면 나무 밑이나 밭에 뿌리면 좋은 거름이 되겠지만, 여기 인천에선 그저 처분해야 할 음식물 쓰레기일 뿐이다. 장소에 따라서 귀한 게 추한 게 되는 셈이다. 할 수 없이 쓰레기봉투에 담아 플라스틱 수거통에 넣으려니 통 속에 온통 구더기가 들끓고 냄새가 고약했다. 저절로 ‘젠장!’ 소리가 튀어나왔다. 통 속으로 들어가는 매실이 나를 욕할 것 같았다. 매실이 아깝고 죄스럽다.

코퍼스웨이트는 말한다. “정서적, 신체적으로 건강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되도록 주변에 아름다운 것을 두고 살 필요가 있다.”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보다 함께 살거나 돌보기에 더 쉬운 법이고, 우리가 적게 가지면서, 의미 있는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만 조금씩 추스르고 산다면 우리의 집과 도시는 덜 붐비고 덜 추하며 더 평화로워질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보통 아름답다고 말하는 물건들이 대부분 광고를 통해 ‘시장에서 조작된 것’이며, 대부분 이런 것들은 높은 가격이 매겨져 팔린다. 그러나 이런 시장의 법칙이나 유행에 신경 쓰기보다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 자신의 남다른 감각을 갈고닦을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지금도 어느 한때 결이의 행태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데, 전북 무주 산골을 떠나 경주로 이사온 지 몇 달이 지났을 무렵이다. 첫 한 해 동안은 불국사 근처에 있는 아파트에 살았는데, 어느 날 ‘딩동’ 초인종 소리가 들려서 현관문을 열어 보니 여섯 살짜리 결이가 큼직한 개다리소반을 양손으로 들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아빠! 이거 쓸 만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며칠 전부터 아파트 주차장 풀섶에 버려져 있던 것이었다. 나도 그걸 보긴 보았는데, 영 쓸모가 없어서 지나친 참이었다. 멍하니 서 있다가 잠시잠깐 자지러지게 웃던 아내가 ‘그 애비에 그 딸’이라며 놀려댔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다 사연이 있다.

우리가 6년 넘게 시골의 마당 넓은 집에 살면서, 길을 가다가 가끔 쓸 만하다 싶은 물건이 버려져 있으면 내 화물차에 실어오곤 하였다. 특히 목재인 경우엔 창고에 넣든 땔감으로 불을 지피든 용도가 있게 마련이다. 이렇게 쌓아 놓으면 또 그게 필요한 이웃들이 청해서 다시 얻어가곤 하였다.

한번은 면사무소에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갔는데, 재활용품 모아 둔 곳에서 눈에 번쩍 뜨이는 물건이 있었다. 어느 농가에서 버렸을 재래식 찬장이었다. 아궁이에서 흘러나왔을 그을음이 새카맣게 배인 채 엎어져 있었는데, 그걸 냉큼 집어 와서 조금 손을 보고 닦아서 ‘스테인’이라고 불리는 목재용 도료를 바르니 고색창연한 맛이 그대로 살아났다. 내내 시골에서 자란 우리 딸 결이는 애비가 하던 짓 을 보고 “어디 쓸 만한 것 없나!” 기웃거리며 따라 하는 것이다.

경주에서 우리집을 다녀간 사람들은 집이 꼭 절간 같다고 말할 때가 있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 가구가 별로 없기 때문일 텐데, 무주에서 경주로 올 때 웬만한 짐은 다 처분했을뿐더러 작년에 5단 서랍장과 세탁기를 새로 들인 것 빼고는 대부분 십수 년 전 결혼할 때 그 살림 그대로다. 특히 어느 집이든 아파트 거실마다 정해진 세트마냥 놓여 있어야 할 소파도 텔레비전도 없이, 한쪽 벽엔 책 만 가득 꽂혀 있을 뿐이다. 그래서 휑한 거실이 낯설게 여겨지는 모양이다.

둘째, 몇 있는 가구들도 앞서 말한 재래식 찬장 같은 종류이고, 거실 한쪽에 향꽂이가 놓여 있는 꼴이 영 여염집 같지 않은 분위기를 낳는 모양이다. 우린 그게 좋으니, 어찌하랴! 제 멋에 겨워 제 멋대로 사는 것도 행복으로 가는 길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살림살이를 단촐하게 들이고, 달빛 자욱한 버드나무 아래서 연인이 준 신표(信標)처럼, 그렇게 귀하고 정이 가는 물건들이 집 주변을 감싸 안으면, 이 집에 사는 사람은 행복하고 생산적이고 배려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시장에서 드물게 값비싼 돈을 치르고 산 물건만이 아름다운 게 아니다. 아름다운 것은 정을 통하기 때문이다. 남들 눈에 박색도 연인의 눈에는 다만 아름다울 뿐이다. 그렇게 그의 행복은 온전하게 그의 몫이 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