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을 마중 나가는 종착역
한상봉
참 오랜동안 자발적 유폐(幽閉)의 시간을 살았다. 코로나 역병 때문만은 아니다. 자책과 성찰의 시간으로 지난 일 년을 보내면서,굽었던 등위로 싹이 터오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가만히 있기로 했다. 내 의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그분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일을 기다렸던 것일까? 아니면 너무 서둘러 시작한 일 때문에 빚어진 상처가 아물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삶이란 성장하는 때가 있으면 매듭을 짓는 때가 있는 법이다. 그 매듭을 옹글게 지어야 대숲을 울리는 나무들처럼 푸른 푯대를 세울 수 있으리라 믿었다. 파주로 이사 온 뒤로 나는 집밖으로 애써 나가려 하지 않았다. 솔직히 나가고 싶지 않았다.
이즈음에 말로가 부른 <푸른 휘파람>이란 노래를 우연히 접하게 된 것은 이 유폐를 풀라는 신호로 들린다. 이제 "굳었던 입술 위로 푸른 휘파람 소리"가 들리길 다시 희망한다. 그 휘파람 소리 다시 귓전에 울리고, 한 해 동안 계속되는 겨울에 못 다한 말들이 움처럼 돋아나고,그 겨울에 못 다한 사랑이 바람에 실려 오면,나는 사람들 곁에서 다시 노래할 수 있겠지. 생각했다. 그들과 함께 다시 길을 걷겠지. 생각했다. 말로는 우리가 꿈꾸지 않아도 봄은 온다고 했다. 우리가 부르지 않아도 봄은 온다고 했다. 이제 봄은 그분이 꿈꾸고 그분이 부르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런 봄을 혼자 맞이하게 되더라도 내 굳었던 입술 위로 푸른 휘파람 소리를 내며 홀로 노래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며칠 전에 고양 농수산물센터에 가는 길목에 걸린 현수막을 보았다. "만나지 않고,모이지 않고, 나가지 않고"라고 적혀 있었다. 코로나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조하는 문구였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한동안 나는 그렇게 살았다. 이 '자발적 유폐'를 이젠 조금씩 풀어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손세정제를 챙기고 마스크 단단히 쓰고서라도 사람들을 조심스럽게 만나러 가야 하겠다. 아직 "우리 만나자!"고 말 꺼내는 사람의 입술이 민망한 시절이다. 최근에는 국내 코로나 19 감염자가 급증했다고 걱정이 많은 모양이다.아무래도 코로나는 박멸할 수 있는 대상이라기보다 조심스럽게 동반하며 살아야 할 환경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이 코로나가 가면 저 코로나가 올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것은 스킨십(skinship)의 부재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현실이다. 정현종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 섬은 교회일 수도 있고, 카페의 어느 한 구석일 수도 있겠다. 거리에서,역전에서,공원에서,박물관에서,미술관에서,둘레길에서 독립운동하는 기분으로 은밀히 다정하게 그러나 말없이 만나도 좋겠다. 만남 자체가 죄가 되는 분위기,스킨십이 민망한 세계에서 우정은 발생하지 않는다. 만날 생각이 없으니 전화를 넣을 필요가 없고,SNS에만 집착하는 손가락은 불행하다. 페이스북에 '좋아요'를 허망하게 누르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 안타깝다. 그래서 황지우 시인처럼 그대가 내게로 오는 동안 나도 그대에게 가야하지 않을까,조심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by David Jones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제자와 인연을 맺는 독특한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세례자 요한이 제자 두 사람과 서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말했다. "보라,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이 제자들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 갔다. 그들은 예수님께 숙소를 물었는데,예수님은 "와서 보아라."하시고,그날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묵었다. 그중 한 사람이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고 요한복음서는 전한다. 그 후 안드레아가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소개하였다. 그날 안드레아가 '다음에..."라고 했다면 안드레아도 베드로도 예수님과 인연이 없었을 것이다. "다음에 언제 한 번 만나죠."라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빈말이다. 마음이 올라올 때 곧바로 행해야 한다. 그 사람이 생각날 때 당장 연락을 취해 약속을 잡아야 한다.
이어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하던 나타나엘에게 필립보가 한 말도 '와서 보라"는 거였다. 나타나엘을 만난 예수님이 그를 칭찬하자,나타나엘은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하고 묻고,예수님은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하고 대답했다.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보러오고,예수님이 그이를 이미 보았다는 데서 그들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루이제 린저는 소설 <미리암>에서, 미리암(마리아 막달레나)이 어려서 예수님을 처음 만난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 미리암이 자기 집 대문 앞에 서 있을 때 웬 소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맨발로 걸어가고 있었는데,그 발이 어찌나 가볍든지 땅바닥에서 먼지도 일지 않았다. 미리암은 그를 쳐다보았고, 그녀의 눈길을 느낀 소년은 미리암에게 집게손가락을 구부려 보였다. 오라!는 뜻이었다. 미리암은 그게 자신을 향해 던진 낚시바늘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평생 미리암은 그 낚시바늘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사랑할 수도 있었고 미워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그는 단지 거기 있을 뿐이었고,그는 다름 아닌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이 사랑은 샘물에 비교될 수 있었다. 어떤 한 순간 터져 나온 이 사랑은 끊임없이 땅속으로 흐르면서 나의 삶의 방향을 결정했다. 그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단단히 매인 끈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어떤 관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사모하든 버거워하든 그분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누가 그리스도인이 될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다. 그분을 만나지 않고서야 그분의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분의 옷깃을 만지지 못했다면,그분의 그림자라도 짚어야 한다. 그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없는 분이다. 그분은 추상적인 사람이 아니며,살(肉)이 되신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대림절이 시작되었다. 하느님은 이미 우리를 만나러 길을 떠나셨다. 그러니,우리도 그분이 도착할 역으로 마중을 가자. 그 역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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