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가고 싶다

그래야 사람이 깊어지겠다...그래야 사람이 착해지겠다

모든 2 2020. 10. 5. 21:23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19


대학이란 곳에서 강사 생활을 한 학기 보내고, 여름방학을 맞았다. 선생이란 직업이 방학이란 게 있어서 좋다고 하지만, 시간강사에겐 방학이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첫째는 강의가 없으니 월급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방학이란 더운 여름이거나 추운 겨울이라는 점이다. 여름과 겨울은 피서를 위해서든 난방을 위해서든 비용이 많이 나가는 계절인 셈인데, 수입과 지출이 엇박자인 셈이다. 공부하기 좋은 계절이 농사짓기 좋은 계절이고, 농사짓기 좋은 계절이 놀러 가기도 좋은 계절이 아닌가. 따라서 기왕에 생활이 바뀌었으면, 방학을 잘 보내는 방법을 학생들처럼 연구하고 배워야 한다.

얼마 전에 아이에게 자전거를 사 주었는데, 해거름이 되면, 아파트 건물 사이로 터놓은 주차장엔 아이들이 가득 찬다. 불국사가 그리 멀지 않은 저층 서민아파트. 놀이터에 앉아서 눈에 띄는 자전거만 세어 보아도 스무 대는 족히 넘어 보인다. 작고 큰 자전거들이 주차장의 빈터를 메우며 엇갈리며 달리고 있다. 자전거길이 잘 놓여 있는 경주라서 그런가, 이곳엔 참 자전거가 많다. 뒤늦게 주차장에 들어오는 차량들은 그래서 애를 먹고, 아이들은 아랑곳없이 공을 차고, 엄마들은 배드민턴채를 휘두르고, 특별히 이 아파트의 풍광인지 모르지만, 저녁이면 주차장이 어른과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신한다.

오늘 낮에는 아이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친구를 만들어 주려고 보내던 어린이집도 토요일이라서 쉬고, 더운 대낮에 집에 있어 봤자 짜증만 늘 게 뻔하다. 자동차로 30분쯤 가면 감포항이다. 동해 바닷길을 북쪽으로 더 따라 올라가 보기로 하였다. 감포에서 구룡포까지는 족히 30여 분이 걸리는데, 내내 바닷가를 달린다. 바다, 바다가 연이어 시야에 들어온다. 그런데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이 또렷하지 않고 흐릿하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분명히 보여 주지 않으려는 것 같다.

사진출처=pixabay.com

 

물빛이 파란 것은 하늘빛이 파랗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늘빛이 물에 반사되어 보이는 것이 물빛이라면, 물은 처음부터 자기 색깔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물은 너무나 투명해서 자신을 원하는 모든 것들의 색깔을 받아들이는 것일까 물처럼 바람처럼 살라더니,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려는 것일까. 나를 묶어 세우고 있는 것을 놓으라고, 그만 떠나보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온갖 상념에서 휘둘리다가 구룡포 해수욕장 기슭에 자동차를 세웠다.

한여름처럼 30도를 웃도는 한낮의 열기 때문인지, 아직 6월인데 해수욕장엔 사람들로 북적였다. 발을 담가 보니 물은 아직 차가운데, 아이들은 상관없이 고무튜브를 들고 물속으로 들어가 첨벙거렸다. 우리 결이처럼 모래성을 쌓는 아이도 있었고, 모래를 덮고 누운 청년도 있었다. 한 달쯤 전에 감포 바닷가에 갔을 때는 그렇게 신산스러웠던 바닷바람인데, 오늘은 오히려 처진 기운을 북돋아 줄듯이 시원한 걸 보니,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한 물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보니, 경주로 이사 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정말 여러 차례 바다를 접했다. 며칠 전에는 예술심리치료협회 광주지부에서 워크숍을 하였는데, 장소가 해남 땅끝이었다. 전라도 완도 가까이에 있는 이곳 역시 바닷가를 따라서 한참 돌아가야 닿는 곳이었다. 동해를 끼고 있는 경주에서 황해로 이어진 남해의 서쪽 끝자락 땅끝까지 달려가 깃발을 한 점 만들었다.

내 마음속 깊은 심연에서 건져 올린 깃발은 이러했다. 깊고 푸른 물결 위로 빽빽한 숲이 올라와 앉고, 그 위로 다시 파도가 기둥처럼 솟아오르는데, 그 파도의 방향은 한 점 태양으로 향하였지만, 그 뻗는 힘이 미약하다. 워크숍 참가자들은 이 깃발을 두고 이런저런 도움말과 느낌을 전해 주었다. 첫째, 너무 피곤해 보인다. 좀 쉬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단다. 둘째, 이미 준비된 에너지가 상당히 많은데, 쏟아 내지 못한 채 머뭇거리는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나는 생각한다. 내가 너무 한꺼번에 스스로 너무 큰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너무 빨리 분에 넘치게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예술심리치료’라는 마당에 뛰어들어 분주하게 사는 동안 오히려 ‘나’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심리(心理)만 남고 사람은 실종된다. 그래서 피곤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어지러운 것은 아닐까?

사실 나는 먼 바다를 좋아하는 편이다. 높은 고갯마루에서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바다는 우묵한 그릇에 담긴 물처럼 잔잔하고 고요하다. 거기에 해가 올라와 앉으면 그림같이 아름답다. 그러나 정작 바닷가에 내려가 보면, 바다는 쉴 새 없이, 정신없이, 숨가쁘게 퍼덕거린다. 한 무리의 파도가 밀려오고 나면 뒤이어 다른 파도가 떼지어 달려들고, 줄줄이 거품을 토해 낸다. 왜 그들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가, 묻고 싶다. 나는 지금 바다를 타박하고 있지만 사실 내 자신을 그대로 보는 게 두려운 까닭인지 모르겠다. 무수하게 들고나는 욕심이며 사나운 격정을 그 성가신 파도 때문에 들켜 버릴까 도망치는 것이다. 바다가 나 때문에 제 삶의 방식을 바꿀 필요도 없고, 바꾸지도 않을 것이다.

바다를 생각하는데, 〈봉우리〉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김민기가 작사 작곡하고 양희은이 불렀던 그 노래에도 ‘바다’가 나온다. 양희은이 부른 노래는 첫 소절이 들리기 전에 칠판에 또각또각 글씨를 새기는 듯 분필 소리가 들린다.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뜻일까

혼자였지
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었던 거야
너무 높이 올라온 것일까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일까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잊어버려!
일단 무조건 올라 보는 거야
봉우리에 올라가서 손을 흔드는 거야 고함을 치면서
지금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냐
저 위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늘어지게 한숨 잘 텐데 뭐
허나 친구야
내가 오른 봉우리는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거기 부러진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서 나는 봤지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작은 배들이 연기 뿜으며 가고……

노랫말에서는 봉우리를 오르다 힘이 들면 바다를 생각하라고 권한다. 왜 하필 바다인가 산을 오르는 자에게, 높은 곳을 향해 가는 자에게 왜 바다를 기억하라는 것이지.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 머물고 있는데 말이다. 바다는 낮은 곳에서도 충분히 평화롭기 때문일까. 작은 배들이 연기를 뿜으며 가는, 그런 바다는 더 이상을 무엇을 바라지 않은 것 같고, 넓고 평등한 수평선을 갖고 있고, 어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고래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봉우리를 올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봉우리는 처음부터 없는 곳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지금 딛고 있는 봉우리가 단지 고갯마루였다 해도, 그게 그 봉우리인지도 모른다고, 반드시 자꾸 위로 올라가야만 한다고 여기지 말자는 것 이겠지.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겠지. 바다가 가장 낮은 곳에서도 의미 있게 존재하듯이.

그 봉우리를 ‘혼자’ 오르고 있다는 말이 맨 첫 소절에 나온다. 그래, 혼자였지. 혼자라는 것은 외롭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혼자서 산에 오르는 일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걷고 싶을 때 걷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자유를 준다. 곁에 있는 사람 신경 쓰지 않고 제 마음이 시키는 대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이 주는 충만한 기쁨을 누려 본 자들은 알 것이다. 그것을 ‘고독한 자유’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문득 ‘외롭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바다처럼 낮은 곳에서도, 봉우리처럼 높은 곳에서도 혼자 남겨져 있고 싶다. 그러다 불쑥 자리를 털고 일어나 사람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고 싶다. 사람이 그리운 얼굴로, 충분히 고독한 표정으로. 그래야 사람이 깊어지겠다. 그래야 사람이 착해지겠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