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10
사진출처=pixabay.com
아기 감기가 여름내 낫지 않아서 마음고생을 좀 하고 있다. 기침은 그래도 조금 나은 셈인데 가래가 남아 가슴에 손을 대어보면 글글 가래 끓는 소리가 느껴진다. 요즘 같아선 아기만 건강하면 걱정이 없겠다는 심경이다. 그래서 배 속을 파서 꿀을 담아 삭혀 먹이기도 하고, 생강 달인 물에 꿀을 타서 먹이기도 하였다. 가래엔 도라지가 좋다는 소릴 듣고 통도라지를 구해서 먹이기도 하였고, 무즙을 주기도 하였다. 그 참에 금산에 있는 소아과 병원엘 몇 차례 다녀왔다. 오며 가며 보니, 이미 여름 볕은 기울고 가을빛이 선연하다.
그 따갑던 여름, 고추를 한 광주리 따서 들고 나무 그늘에 앉아서 피워 무는 담배 맛이 일품이었다. 겹겹이 뵈는 것은 산뿐이었다. 어쩌다 이런 산촌에까지 흘러 들어온 것일까, 생각했다. 귀농이니 입농이니 하지만, 내 ‘결단’으로 이뤄진 것 같지 않다. 어떤 흐름이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이다. 시인 기형도의 말대로 구름이 창(窓)의 것이 아니었듯이, 내 생애를 이끌고 가는 바람은 항상 예상 밖의 것들을 준비해 놓는다.
그래서 때론 엉뚱하다 싶은 방향으로 삶을 옮기게 하고, 또 다른 생을 뒤란에 잠복시킨다. 때가 되면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때가 되면 내 영혼과 육신이 열망하는 대로 따라가면 그뿐이다. 나무 그늘에 앉으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고나는데, 이윽고 자 리를 털고 일어서면 그 생각들은 먼지처럼 흩어져 버리고, 기다리고 있는 일상 안으로 나는 다시 진입한다.
자동차를 타고 언덕배기를 오르다 보면, 아낙네들을 잔뜩 태운 경운기를 만나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힘겹게 페달을 밟는 노인네들과 마주치기도 한다. 노인들의 얼굴은 대부분 흙빛이다. 약주를 한 잔 걸치면 더욱 검어지는 사람들이다. 사람이란 흙에서 나서 흙으로 가게 마련이라는 진리를 온몸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 같다. 흙집 구들 위에서 태어나 평생 흙을 밟고 일구고 매만지며 살다가 결국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이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기우는 세상의 그늘을 대신하는 것 같다.
무주 진도리 오동마을 어귀에선 그늘에 앉아 말린 고추를 다듬고 있는 할머니들이 두서넛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봄이면 광대정 골짜기에서 항시 마주치는 얼굴들이다. 부쳐 먹을 논 한 마지기 없어서 봄이면 나물이며 약초를 캐러 다니는데, 소일거리도 되고 용돈도 마련한다. 배추를 심을 적에는 가장 흔한 일꾼들이며, 마찬가지로 얼굴은 발효퇴비보다 더 검게 그을려 있다.
이들처럼 살라 하면 자신이 없다. 가끔 장에 나갈 때 차를 태워 드릴라치면 한사코 화물칸에 올라 타시는 할머니들이 안쓰러운 만큼 그게 시골살림이라면 마음이 울적하다. 그들의 그늘에 숙연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 분들이 들어갈 천당이 없다는 것은 믿을 수 없어진다. 그이들이 살면서 무슨 죄를 지었다 해도 그네들에겐 단연코 천당복락이 주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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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희가 쓴 <혼불> 아홉 번째 권은 ‘종이꽃 그늘’이란 제목으로 시작하고 있다. 인공적이라 해도, 상업적인 이유에서라도 빛이 난무하는 시절에 ‘그늘’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시류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늘을 논하지 않는, 그늘을 통과하지 않고 말해지는 ‘빛’이 란 참 허망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생각은 ‘달’에 대한 이미지가 도리어 소중하게 여겨지는 상념과 맞닿아 있다.
다산 정약용은 <득월당기>(得月堂記)에서 “무릇 천하 만물의 아름다움을 모두 따져 보아도 하늘에 있는 물건의 아름다움만은 못하다. 그러나 해는 너무 뜨겁고, 별은 너무 희미하며 구름과 안개는 너무 쉽게 없어지니, 마음을 기쁘게 하는 점에서는 모두가 달만 못하다.”고 하였다. 그 글 앞뒤 어디를 살펴보아도 다산이 왜 달을 유독 높이 평가했는지 헤아릴만한 구절이 없지만, 내 나름대로 생각건대, 달에는 그늘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해 자체에 그늘이 있을 리 없고, 별은 달과 마찬가지로 밤에 뜨지만 빛나는 구석이 있을 뿐 스스로 어둔 구석은 엿보이지 않는다. 달은 밝지만, 밝음만이 아니라서 보는 이의 마음을 은연중에 움직이는 힘이 있는 것 같다. 해는 이집트의 파라오가 그렇듯이 지배권력의 힘을 떠올리게 하고, 달은 한많은 이들이 야밤이나 새벽에 바라보며 치성을 드리듯 무력한 이들의 종교적 심성을 건드려 왔다. 해가 일사불란한 전체주의나 군국주의를 상징한다면, 달은 수심이 뒤엉켜 있지만 여전히 밝은 어떤 내면의 힘을 느끼게 한다.
<혼불>에서 그늘을 이야기하는 장면 역시 사뭇 종교적이라서 인상이 깊다. 강호가 산속 깊은 호성암을 찾아가니 때는 초파일을 며칠 앞두고 있었다. 도환 스님은 마침 연등행사에 쓰일 종이꽃을 만들고 있었다. 연등이 공중에 걸리면 고대광실 치솟은 대갓집의 처마 끝에 매달린 소원부터, 시궁창 속에서 가슴이 벌어지는 나무토막의 진액이 토해 내는 소원에 이르기까지, 사바 예토의 진흙밭에 연꽃같이 피는 소원의 등불들을 부처님은 일일이 다 살피실 것이었다. 솜씨 좋기로 유명한 도환 스님은 그 종이꽃을 지극정성으로 만들곤 했다.
"꽃이라면 계절 따라 산천에서 저절로 피었다 지는 것이 으뜸이련만, 종이로 만든 지화(紙花)에는 생화로도 못 당할 인간의 지극함이 깃들어 있어, 불당에서는 부처님께 온 마음의 향기를 바치는 정성이 되고, 굿당에서는 원혼의 넋을 달래며 신(神)을 울리는 해원(解寃)이 된다. 그리고 인간사의 큰일인 혼인 때는 초례청에 잔치꽃으로 쓰이고, 죽으면 상여에 색색깔로 물들인 종이꽃을 덮어서 마지막 가는 길의 서러움을 휘황하게 치장하였다. 그리고 이 꽃보다 더 고운 내세를 받으라고 빌어 주었으니, 사람의 심정을 담은 것으로 이만한 지물(持物(이 다시 있을까."(최명희, <혼불> 9권)
도환 스님은 암자 뒷마당 그늘진 곳에서 놋대야 만한 단지 뚜껑에다 연분홍 물감을 풀어놓고, 한 장 한 장 백지를 담가 흔들며 물을 들이고 있었다. 물론 종이꽃을 만들 요량에서였다. 이 종이는 그늘에서 말려야 색이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관목(棺木)도 그렇고 거문고를 만들 오동나무도 그렇고, 집 지을 서까래 기둥목도 그렇고 이런 종이 한 장까지도 뒤틀리거나 변하지 않아야 할 것들은 그늘에서 말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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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에도 또랑또랑한 목소리보다야 소리에 그늘이 있어야 심금을 울리는 깊은 맛이 우러난다고 하였다. 이런 그늘 예찬은 대체로 중심에서 비껴나 있는 중생들이나 하는 것일 텐데, 실상 이런 그늘에서야 쓸모 있는 것들이 나온다는 사실은 그만그만한 목숨 줄을 쥐고 사는 이들에겐 그나마 소망스러운 것이다. 그늘에 말린 종이라야 제대로 종이꽃을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세상에 복을 가져다주는 등불을 켤 수 있는 것이라면 결국 그늘은 구원의 통로가 되는 셈이다. 박남준이란 시인이 이런 시를 쓴 적이 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져가는 것
그는 모르는지
길 끝까지 간다
가는데 갔는데
기다려본 사람만이 그 그리움을 안다
무너져내려 본 사람만이 이 절망을 안다
저문 외길에서 사내는 운다
소주도 없이 잊혀진 사내가 운다
(박남준, 저문 외길에서)
나는 어떤 그리움과 절망을 알고 있는 것일까. 간절히 기다릴 무엇을 가져본 적이 있던가, 아님 숨소리마저 내기 힘들 정도로 무너져 내려 본 경험이 있던가. 간절함이 없었다면 절망도 없을 텐데, 내가 그런 대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내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탓이 아닐까. 간절한 염(念)이 없는 목숨은 이미 목숨이 아니라 믿는 까닭이다.
신앙은 전폭적이요 전인적인 투신을 요구한다는데, 나는 내 신앙을 점검해 봐야 하는 게 아닌가. 대충 어디쯤에서 둥지를 트는 게 아니라, 길 끝까지 가야 하는 게 아닌가. 그 길 끝에서 기다림만큼의 절망을 얻고 아파하고 눈물 흘려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야 더는 절망할 이유가 없어지는 게 아닌가. 항상 주춤거리는 생애는 고달프기만 하고 쟁쟁한 진리와는 상관이 없다.
그 사람, 박남준은 나무를 태우며 생애가 주는 쓸쓸했을 외로움마저 오히려 따듯하게 감싸 안을 줄 알았다. 「한 나무가 있었네」라는 시편 이다.
"쉬지 않고 계율처럼 깨어나 흐르는 물소리와 저 아래로부터 일어나 온 산을 감싼 구름으로 두어 발 한세상이 자욱해질 무렵 죽어 쓰러진 나뭇등걸 모아 불 지핀다. 맵다. 상처처럼 일어나는 연기. 산중 나무 한 그루 태어나 숨 거두기까지 한 생각 그랬겠다 쓸쓸했을 지난날의 외로움이 울먹 울먹 피어나서 이렇게 눈물 나게 하는 것인지. 타오르며 전해오는 푸른 나무의 옛날. 불꽃, 참 따뜻한 그리움"
곳곳에서 자신의 전생(前生)을 읽어내는 사람은 복되다. 나의 생애 속에서 다른 이들의 생애를 읽어내고, 다른 이들의 생애 속에서 나의 생애를 발견하는 능력이 애쓴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도, 피부호흡을 하듯이 우리 몸의 창문 하나를 세심하게 열어두면, 저들이 알아서 소통하지 않을까. 내가 나를 놓으면, 이천년 전 예수의 몸과 내 몸이 서로 소통하고, 새벽이면 어김없이 논둑길 밟아 나가는 아랫마을 노인장의 흙빛 얼굴과 내 얼굴이 소통하고, 우리 아기와 내 눈빛이 서로 소통하지 않을까.
그늘이 많은 만큼 윤곽이 선명해지고, 삶이 고단한 만큼 진하고 무겁게 와 닿으며, 말이 없을수록 몸이 먼저 일어나서 서로에게로 걸어 들어가지 않을까. 내 영혼의 파장이 가장 적절한 골짜기를 스스로 찾아들지 않을까. 내 열망이 깊은 곳에 그 열망을 함께 나누려는 영혼이 찾아들지 않을까.
그 간절함과 그리움의 넋 뒤로 숨어 들어올 자가 궁금하다. 그러면 이제 우리 영혼의 그늘도 참 따뜻해지지 않을까.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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