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36
올해는 논농사를 짓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이웃들이 서둘러 못자리를 하는 걸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새로 시작한 예술심리치료 공부에 시간을 더 내려고 마음먹은 것인데, 그래도 우리 먹을 쌀은 거두어야 한다는 명분에 마음이 흔들렸다. 실은 농협 하나로 마트에서 20킬로그램짜리 쌀을 살 때마다 들었던 자괴감을 피하기 위해서, 비록 예년보다 반으로 줄이긴 하였지만 논농사를 짓기로 했다. 그러나 농사 규모가 크든 적든 매년 겪는 걱정이 똑같이 반복되었다. 이른 봄엔 비도 많이 오더니, 막상 모내기철이 다가오자 3주째 비가 내리지 않는다. 계곡물도 가늘어졌고, 이리저리 호스를 대서 물을 받으면서 마음이 답답해졌다.
어찌 되었든 물을 제대로 가두려면 논둑을 발라야 한다. 논가에 고랑을 내고 먼저 그리로 물을 끌어들여 젖은 흙을 둑에 바르다가 앉아서 땀을 씻었다. 호스에서 흘러나오는 맑고 시원한 계곡물이 그나마 고맙다. 습관처럼 담배를 물어 피우는데 웬 천둥소리. 빗방울이 두어 방울 떨어진다. 우리 윗논을 짓는 이웃 남자가 김추자의 ‘봄비’를 불렀다. 그도 단비가 고마웠던 모양이다. 정말 ‘나를 울려주는 봄비’다.
사람의 마음이 이리도 간사한가? 아침부터 무거운 얼굴을 펴지 못하던 사람이 잠깐 동안에 즐거운 빛이 가득하다. 비가 많이 온 것은 아니었지만, 다음날 아침에 나가 보니 윗다랑이에 물이 가득 고이고, 이번엔 호스를 아랫다랑이로 끌어들이고 그곳 논둑을 발랐다. 오늘 밤에 비가 많이 온다는 전갈이 왔다. 김제 사는 친구는 호박고구마 모종을 들고 오후에 집에 들렀다. 그 참에 함께 고구마도 밭에 심었다. 꼬였던 일이 한꺼번에 풀리려나 보다. 내일 논을 갈고, 모레는 광주 가는 길에 장성에 들러 우렁이를 사오고, 다음날 모내기를 하고, 우렁이를 논에 풀어놓으면 올봄 농사는 대충 마무리된다.
사람의 생각이 작고 큰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걸 보니 나는 여전히 속물인가?, 아니면 의당 사람의 마음이 다 그런 것이라 여기고 안심해도 좋을 것인가?
사진출처=pixabay.com
여기서 결이를 둘러싼 이야기를 할까 한다. 막 두 돌이 지나고 나서부터 결이가 내 것, 내 것 하면서 다섯 달 늦게 태어난 아랫집 영현이를 밀고 당기고 하여 부모의 속을 태우기 시작했다. 들고 있던 장난감으로 영현이 머리를 때리기도 하고, 남의 집에 가면 으레 장난감을 한 개쯤 빌려오곤 했다. 그 절정은 ‘남의 것은 내 것이고, 내 것은 진짜 내 것’이라는 말투였다.
아내는 아랫집 윤희씨에게 연상 미안해했고, 결이에겐 화가 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엇갈리는 감정이 나왔다. 날이 밝으면 일 삼아 그 집에 놀러 가던 아이를 무조건 막을 수도 없었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 결이의 태도가 제법 수굿해지고 여자 애다운 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디에 가노라면 영현이도 같이 가자고 하고, 소꿉놀이하자며 영현이 손을 잡고 와서 마당 모래무지에서 놀기도 했다. 고집스런 면이 많이 남아 있으면서도 예민하고 자존심 강한 아이로 자리잡는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현이가 고집스럽게 자기 주장을 하면서 제 맘대로 안 되면 소릴 지르거나, 결이 장난감을 빼앗곤 했다. 사내아이라 그런지 제법 힘도 세졌고, 가끔 결이가 울면서 집에 왔다. 어느날은 팔뚝이나 볼을 물린 채 울면서 엄마를 찾았다.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결이가 아랫집에 가는 게 염려되고, 일찌감치 다른 집에 아이를 데리고 놀러 가거나, 아예 못 가게 막기도 해보았다.
‘조금 미안하더라도 맞고 오는 아이보다 때리고 오는 아이가 낫다’는 이야기가 퍼뜩 떠올랐다. 이기적인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올라오는 감정을 보면서, 영현이가 밀리고 맞으면서 지내던 시절에 그 집 엄마 심정이 어땠을까 짐작이 간다. 그래도 그때 아내는 결이를 야단치고 어쩌고 했는데, 이번엔 영현이 엄마가 아이를 제대로 야단치지 않는 것 같아서 화가 나기도 하는 걸 보면, 부모란 아이 앞에선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 되기 쉽다는 것, 그리고 아이들을 통해서 부모가 많이 배운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들이야 어찌 생각하든지, 아이들은 다투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한다. 하루에 한 번은 반드시 누군가 울곤 하는데, 그래도 결이는 영현이네 집으로 간다. 엄마가 늦게 일어나는 날이면, 어느 틈엔가 혼자 아랫집에 내려가 놀고 있는 결이를 본다. 요즘 같아선 투닥거리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하는 연인 같아 보인다. 아이들은 상처 속에서도, 상처 너머로 서로를 부른다. 그리고 행복해진다. 변덕스런 부모보다야 아이들의 세계가 더욱 믿음이 갈 때가 많으니 조물주의 창조하시는 조화(造化)가 이런 것인가.
오늘 밤 빗속을 헤치고 오랜 벗들이 찾아왔다. 우리 결이보다 더 어렸을 때 처음 만났던 그 집 딸이 중학생이 되어 함께 왔는데 <신라왕조실록>이란 두툼한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읽는다. ‘든든하고 다정한’ 벗들의 표정을 그 아이에게서 읽는다. 우리 결이도 그렇게 예쁘고 의젓하게 자랄 수 있을까? 부모가 든든하고 다정해야 아이도 큰 나무처럼 성성하게 클 수 있을 것이다. 바람에 다소 변덕스럽게 잎사귀를 뒤집거나 가지를 흔들더라도 흙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같이 바탕이 굳건한 사람이 되어야겠지 생각한다. 은총처럼 비가 내리거나 저주처럼 봄가뭄이 계속되더라도 ‘그냥 말없이’ 콩을 심고 고구마 줄기를 땅에 묻는 농부의 마음을 배워야 할 텐데.
순간에도 영원을 잊지 않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가뭄에 비 올 때를 생각하고, 씨 뿌릴 때 추수할 때를 생각하고, 뙤약볕 속에서 눈 덮인 겨울밤을 생각하고, 다툴 때 평화로운 그이의 웃음을 기억하고, 무언가 나눌 때 받은 사랑을 잊지 않고, 상처받을 때 내가 상처 준 사람을 떠올리며 산다는 것은 어렵지만 소망스런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보는 오늘은 참 기쁜 날이다.
오늘 낮엔 비 소식에 다들 분주하였는데, 아랫집 길수는 고추밭에 덮으려고 모아놓았던 낙엽을 옮기려 하고, 영미씨도 콩밭에 덮을 볏짚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왠지 마음이 일어 경운기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길수네 낙엽과 영미씨네 볏짚을 밭으로 날라주었다. 길수가 웃으며 ‘대민봉사 활동’이라고 이름붙였는데, 농번기에 남의 일을 자발적으로 거든다는 것은 내 사전에 없던 행사였다. 기다리던 비 소식에 마음이 편안해져서 예정에 없던 ‘착한 일’을 한 셈인데, 어찌 되었든 기분 좋은 하루다.
사진출처=pixabay.com
밤늦게 손님들과 술을 한잔하고, 결이는 초저녁잠을 한껏 자고 일어나 저 좋아하는 수박을 정신없이 먹었다. 처마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경쾌하다. 아랫집에도 일찍 손님이 와서 호떡을 구워 먹는다기에 하나 얻어먹었는데, 지금 시간엔 불 꺼지고 사방엔 가는 빗소리뿐인데 우리집 처마 밑에선 두런두런 정담이 계속된다. 먼지가 풀풀 날리던 땅이 물기를 받아 젖어들고, 끝이 노랗게 탈색된 댓잎이 푸르게 다시 물이 오르고, 이웃들의 바쁜 마음이 잦아들고, 불 켜진 방에 사람들이 모여 앉아 차를 마시든 술을 권하든 아름답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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