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

인연 따라 운명을 건져 올리는 황홀한 만남

모든 2 2020. 6. 15. 23:05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31

 

이상기온이다. 아직 시월인데 한 번은 우박이 쏟아져 컴프리잎이며 배추잎에 구멍을 냈다. 준비 없이 겨울을 맞이해야 할 때 느끼는 당혹감을 겪으면서, 아이가 콧물을 흘리는 걸 보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렇게 추웠던 날 손님이 찾아왔다. 아내는 시골에 내려온 뒤 처음 찾아오는 후배 부부를 맞이하느라 부산했다. 아이 셋을 데리고 찾아온 손님들은 주로 방안에서 무릎까지 이불을 덮고 도란거렸다. 방은 그래도 아늑하고 따뜻하였고, 아이들만이 밖으로 나가자고 졸라댔다. 결국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닭장으로 배추밭으로 끌려다녔는데, 바람이 거세다.

서울 근교 분당에서 온 그 집 딸아이는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들어가는데, 추운 줄도 모르고 파카옷 자크를 채울 생각도 안 하고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경탄했다. 아파트에서 아래층 사람들이 타박하는 바람에 집에선 뛰지도 못하고 답답하게 지냈던 모양이다. 이렇게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면 좋겠다는 소아(小兒)라는 그 아이는 닭장에서 모이를 먹는 닭 때문에 신기해 했고, 윗집 처녀가 신작로에 널어놓은 나락을 보며 그걸 찧으면 쌀이 된다는 사실에 놀란 모양이다. 알타리무를 한 번 뽑아보아도 되느냐고 묻는 그 아이에게는, 제 손으로 무를 뽑아쥐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특별한 경험이 되는 모양이다. 아이들은 겨울 찬바람에도 결코 춥지 않은 모양이다. 뛰어놀 공간과 신기한 놀이감이 있는 한 아이들에게 세상은 마음껏 달려가고픈 은혜롭게 열린 땅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그네들이 돌아간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니 세상이 하얗다. 밤새 눈이 내린 모양이다. 이른바 첫눈인 셈인데, 먼저 아이를 깨워서 마루로 데려갔다. “저게 눈이야.” 20개월이 좀 넘게 세상 빛을 보아온 우리 결이는 이번이 두번째 겨울이며, 그 아이가 겨울에 태어났으니까 정확하게는 세번째 겨울이지만 그땐 너무 어렸고 감기치레를 하느라 정신만 쏙 빼놓았던 기억뿐이다. 그렇지만 이젠 제법 말도 할 줄 알고 보면 보는 대로 ‘이게 뭐야?’ 확인하는 나이인지라, 아이에게 이번 첫눈은 생애의 첫눈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감나무 위에도 눈이 내리고, 배추 위에도 눈이 쌓이고 앞산 뒷산 숲이 흰눈으로 덮여 있다. 아이 때문에 부모들마저 흥분되어 덕유산에 눈 구경을 가자면서 마음이 들떠 있었다.

아이의 눈을 통해 우리의 전생을 기억해 내는 작업이라고나 할까? 삶에 이리저리 채이다 보면 많이 더러워지고 낡아보이는 사물들 앞에서 절망하는 세대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할까? 세상에 새로울 게 없고 가슴 뛰게 만드는 것도 없어진, 묵은 영혼에게 던져진 ‘아니다’라는 언어일까? 마음을 달리 먹으면,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지면 영원한 청춘이 기다려 준다는 말일까? 갑자기 조희선님이 쓴 시에 눈길이 간다. 책상 옆 기둥에 압정으로 꼭 눌러서 달아놓은 쪽지에 그 시가 옮겨져 있다. ‘아침, 그대를 맞으며’란 시다.

그녀는 그냥 서성거리는 아침은 싫다고 말한다. 해뜨는 산을 향해 그냥 소리치며 내닫고 싶고, 바람부는 들녘이라도 마냥 손 흔들며 반기고 싶다고 한다. 그녀가 말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기쁨이야
하루를 산다는 건
그물을 싣고 바다를 향해 떠나는 싱싱한 희망이야
어젯밤의 졸린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건 싫어
지난날의 어둔 습성으로 아침 창을 여는 건 싫어
살아간다는 건 설렘이야
하루를 산다는 건
인연을 따라 운명을 건져 올리는 황홀한 만남이야"

하루를 기쁘게 싱싱하게 설레면서 황홀하게 아침마다 만나는 사람이란 한 하늘 아래 살면서도 얼마나 다른 생애를 누리는 것일까? 어쩌면 아이들의 눈빛에서 우리는 ‘기쁘게 싱싱하게 설레면서’ 아침을 시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 때문에 젊어지고 뽀송뽀송해지며 아릿하고 흥분되는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어제 눈이 오고 나서 오늘 날씨가 확 풀렸다. 햇볕이 아침부터 마루 깊숙히 들어와 앉았다. 창에 얼굴을 가까이 대니, 그 사이 달구어진 유리에서 훈기가 느껴진다. 따뜻하다. 마루에 방석을 깔고 앉아 햇볕을 쪼이며 감사하는 아침이다. 마루 한쪽에는 아내가 어젯밤에 다듬다 남겨둔 건고추가 쌓여 있고, 아이의 변기 위에는 팬더곰 인형이 점잖게 앉아서 마찬가지로 햇볕을 즐기고 있다.

마루 아래쪽에 콩대를 세워 말리고 있는 중인데, 한결이가 와서 손가락질한다. “땅콩 줘. 땅콩 줘.” 얼마 전에 먹었던 땅콩을 기억하는 결이는 콩깍지 모양만 보고 땅콩이라고 우긴다. 꼬투리 몇 개를 따서 아이에게 주었다. 까보니, 까맣고 쥐알만한 쥐눈이콩이 드러난다. 이제 탈곡도 무리 없이 잘 끝났고, 들깨랑 콩만 털면 가을걷이가 마무리된다. 얼마 전에 고개 너머 사는 이웃이 딸기 모종을 캐가라고 해서, 한 50주 정도 옮겨다 텃밭에 심었다. 이제 마늘만 밭을 만들어 심으면 올해 농사일은 대충 손을 놓아도 될 성싶다.

지난 며칠 동안 너무 추웠던 탓일까, 모든 햇볕이 고맙다. 마당에 나가서 보니 돌담에 내리는 햇볕이 살근살근 간지럽게 돌을 달구고 있다. 표고버섯을 잘라서 널어놓은 채반 위에도 햇볕이 내려앉고, 걸어놓은 곶감에도 베어놓은 해바라기꽃에도 씨가 잘 여물도록 단단하게 마르도록 은총처럼 햇살이 몸을 던지고 있다. 은총을 주는 쪽은, 적어도 오늘은 당연히 햇볕이다. 거저 주는 걸 받고 있는 나는 오늘 마음이 한가하다. 뒷집 처녀는 널어놓은 나락에서 검불을 걷어내고 있다. 검불이 너무 많으면 나락을 깎을 때 정미소 사람한테 분명 한마디 들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느 하늘 밑 바람벽에도 온기를 전해주는 햇볕이 있다는 것은, 그리고 전령처럼 어제 눈발이 흩날렸다는 것은 완고하게 머무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 알게 한다. 세상은 마냥 가을일 수 없듯이 겨울이 오고, 마냥 겨울일 수 없듯이 봄과 여름이 찾아올 것이다. 또한 한여름에도 장마 때는 추워서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하고, 한겨울에도 햇볕을 받다가 졸음에 빠지는 순간이 있다. 그러니 부질없이 이거다 저거다 하는 것에 발목을 잡혀 굳은 영혼으로 산다는 것은 너무 일찍 황혼을 부르는 짓이다. 오고가는 것에 매이지 않고 오면 오는 대로 즐기고, 가면 가는 대로 음미하는 법을 터득하고 싶다. 그래서 내 마음 안에서 날마다 아침이 동터 오게 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내 의지와 상관있게 또는 상관없게 주어지는 인연을 따라서 새로운 운명을 건져 올리는 법을 익히고 싶다.

분당에서 손님이 왔을 때 마침 고구마가 있어 그걸 쪄서 간식으로 냈는데,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었다. 호박고구마라는 이 물건은 김제에서 수고롭게 얻어 온 모종이었는데, 지난 여름에 멧돼지란 놈들이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다. 어쩔까 고민하다가 파헤쳐진 줄기를 흙에 묻어두었더니 다시 뿌리가 내리고 잎사귀가 돋아나고 제법 꼴을 갖추었다. 그런데 막상 거두어 보니 고구마들이 모두 손가락처럼 길쭉하고 작았다. 그래도 버리긴 아까워서 대충 거두어 들였는데, 종자가 남다른지 껍질도 얇고 맛이 그만이었다.

나름대로 포기할 놈은 기꺼이 포기하고 남아 있는 몫이라도 남김없이 즐긴다면, 그도 또한 즐거운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머지 즐거움은 어차피 멧돼지의 몫이었는가보다 생각하며 위로하는 게 신상에 좋을 듯하다. 결국 산다는 것은 ‘오늘’을 생애의 전부인 것처럼 산다는 것일까? 그래서 생애의 전부를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행복하게 살든가, 아니면 상황 때문에 늘 괴로워해야 한다. 사실 문제없는 하루가 어디 있겠나 싶어서이다.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고 하나의 표지로 보고, 햇볕 한줌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노력하지 않아도 우러나오길 기대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