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

달, 어둠과 상생하는 빛

모든 2 2020. 6. 15. 18:55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16

 

아이를 키우면서, 올해는 아예 농사를 적게 짓기로 했다. 작년에야 초보 농사꾼 마음에 농사거리가 되는대로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김을 맸다. 요령도 익히지 못한 탓에 부실한 몸이 내내 고달팠지만 가을엔 그래도 노력한 만큼의 수확은 거두어들였던 것 같다. 그런데 올해는 그럴듯한 변명도 있고 하여 밭농사 규모도 줄이고 가능한 요령을 피웠는데 하늘도 눈치를 채셨는가, 제대로 수확한 것이 없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데 정성이 부족했으니 하늘도 보살펴 주지 않는 것 같다.

작년엔 열다섯 배의 소출을 냈던 감자가 올해는 배도 거두지 못했다. 그나마도 겉은 멀쩡한데 깎아보면 속이 썩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마을에선 올봄의 지독한 가뭄 탓으로 돌렸지만 씨감자를 심을 때 충분히 물을 주지 못한 탓도 있고, 잡초가 무성하도록 돌보아 주지 못한 탓도 있었다. 작년에도 가뭄이 심했지만 그때는 경운기에 큰 물통을 싣고 일일이 물을 주곤 했다. 고추밭에도 작년에 없던 탄저병이 돌았다.

고추는 아래 달린 녀석부터 빨갛게 익어가기 마련인데, 빨간 고추는 물론이고 꽃이 갓 떨어진 풋고추에도 탄저가 먹어들어갔다. 탄저가 든 고추는 처음엔 꼭지가 노랗게 변하다가 몸통에 새카맣게 얼룩을 남기면서 말라비틀어진다. 멀쩡한 고추를 몇 개 따면서 탄저 먹은 고추는 한줌씩 따서 버려야 했다. 급기야 어떤 것은 달랑 고추대만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고추밭에만 다녀오면 마음이 불편해지고 한숨만 나왔다. 애초에 심기도 적게 심었는데 그마저 탄저로 버리고 나니 우리 먹을 것이라도 나올지 걱정이다. 고추밭 옆에 옥수수를 심었는데, 옥수수는 익는 대로 산짐승이 와서 허리를 갉아서 끊어놓고 알맹이를 솎아 먹었다. 하도 억울해서 채 익기도 전에 옥수수를 거둬오기도 했다.

만사는 하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게 있어서 발생한다는데 정말 마음공부를 해야 농사도 짓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마음이 상하고서야 내년엔들 농사지을 기력이 생기겠는가. 어느 책에선 콩 심어서 한 알은 새가 먹고 한 알은 뭐가 먹고 한 알은 사람이 먹는다는데, 아직 공부가 부족한 나로선 그렇게까지 마음을 내기가 힘든 모양이다. 옥수수야 그렇다 치고 감자나 고추는 어디 탓할 남도 없으니 더 속상하다. 결국 정성을 드리지 못한 나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으니, 나는 그만큼 게으르고 하늘을 제대로 섬기지도 못한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그늘을 존중하는 마음


그러던 참에, 임우기라는 분이 쓴 「그늘에 관하여」란 책을 보다가, 눈을 환하게 해주는 글귀를 만났다.

"달과 해는 우주 차원으로 보자면 서로 동무 사이쯤 될 텐데, 인간의 욕심이 달과 해를 이간질해 왔다. 해는 빛의 세계이고 달은 어둠과 빛이 공생하는 세계다. 시간론적으로 보자면 양력과 음력의 역사는 서로 상생하는 관계였으나 인간의 인간주의적 역사가 양력에 의한 음력의 지배를 강화시켜 왔다. 마치 그늘처럼 어둠과 상생하는 빛의 세계인 달은 해를 재우고 깨운다. 어머니의 품 같은 달…."

글이 어렵다 보니 몇 번을 연거푸 읽게 만들었다. 내 나름대로 다시 읽어보자면 달과 해는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와 닮았는데, 어머니인 달은 어둠 가운데 어우러지는 빛이고, 그녀의 자식인 해는 빛 가운데 빛나는 빛인 셈이다. 어찌 생각하면 달은 밤이 어둠을 아예 삼켜버리지 않도록 막아주는 그늘같이 은은한 빛이며, 해가 충분히 쉬고 다시 생기를 얻을 때까지 세상을 지켜주는 버팀목처럼 보인다. 달의 공력으로 만들어지는 은은한 어둠, 포근한 그늘이 대낮처럼 이글거리던 해에게는 들뜨지 않고 우주 앞에서 겸손해지도록 다독이는 것 같다.

달이 가진 미덕이라면 이렇게 그늘을 존중해 주는 태도, 어둠을 사정없이 밀어내지 않는 태도가 아닐까? 어떤 시인은 달은 빛나도 눈부시지 않아서 좋다고 했다는데, 생애의 칙칙한 이면조차도 감당해 주는 품이 아름다운 게 아닐까? 그러면서도 스스로 빛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달은 거룩함의 상징이 된다. 제 맘대로 되는 일 하나 없어도, 세상이 진흙구덩이 그 자체라 해도 하늘조차 손을 놓아버린 것 같아도, 오늘 먹을 양식이 달랑거리더라도 그게 모두 우리를 키우려는 하늘 뜻이 서려 있음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뜻을 헤아릴 안목이 내게 있다면 나의 ‘오늘’이 얼마나 복될까? 평화롭고 부드럽게 넘어가지 못하는 생활고 속에서 오히려 영혼이 한걸음 진화할 수 있다면 얼마나 반가운 일일까? 눈에 보이는 저주를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있을 축복의 기회로 읽어내는 사람은 복되다. 어둠은 그대로인데 스스로 빛이 되는 빛, 하느님의 모상인 채로 언제 어디서나 빛으로 서는 빛, 우연적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영원한 것을 오롯이 응시하는 빛, 그래서 눈부시진 않아도 빛으로 남아 밤에도 사람의 마음이 영원한 빛을 기억하도록 일깨우는 거룩한 사건[聖事]이 우리 가운데 발생하는 건 아닐까?

 

평생을 하루같이 흔들림 없이

 

새벽녘이면 아침 안개가 잦아질 때까지 어김없이 논둑을 밟는 아랫마을의 노인장처럼 평생을 하루같이 흔들림 없이 걸어갈 요량은 없는지 되묻는다. 키가 작달막하고 마을에선 가장 연세가 지긋하신 어른이 들판 한가운데를 가만가만 밟아 나가는 것을 볼 때마다 무슨 동양화를 보는 것도 같고, 마음엔 처연한 기운이 뭉클뭉클 피어오른다.

그분의 생애에 왜 아픔이 없었을까? 가뭄에 마른나무 같은 손마디에는 어떤 절망 한 조각 없었을까? 목숨 같은 벼포기가 태풍에 넘어갈 때 어떤 심경이었을까? 내가 상상하지 못할 욕됨과 누추함과 비탄은 또 없었을까? 가슴 한가운데 바람이 들어차 윙윙거리던 참담함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시간을 거쳐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마냥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하는 촌로의 모습은 한 해 농사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초보 농사꾼의 경망스런 마음을 꾸짖는 것 같다. 그게 아닌데, 하고 은근히 말씀 건네시는 것 같다.

그 노인은 노자가 도덕경에서 밝혀놓은 이 말을 삶으로 아는 듯했다.

"솟아남을 알면서 움푹한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세상 시냇물이 되고, 세상 시냇물이 되면 한결같은 미덕이 떠나지 않아 젖먹이로 돌아간다. 환함을 알면서 어둠에 머물러 있으면 세상 법도가 되고, 세상 법도가 되면 한결같은 덕에 어긋나지 않아 무극(無極)으로 돌아간다. 영화(榮華)를 알면서 욕된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세상 골짜기가 되고, 세상 골짜기가 되면 한결같은 덕이 넉넉하여 통나무로 돌아간다."

높고 환하고 영화로운 자리를 잘 알면서도 낮고 어둡고 비천한 자리에 스스로 머물러 있는 사람은 젖먹이·무극·통나무와 같은 근원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인데, 영원한 것은 어둠조차 마다하지 않으며, 바닥에서야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성서에서도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고서야 어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고 하지 않던가. 흙을 파먹고 부지런히 배설물을 내보내 땅을 기름지게 만들고 온갖 작물을 풍성하게 키우는 미물처럼 빛이란 빛은 언제나 어둠을 요구하는가 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