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화 신부 첫 미사 기념(1952년 12월 21일)
이인하 신부는 1952년 12월 20일 사제품을 받고,다음날 예산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아직 휴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전쟁 상태에서 이뤄진 '작은 경사'였다.
▲자료 재공:내포교회사연구소(041)362-5028
+ 요한복음 6,60-69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너희도 떠나고 싶으냐?"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말씀의 향기>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이혁 아우구스티노 계룡 주임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성체성사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해 떠나갔다는 내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셔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거듭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 말씀에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이들이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불만을 토로하며,예수님을 버리고 물러가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고 복음사가는 전해 줍니다.
'성체성사'는 이처럼 알아듣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그들에게 '성체성사'는 예수님께 다가가는 데 있어서 큰 걸림돌입니다.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만 바라뵈올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신앙에 닫힌 무관심한 마음,불신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성체성사의 오묘한 신비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또한 성체성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의 삶,희생의 삶을 전혀 이해하고 실천할 수 없기에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가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 많은 이들이 신앙을 소홀히 하면서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가고 있습니다. 마치 복음의 그 옛날처럼.. 신앙생활을 쉬는 냉담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특히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님과 만나면서 우리의 신앙은 점점 커지고 굳어져 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과의 만남이 없는 신앙생활은 무거운 짐처럼 느껴집니다. 기쁨과 긍지가 없기에 '기도생활과 주일미사참례 등 신자로서의 본분'은 자유로운 삶을 구속하는 장애물로 여기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없고,하느님의 은총 속에 살아가지 않는 신앙생활은 귀찮은 것이기에 거기서 떠나고 싶어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그때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주님,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적극적으로 따르기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수많은 유혹들,걸림돌들이 있습니다. 물질의 유혹,세상사에 대한 집착,진리에 무관심한 태도,이기적이고 나태한 모습 등 많은 것들이 우리를 예수님에게서 떠나가게끔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베드로 사도처럼 확고한 신념을 갖고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주님,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과 예수님의 말씀과 성체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라는 진리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또한 성체성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주님의 은총과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via의 시선(산다는 것)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가난하게 살고 싶다. 그러나 빈궁하게 되는 것은 싫다. 풍요롭게 살고 싶다. 그러나 사치를 부리며 살고 싶지는 않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의 삶은 단순하다. 먹고 자고 입는 것이 전부다. 따라서 먹을 것과 잘 곳 그리고 입을 것이 있으면 살기에는 충분하다. 농업,상업,문학,예술을 막론하고 불필요한 삶의 열매는 사치일 뿐이라는 소로스의 말은 틀리지 않다.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신체에서 느끼는 냉기보다 사회적 냉기가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나는 나로써 살고 싶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로써 살지 못하고 타인이 원하는 내가 되어 간다. 타인은 누구인가? 타인은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지만 나는 아니다. 내가 아닌 나로써 사는 것은 고통이다.
흔히 '사랑'을 말한다. 사랑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존재하는 세상에서,성경은 하느님의 자발적 발출로부터 시작되는 사랑을 가르친다. 사랑은 발출이다. 나로부터 나도 모르게 분출되는 힘이다. 성전 오른 편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강을 이루고 수많은 생명들을 살리는 힘이 되는 것처럼,사랑은 끊임없는 흐름의 이어짐으로 생명을 살린다.
흐른다는 것은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어주고 분여하며 비우는 것이다. 그런데 고갈되지 않는다. 비움을 통한 채움이 사랑의 본질이다.
비우지 못하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믿지 못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믿지 못하는 나",믿지 못하는 내가 믿지 못하는 것은 사실 자신이다. 나를 믿지 못하는 나는 타인을 믿지 못한다. 그리고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불필요하게 많은 것을 쌓아놓고 지낸다. 더 높은 벽을 쌓아서 성을 만들고,지혜라는 이름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을 창고와 냉장고에 적채하고,싼값에 구매했다고 자랑한다. 어리석음의 우화이다.
단절시키지 않아야 한다. 소통과 감정이입으로 공동체는 공동체의 본성을 회복할 수 있다. 너와 나는 분리된 개체가 아니라 이어짐을 통해서 연결되어 있는 공동운명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래서 조금 불편해지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자.
85년 된 웨딩드레스
193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마리아 테레사 모레노'라는 여인이 결혼을 하게 됩니다. 워낙 알뜰한 여인이라 그녀는 결혼식에 입을 웨딩드레스를 본인이 직접 만들어 입었습니다.
50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 할머니가 된 이 여인에게 어느 날 손녀 '마르타'가 놀라운 부탁을 합니다. 할머니가 입었던 그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하고 싶다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1983년 손녀의 결혼식에 오랜만에 할머니의 드레스는 그 멋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마르타의 막내 여동생도 이 웨딩드레스를 보고 한눈에 반하게 되고,1997년 결국 그녀도 할머니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을 하게 됩니다.
놀랍게도 이 웨딩드레스의 역사는 여기서 끝이 아니였습니다. 마르타의 딸마저 결혼식 때 증조할머니의 드레스를 입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2017년 증손녀는 무려 85년이나 된 세상에서 가장 멋진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장에 입장합니다.
85년 된 옷을 물려 입는다는 것은 단지 물건을 오래 썼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할머니의 손길이 한 땀 한 땀 배어 있는 옷을 입고 새로운 출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든든한 일이었을까요?
옷을 물려 입는 일을 찾아보기 어려운 요즘입니다. 예쁘고 좋은 옷들이 넘쳐나지만 그래도 내 가족의 숨결과 체취가 배어 있는 옷은 여전히 귀한 옷입니다. 외롭고 힘들 때 그 낡은 옷들이 가장 따뜻한 갑옷이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옷장을 열어 아버님이 물려주신 빛바랜 외투를 꺼내봅니다. 그 옷을 입고 외출하기엔 아직 무더운 날씨지만,찬바람이 불면 꼭 한 번 입어 보렵니다. 결혼식장에 입장하는 신부의 그 설레는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씩 행복의 길을 걸어 보고 싶습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모두가 알아보는
예쁨보다
삶과 삶 사이
배려라는 이름의
아름다움.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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