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man Interview
포티나,지금 행복한가요?
의정부 느티나무 공부방 이덕숙 포티나를 만나다
이덕숙 씨와 이정섭 씨 사이에서 아이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느티나무 공부방을 처음 찾아갔을 때,마침 두 청소년이 와 있었다. 이 아이들은 스포츠 댄스 경연대회에 나간다며 한껏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고,카메라를 들이대자,함박꽃처럼 환하게 웃었다. 스스럼없이 텔레비전 스타가 된 것처럼 몸짓도 선보였다. 공부방 대표로 있는 이정섭 프란치스코 형제와 이덕숙 포티나 자매는 수줍게 아이들과 포즈를 취해주었다.
이날은 이덕숙 자매를 만나러 간 길이었다. 그녀는 충난 서천에서 자라고,대학 졸업 후에는 의정부에서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예비교사였다. 당연히 교사가 되리라고 생각했지만,외삼촌댁에 머물며 치른 임용고시에는 번번이 떨어졌다. 틈틈이 봉사활동도 하고 싶었다. 의정부 도서관에서 책 정리하는 봉사를 할까도 생각했지만,거리에 나붙은 포스트 한 장이 눈에 들어 왔다. 촌스럽게 크레파스로 쓴 포스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공부방 자원교사 모집,"2004년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공부방 교사 이덕숙 씨는 처음에 이런 생각이었다. '단순히 아이들에게 공부만 가르쳐 주면 되겠구나,이게 임용교시 준비하는 내게도 도움이 될 거야!'이런 얄팍한 생각은 아이들을 만나면서 초장에 깨져 버렸다.
"내가 생각했던 공부방이 아니었어요. 아이들이 너무 가난했어요, 나도 가난한데,어느 날 공부방에서 저녁밥을 먹게 되었는데,두부 여덟 쪽,김 한 봉에 밥 반 공기주더라고요. 아이들은 서로 젓가락 싸움을 하면서 먹더라고요. 이걸 보면서,점점 마음이 불편한 말을 마구 던지더라구요. 왜 그럴까 궁금했는데,알고 보니 그 아이 어머니는 안 계시고,아버지는 노상 집을 비우니 아이들이 자주 굶는 거예요. 처음엔 한 끼 정도 굶겠지 했는데,내리 굶더라고요."
이덕숙 씨는 얼마 후엔 아예 풀타임 실무자로 일하게 되었다. 공부방 생활이 마냥 행복할 수는 없었다. 내내 굶고 살던 한 아이가 자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불편한 말을 내내 던지던 아이가 언제부턴가 '안아 달라'는 등 관심을 보이더니,공부방 창문턱에 올라가 죽겠다고 우겼다. '엄마도 날 버렸고,아버지도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한테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 그러니 난 살 이유가 없다'는 거였다. 그 아이를 부여안고 '선생님이 잘못했다!"면서 달래고 또 달랬다. 그날 이덕숙씨는 계단에 앉아 펑펑 울었다. 정말 힘들었다.
자원교사들과도 한참 싸웠다. 이덕숙 씨는 "내 자신이 잘못 한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다른 교사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고 생각했다. 2000년에 대학 다니면서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생활을 전혀 하지 않았던 그녀는 "나한테 영성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던 중에 전국공부방협의회 등 교사 연대모임에 나가면서 당시 빈민운동 하던 정일우 신부 등을 만나면서 신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최근 들어 한현 선생이 발행하는 <참사람되어>도 찾아 읽고,예수살이 공동체와 가톨릭일꾼도 접하게 되었다고 했다. 2년 동안 공부방에서 식사 봉사를 해주었던 예수살이 공동체를 보면서 '도대체 신앙이 뭔가'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예전에는 식사 전 기도를 왜하나,너무 열심한 신자들을 보면 환자 아냐,하는 생각도 했어요. 나한테 신앙이란 부활절에 계란 먹는 것 정도로 여겨졌고요. 예수살이 공동체 분들이 그 안에 갈등이 있어도 끝까지 화합하려고 노력하고,여전히 공부방에서 봉사해 주시는 것 보고,저게 신앙의 힘인가,생각했어요. '사랑'이란 단어를 거기서 알게 된 것 같아요. 예전에는 바오로 서간을 읽으면서,사랑은 언제나 온유하고 참아내며 등등 이야기하면 그게 남녀간의 애정일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에게 공동선에 대한 열망을 보고서,왜 나는 이런 데서 배우지 못할까, 생각했어요."
이덕숙 씨는 어머니가 던진 한 마디를 잊지 못한다. 이렇게 사는 것은 '거지같은 삶'이라는. 이 말이 내내 상처가 되었다. 가난한 이들 속에서 그들처럼 사는 것,밥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고 사는 게 부끄럽기도 했다. 예전에는 부모님에게 좋은 딸이 되려고 노력했는데,지금은 많이 자유로워졌다. 특히 예수살이 공동체는 이런 삶을 선택하는 것이 예수님의 길이라고 가르쳐 주었고,용기를 주었다.
당시 한현 선생이<참사람되어>를 발행하는 것을 보고 개인적 호기심에 증폭되었다고도 전했다. 정해진 가격도 없이 "여러분의 참여로 꾸며집니다. 우표나 인쇄,종이 값을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는 글귀를 보고 신선했다. 자발적인 도움으로 일을 하고, 일정한 수입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분들이 사실은 우리 공부방에 오던 교사들이었구나,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내가 어리석어서 못되게 굴었구나,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알게 되면서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다 읽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고 공부하며 행동하자'는 가톨릭일꾼 슬로건에서 제일 좋은 점은 '공부하며'라는 부분이었어요. 그래서 먼저 공부부터 다시 해야지,생각했어요. 김규항의 <예수전>도 읽고, 빈센트 반 고흐도 좋았고, 토머스 머튼도 좋았어요. 그러다 보니,아무리 바빠도 책을 읽게 되더라고요. 너무 신기해요."
공부방 자체는 종교적 성격을 갖고 있지 않지만,얼마 전에 공부방 아이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다른 아이들과 함께 <생활 속에서 드리는 나의 기도>를 꺼내서 함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아이들은 따로 설명해 주지 않아도 모두가 정말 기도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이덕숙씨는 이제야 '막차를 탄 느낌"이라고 한다. 안 읽던 성경책도 읽고,뭔가 배울 수 있다면 어디든 얼굴을 들이밀줄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늦게 깨치고 늦게 배우는 사람으로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요즘은 무슨 뜻인지 잘 모르지만 '완덕'이라는 말도 좋아졌다. 그리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즐길 줄 알게 된 것이 너무 행복하다.
'공부방 실무를 보면서,늘 혼자서,슬픈 데도 웃어야 하고,괴로워도 괴로운 기색을 내지 못하고,늘 밝게 지내려고 하는 게 참 힘들었어요. 이젠 그런 거 다 내려놓았어요. 이젠 즐거우면 즐거운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내버려둬요."
아이들 앞에서 우는 모습을 작년에야 처음 보여주었다고 한다. '나의 인간적인 나약함을 인정하게 되고,그러면서 예수님이 너무 좋아졌다."고 했다. 사순시기에는 경망스럽게 보내지 않고,지난 성탄 때도 빈민 사목하는 선교본당에서 미사를 드렸다고 했다. 어르신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시고 먹을 것도 챙겨주시고,너무 좋았다고 했다. 그러면서,그동안 자원봉사 선생님들에게 하지 못한 것을 '다시 사는 모습으로'만회하고 싶다고 했다.
이덕숙씨는 요즘 자주 눈물이 난다. "참고 참고 참았던 것들이 자꾸 올라오나 봐요." 종교성 없이도 지금 일하는 공부방이 좋고,충만한 삶이 시작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야기를 나누며 "지금 행복하다!"고 했다. '공부방 교사 하길 잘했다!"고 했다. 그동안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이들 가운데서 꿋꿋하게 버티자고 생각하면서,뒤에서 남몰래 흘린 눈물도 많았지만,그는 지금 가장 활력이 넘치고 행복하다고 했다.
우리나라에도 난민이 있어요
난민 활동가 유시환 요한을 만나다
아직 미군부대가 남아있는 동두천,보산역 인근에 '난민의 집'이 있다. 주변은 온통 빌라촌인데,아주 오래전부터 슬럼화되었는지,행인도 거의 없는 을씨년스러운 골목에 자리한 빌라 2층에서 대표활동가인 유시환 요한시를 만났다. 여기서는 그를 '알렉스'라고 부른다.
유시환씨는 말레이시아에 유학을 떠났다가 주저앉아 9년 동안 유학원과 여행사 등을 운영하며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허리가 아파서 수술 하러 한국에 왔다가 병역기피 등 여러 가지 문제로 꼬여서 출국금지당하고,결국 다 포기하고 의정부에 자리 잡았다. 그러다 만난 사람들이 이주노동자들이었다. 의정부교구 광적성당에는 필리핀 노동자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유시환 씨는 영어 실력 때문에 여기서 큰도움이 되었고,사제가 되고 싶어 예비신학교에도 다녔다. 그렇지만 '신학교는 나이도 많고 말도 잘 안들어서인지 문 앞에서 잘렸다"고 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일하게 된 곳이 이주노동자들을 돕던 '의정부 엑소더스'였고, 이 활동 중에 동두천 지역의 '난민'들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아예 동두천으로 이사와서 자기 집을 '난민공동체'의 공용공간으로 내놓았다.
"내가 이주노동자들을 처음 만난 것은 광적성당에서였어요. 여기 필리핀 공동체에는 등록인원이 400명 정도나 됩니다. 이 근처에서 처음으로 영어미사 하게 되면서 필리핀 사람들이 몰려왔어요. 거기서 대표봉사자로 일하면서 의료진료 할 때는 영어통역 봉사를 했어요. 이 친구들한테 배울게 많더라고요. 하루 14시간씩 힘들게 노동자로 일하면서도 주일 날 너무 기쁘게 미사하고,신앙 안에서 놀더라고요. 그런 모습 보면 함께 일하지 않을 수 없어요."
지금 유시환씨가 살고 있는 '난민의 집'근처는 동두천 옛 시가지이다. 지금은 예전부터 살던 나이 드신 분들만 거주하는데,이분들은 미군이 철수하면서 가옥을 쪽방으로 개조해서 난민들에게 월세 방을 내주고 있다. 이곳은 주로 아프리카 출신의 영어권 나라 난민들이 대부분이다. 유치환씨는 의정부엑소더스에 있을때 아동구호단체인 '세이브더 칠더런'의 제안으로 동두천 난민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당시 조해인,배존희 신부등이 난민활동을 적극 지원해 주었다.
'저도 난민은 이때 처음 경험했어요. 처음엔 시리아 사람들이 여기까지 왔나,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종교난민이 가장 많고,주로 라이베리아,나이지리아,우간다,케나,가나 등 아프리카 영어권 나라 사람이었죠. 불어권 사람들은 안산으로 간다고 해오. 그중에서 나이지리아 사람들은 여성할례 문제 때문에 고향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많아요. 여성들이 부족 전통에 따라 생식기 일부를 잘라내다가 감염이나 과다출혈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할례를 거부하면 죽임을 당하기도 해요. 그 사람들은 현지 한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한국에 오는 경우가 많아요."
아프리카 난민들은 돈 한 푼 없이 달랑 비행기 표 한장 쥐고 오기 때문이에,한국에서 생활하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 한국에선 난민신청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일단 입국하면 출입국관리소에서 영종에 있는 난민센터로 보낸다. 6개월 동안 한국문화도 가르치고 기술도 배운다고 하는데,6개월 동안은 약간의 보조금도 받는다. 현재 한국에 유입된 난민 신청자가 3만명 정도인데,이곳 동두천 보산동에 머무는 난민 신청자만 300여명이나 된다.
그렇지만 이들의 신청을 돕는 무료법률사무소가 있지만 인력이 턱없이 모자라 거의 도움이 안 된다. 난민심사 하는데 소송 비용만 200만원 정도 들고, 대법원 판결까지 4년 정도 걸린다. 이들은 유엔 규약상 강제출국은 당하지 않지만,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로 실제로 난민 인정을 받는 사람은 전체의 1%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난민 많아도 출입국 관리소에서 이 일을 맡는 사람은 30명밖에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난민 인정 과정이 오래 걸리고,나라에선 난민들이 대량으로 유일될까봐 공식적으로 난민 인정을 가능한 해주지 않으려고 해요. 그러다 보니,난민들은 소송비용 대랴 생계유지 하랴 너무 힘들어요. 처음 6개월은 취업이 불가능하고,그 다음부터는 비자 연장을 통상 한 달 단위로 해서,난민들이 공장 취업하기도 어려워요. 결국 이주노동자들도 위험하고 힘들어서 떠난 열악한 공장에 난민들이 들어가거나,아니면 대부분 일용직에 종사합니다. 일하면서 불만이 생겨도 난민 신청에 문제가 생길까봐 말도 못하죠."
유시환씨도 이들을 위해 무얼 할 수 있는지 몰라 당황했다. 처음엔 방송국을 연결해 달라고 해서 도와주었는데,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다가 다툼이 생기고 말았다. 이때 영감을 받은 게 정일우 신부가 판자촌에 들어가서 만든 주민조직이었다. 여기서도 외부인에게 생활적 도움을 받는 것보다 자치조직을 만들고 자립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유시환 씨가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이런 생각이 구체화 되었다. 일단 공간이 생긴 것이다.
"본래 동두천에는 보수단체밖에 없었는데,마침 동두천에 의식 있는 시민단체가 하나 생겼어요. 대표 되시는 분이 직원을 구한다고 저한테 전화를 했어요. 사람 구해 달라고.그래서 '제가 하면 안 될까요?" 물었죠. 이미 의정부 엑소더스 그만두고 이곳에 들어왔으니,저도 생활 문제를 해결해야 했거든요. 다행히 그쪽에서 반상근할 사람을 구하는 바람에,시민단체 일도 하고, 난민활동도 할 수 있게 된 거죠. 이래저래 걱정이 많았는데,필요하면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더라고요."
처음 이곳에 이사 왔을 때는 제일 걱정이 '난민들이 나를 환영해 줄까?'였는데,그분들이 와서 청소도 해주고,이삿짐도 날라주었다. 지금은 이 '난민의 집'이 유시환 씨 거처이며,난민공동체 회의실이며,공동육아를 하는 놀이터가 되었다. 이 지역에 먼저 들어와서 주민조직에 관심을 갖던 난민 가족들이 나서는 바람에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들은 먼저 지역사회에 잘 자리 잡고 사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첫 번째 활동으로 정한 게 '청소'였다. 단체로 '동두천 난민공동체'라고 쓰여 있는 반팔티를 맞춰 입고 보산역에 나가서 청소부터 시작했다. 젊은이들이 거의 없는 이지역에는 눈이 와도 쓸어내는 사람이 없다. 겨울에 난민들이 거리에 나와 눈을 치우는 것은 적절한 아이디어였다. 다른 단체복이 없어서 겨울에도 반팔티 위에 외투 걸치고 나가서 청소를 한다. 이렇게 주민들과 관계를 먼저 트자는 거였다.
"소요산역에서도 청소했어요. 일요일 오후 네시경이면 등산객들이 술 취해 산에서 내려오는 분들 많잖아요. 우리가 청소하고 있으면 사람들이 '이쁘다.''고맙다.'해요. 그러다 갑자기 신이나면 아프리카 사람들이라 음악 틀고 춤을 추기 시작해요. 그러면 등산객들도 따라서 춤을 추고 ... 이렇게 놀면서 일을 하는 거죠."
지난 2월 10일에는 의정부교구장 이기헌주교가 '난민의 집'축복식을 해주고,다른 난민가정을 방문했다. 이 주교는 라이베리아출신 아미아타 씨,가나 출신 플림퐁 씨.나이지리아 출신 기프트씨 집을 직접 찾아가 "한국에선 난민 지위를 얻기 너무 힘들다." 는 호소도 들었다. 이기헌 주교도 "교구 차원에서 경제적 지원은 물론 행정 절차 및 제도개선 등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지금 '난민의 집'에 등록된 난민은 80여 명이나 된다. 이들은 종교와 국적이 서로 다르지만,서로 도우며 삶을 공유하고 있다. 의정부교구는 올해 교구 차원에서 '1본당,1난민 가정 돌보기'사업을 펼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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