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가난한 이들의 배 속에 곳간을 지어라
<내 곳간을 헐어 내리라>,바실리우스 지음.분도.2018.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이 구절은 무수히 많은 성인에게 영감을 주었던 복음서 말씀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이며,현대의 사를 드 푸코 역시 이 구절을 읽고 회심하였다. 교회마저 권력의 주변에 머물며 호사를 누리던 시절에 부패한 종교권력이 가장 싫어했던 이 말을 좀 더 철저히 그리스도를 따르자고 열망했던 이들은 가장 좋아했다. 권력을 선택했던 이들에게 족쇄가 되었던 말이 복음을 선택했던 이들에게는 자유는 주었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다가 회심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귀의한 고대교회의 교부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바실리우스 성인이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몰수당할 재산도 없다.
바실리우스(Basilius Magnus,330경~379)카파도키아의 수도 카이사리아의 신심 깊은 로마 상류층 가문에서 태어났다. 할머니와 아버지와 어머니가 성인이고,10남매 가운데 4명이 성인이다. 바실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과 아테네에서 공부하고,356년경 카이사리아의 주교 디아니우스에게 세례를 받고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나는 어리석은 일들에 많은 시간을 허투루 썼으며,헛된 일에 젊음을 거의 탕진해 버렸습니다. 게다가 하느님께서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신 지혜(1코린 1,20참조)를 가르치는 일에 몸 바쳤습니다. 그러다 문득 깊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때 나는 복음서를 읽고,완덕에 이르는 훌륭한 길은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이 세상 삶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영혼이 세상 것에 대한 어떤 미련도 갖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누나 마크리나는 가족들 가운데 가장 먼저 은수생활을 시작하고,바실리우스도 시리아,메소포타미아,팔레스티나,이집트 사막을 두루 다니며 은수자들을 만나고,수도생활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그때의 감동을 이렇게 표현했다.
"굶주림과 목마름과 추위와 헐벗음 속에서도 그들의 영혼은 항상 높고 자유로운 목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으로.. 천국 시민권이 무엇이고,천국에 집이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직접 보여 주었습니다."
한편 발렌스 황제(364~378 재위)가 친아리우스파 정책을 펼치면서,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여기던 카이사리아의 주교 에우세비우스가 바실리우스에게 사제품을 주었고,주교가 죽자,바실리우스가 주교직을 계승하였다. 그러자 발렌스 황제는 모데스투스 총독을 보내 바실리우스를 아리우스파로 끌어 들이려고 온갖 협박과 회유를 거듭했다. 이를 거절하자,총독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매질을 당하든지,귀양을 가서나 사형당하든지 그중 하나는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당시 바실리우스 주교가 한 말은 대단히 고무적이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몰수당할 재산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추방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이곳도 제집이 아닙니다. 귀하께서 저를 추방하시는 그곳이 바로 제 집이 될 것입니다.. 누가 저를 고문할 수 있을까요? 저는 너무 허약해서 한대만 맞아도 죽어 버릴 것입니다. 죽음은 저에게 은인입니다. 죽음은 저를 하느님께 더 빨리 데리고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무소유가 그에게 자유를 주었다. 오랫동안 간질환을 앓았고,엄한 금욕생활을 한 탓으로 마흔아홉 살에 이승을 떠났지만,친구가 되어 평생 우정을 나누었던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바실리우스가 죽었을 때 추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속옷 한 벌과 초라한 외투 한 벌로 사셨으며,맨땅에서 주무시고 밤새 기도하셨으며,목욕을 자제했습니다.. 그분의 음식은 빵과 소금이었습니다."
최상의 귀족계급이었던 바실리우스는 사제가 되기까지 '가난이 무엇인지'전혀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복음에 대한 민감한 응답 속에서 '가난한 이들의 참상과 부자들의 탐욕'을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루카 12,16-21, 내 곳간들을 헐어 내리라
예수는 이런 비유를 들었다. 어느 부자는 그해 소출이 많아지자 '더 큰 곳간을 지어 곡식과 재산을 모아 두어야지'생각한다. 그러자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리석은 자야,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하느님은 "악인에게나 성인에게나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하느님은 욕심쟁이가 경작한 땅에도 소나기를 내려 주시고,씨앗이 서서히 따뜻해져서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햇빛을 내려주신다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유익한 것이 하느님에게 나오는데,이 부자는 이기심으로 응답한다.
그는 공동소유인 자연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 하지 않았고,남는 것을 곤궁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곳간은 넘쳐나는 수확물로 터질 것 같은데도,구두쇠 같은 그의 마음은 여전히 만족할 줄 모른다. 부자는 그저 곳간이 작아서 "어떻게 한담?"고민한다. 바실리우스는 "그는 많이 가져서 비참해졌고,재산 때문에 불쌍해졌고, 여전히 더 많이 갖고 싶은 욕심 때문에 더 비참하고 불쌍해졌다."고 말한다. 그는 마치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탄식한다. 부자들도 이런 말을 한다. "어떻게 하지? 무엇을 먹지? 무엇을 입지?" 아주 괴로워한다.
바실리우스는 부자에게 "왜 그대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받았는지"스스로 물어보고,이렇게 말하면 어떤지 제안한다.
"어떻게 하지?..굶주린 사람들을 내가 배부르게 해 줄 테야,내 곳간 문을 열어젖히고 가난한 사람들을 모두 초대해야지. 인간을 상하는 요셉처럼 선언해야겠다. 자비로룬 목소리로 이렇게 외쳐야지.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이여.모두 나에게로 오시오. 공동우물에서 물을 긷듯이,인자하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모두들 나누어 가지시오."
바실리우스는 "낟알 하나가 땅에 떨어지면 씨 뿌린 사람을 위해 많은 결실을 맺는 것처럼,가난한 이들에게 준 빵은 나중에(죽을 운명에 있는 인간에게)많은 이익을 가져다 준다." 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대의 마지막 추수가 천국에서의 첫파종이 되게 하라."고 권한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죽을 때에 돈은 여기에 남겨 두어야 한다. 그래서 바실리우스는 이렇게 경고한다.
"인간의 불행을 사고파는 장사꾼이 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응징을 이익을 얻기 위한 기회로 이용하려 들지 마십시오. 이미 고통에 찌들 대로 찌든 사람들의 상처를 할퀴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대는 재물에 대한 관심뿐, 형제자매들에 대한 관심은 없습니다. 그대는 주화 표면의 새김을 보고서 진짜 주화와 가짜 주화는 구별할 줄 알면서 곤경에 빠진 이들을 그대의 형제자매들로 알아보지 못하고 완전히 무시합니다."
바실리우스는 이 부자가 곳간을 더 지으려고 마음먹은 순간에,'오늘 그는 자기 재산을 지키면서 동시에 더 많은 재산을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내일의 죄까지 짓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바실리우스는 "탐욕의 모든 창고를 헐어버리고,지붕을 허물어뜨리고,담벼락을 헐어 버리고,썩어가는 곡식을 햇빛에 내놓고,감옥에 갇혀 있던 재물을 끄집어내고,탐욕스런 당신의 음침한 창고를 때려 부수십시오."하고 말한다. 곳간을 갖고 싶다면 가난한 이들의 배 속에 곳간을 지으라 한다. 천국에 그대를 위한 보물을 쌓으라 한다.
부자는 가난하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두 번째 곳간을 채우고 나면,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주겠습니다." 참 얄팍한 계산이다. 바실리우스는 이런 부자에게 "이 약속은 미래에 주겠다는 맹세라기보다 현재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힐난한다. 그리고 "굶주린 이들이 죽어가고,헐벗은 이들이 얼어 죽고,빚진 이들이 숨을 쉴 수 없는데,그대는 자비 실천을 내일까지 미룰 것입니까?"하고 묻는다. "네 이웃에게 '갔다가 다시 올게,내일 줄 테니'하지 마라."(잠언 3,28)는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다.
"내가 내 재산을 갖고 있다고 해서,그것이 왜 누군가를 부당하게 취급하는 것입니까?"라고 항의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바실리우스는 "그대는 빈손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빈손으로 다시 흙으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물으며 "만일 그대가 그 재산을 하느님에게 받았다는 그것들을 받았는지 나에게 말해 보라."고 되묻는다. 바실리우스는 부자들에게 '청지기'직분을 요구하며,"청지기로서 위탁받은 것을 그대의 소유물로 여긴다면,그대는 탐욕스러운 사람이며 강도가 아닙니까?"하고 묻는다.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힐 수 있는데도 입히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달리 부를 수 있습니까? 그대가 숨겨 둔 그 빵은 굶주린 이들이 먹어야 할 빵이며,그대의 옷장에 처박아 놓은 옷은 헐벗은 사람들이 입어야 할 옷입니다. 그대의 신발장에서 썩고 있는 신발은 맨발로 다니는 이들이 신어야 할 신이고,그대의 금고에 숨겨 둔 돈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살아야 할 돈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많이 도와줄 수 있는데도 도와주지 않는 것은 그대가 그만큼 그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바실리우스는 심판 때에 "그대의 부가 그대를 위한 몸값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한다. 심판 날에 주님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생각한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다."(마태 25,34-36)
그러나 다음과 같은 판결문을 듣는다면,그대를 둘러싼 전율과 불안과 어둠이 참으로 클 것이라고 경고한다.
"저주받은 자들아,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다."(마태 25,41-43)
이 구절에서 예수님에게 꾸짖음을 듣는 사람들은 무엇을 훔친 사람들이 아니라,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않은 사람들이다.
마태 19,16-22, 부자에 관한 강해
두번째는 부자청년에 관한 이야기다. 그 청년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물었다. 그 청년은 모세율법이 가르치는 계명을 다 지켜왔다고 했다. 부족한 게 있는지 묻자,예수님은 그 유명한 말을 던진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그러자,그 청년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나갔다. 그는 소유한 많은 재물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실리우스는 '영원한 생명'에 관심을 갖는 청년의 선한 의도를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청년은 정작 참스승으로부터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배우고서도,마음에 새기지도 실천하려고도 하지 않았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에게도 던지는 당혹스러운 질문이다. "그대는 그분을 '스승님'이라고 부르고서는 제자로서의 의무를 실천하지 않는군요?그대는 그분을 선하신 분이라고 부르고서는 그분이 하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군요?"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물었지만, 정작 우리 자신을 이 세상의 즐거움에 완전히 얽매어 있다는 것이다.
이 청년은 비록 살인한 적도,간음한 적도,도둑질한 적도,거짓증언을 한 적도 없지만,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았다. 바실리우스는 만일 청년이 사랑의 계명을 줄곧 지켜 왔다면,그렇게 많은 재산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가난한 이들을 돌보려면 돈을 지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웃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는다.
"그대한테 재산이 많으면 많을수록,그대의 사랑 실천은 그만큼 부족합니다... 그대가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었다면,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면,모든 낯선 이들에게 대문을 활짝 열었다면,고아들에게 부모가 되어 주었다면,모든 절망하는 이들의 고통을 그대 자신의 고통으로 여겼다면 무슨 돈이 그대에게 남아 있을 수 있으며,돈을 잃어버렸다고 슬퍼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리면,우리는 어떻게 삽니까?" 항변한다. 그러나 바실리우스는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하지 않았다. 필요 이상의 것을 나누라고 했다. 바실리우스는 말 한 필을 사기 위해서 돈을 쓸 때는 슬퍼하는 사람을 문제 삼는다. 이런 사람들은 금으로 장식되어 있다면 수갑을 차고 다니는 것과 마다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그들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기뻐할 줄 모르고,아직 갖지 못한 것 때문에 슬퍼한다. 저승이 결코 "충분하다."라는말을 하지 않듯(잠언 20,16),탐욕스러운 사람도 결코 "충분하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바다는 경계를 알고,밤은 옛날부터 정해진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데,그들은 한계를 존중할 줄 모른다.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 한다.
바실리우스는 이들에게 "불의한 일에서 잠시 벗어나 여유를 갖고,그대가 추구했던 물질적인 것들이 그대를 어떤 종착지로 이끌었는지"깊이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결국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단지 한 길짜리 작은 땅이며,흙과 돌 조금이면 그대의 죽은 몸을 충분히 덮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대의 그 수고는 단지 헛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지옥)불의 땔감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니 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라고 다그친다.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봐도,그대는 그대가 저지른 악행만 보게 될 것입니다. 이쪽은 고아들의 눈물,저쪽은 과부들의 한숨,또 다른 쪽은 그대가 짓밟은 가난한 이들,그대가 짐승처럼 다룬 노예들,그대가 무자비하게 다룬 이웃,그대의 모든 악행이 그대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대의 악한 행위가 합창단이 되어 그대를 사방에서 옭아맬 것입니다."
이 말을 전하면서,바실리우스는 "이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듣고도 그대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이처럼 생생하게 묘사했는데도 그대가 설득당하지 않는다면,그대의 마음은 돌덩어리가 분명합니다."라고 안타까워한다.
사랑의 도시,바실리아드
368년 카파도키아에 극심한 가뭄이 닥치자,사제였던 바실리우스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양식을 사기 위해 유산을 모두 팔아 무료급식소를 열었다. 주교가 된 뒤에는 카이사리아 외곽에 사회복지 복합건물인 '바실리아드'를 건설했다. 바실리아드는 여행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숙소이자 병자들을 위한 병원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바실리우스 주교는 허리에 앞치마를 두른 채 가난한 이들을 접대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이 보호하는 이들의 영혼을 돌보았다. 이것을 보고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제가 볼 때,바실리우스가 한 일은.. 구원에 이르는 지름길,천국으로 올라가는 가장 쉬운 길입니다.. 사회 지도자들까지도 서로 경쟁하듯이 자선과 관대함을 다투어 실청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리사와 휘황찬란한 식탁,사람을 혹하게 하는 최고급 요리,멋들어진 마차,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의복에만 온통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바실리우스의 관심사는 오직 병자들을 치료하고 상처를 낫게 해 주고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나병환자들을 깨끗이 씻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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