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감나무와 옻나무/손남주

모든 2 2018. 4. 12. 00:39



감나무와 옻나무/손남주

  

밭둑위에 감나무들이 서있고

그 아래, 문지기처럼 두어 그루 옻나무가

어둑하게 버티고 있는 산골마을,

천둥소리 같은 포성이 들려오는 먼 하늘로

감나무들은 멍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치열한 낙동강 최후의 전선에서

어린 학도병들이 수없이 쓰러져갈 때도

이곳 산골마을 감나무의 감은 발갛게 익어갔다

풋감의 유혹에 소년은 날마다 감나무 등줄기를 오르내리고

옻나무는 퍼렇게 약 오른 손으로 그의 종아리를 휘어잡았다

 

소문대로 올 것이 왔다

20여 가구가 사는 이 마을에

- 의용군 2명 차출- 대상자 4명은

이장 댁 마당에서 제비를 뽑았다

도끼눈으로 째려보던 인민위원회 서기는

나를 제비뽑기에서 제외시켰다

“옻이 올라 뚱뚱 부은 장딴지로

엉금엉금 기는 놈은 성전 참가자격이 없다”고 했다.

아슬아슬하게 피해간 내 운명은

감나무와 옻나무 사이에서 묵계처럼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남은 세 사람 중

읍내 중학교를 다니던 친구는 x를 짚었고

o를 짚은 건, 이상하게도 둘 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불운한 친구였다

그들은 그날 밤 일선으로 끌려갔다

 

전세 불리하던 인민군들이 후퇴하기 시작할 무렵

Z기 기총소사로 대오가 흐트러지는 틈을 타서

한 친구는 용케도 빠져 돌아왔지만

기약 없는 60여 년이 흘러간 지금까지, 한 친구는

생사를 알지 못한 채 영영 무소식이다

 

아찔하게 피해간 내 요행 뒤에는

언제나 나대신 그가 갔다는 죄책감이

평생을 가슴 한켠에 숨었다가

그 친구의 수굿한 얼굴과 함께 문득문득 살아나곤 한다

 

지난여름 모처럼 찾아가 둘러본 고향,

감나무와 옻나무는 온제간데 없고

그 자리엔 누군가의 별장이 들어서서

기나긴 세월을 깔고 앉아 뭉개고 있었다

 

-동인지 《餘白集》26호 (여백문학회, 2016)-




  제 도종환의 시 <여백>을 송고하고서 막 배달된 우편물들을 확인하는데, 그 중에 <여백집>이란 동인지가 섞여 있었다. 여백 동인은 1991년 ‘대구경북노인문학회’란 이름으로 결성되어 중간에 ‘여백문학회’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까지 26년을 이어오고 있다. 창간 당시 초대 회장인 전상렬 시인을 비롯해 창립회원은 모두 작고하셨다. 지금은 최춘해 아동문학가께서 회장을 맡아 견일영, 공진영, 김상문, 손남주, 정추식, 정휘창, 최경호 등 8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올해 구순인 정휘창 선생을 필두로 다들 80을 훌쩍 넘기신 명실공한 이 지역의 원로들이시며 또 과거 교직에 몸을 담았던 분들이시다.

 

  손남주 시인은 시운동 계간지 <시와시와>의 초대 주간을 맡아 현재 13호가 발행된 이 잡지의 초석을 놓으신 분이다. 평소 존경하던 분으로 나와는 인연의 골이 깊다. 이번 <여백>에 발표된 10편의 시를 보고 어찌나 반갑든지 깜짝 놀랐다. 여백의 삶을 사시는 원로의 간단한 여적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여전히 젊은이 못지않은 왕성한 열정과 패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감나무와 옻나무’는 한국전쟁 당시 고향인 예천에서 실제 겪은 일을 소재로 한 자전적 산문시다. 먼 과거의 운명적 사건을 빌어 현재화한 작품으로 ‘기나긴 세월’동안 누구나 겪고 또 겪을 수 있는,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숙명도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운다.

 

  ‘운명의 갈림길’이라고 흔히 말한다. ‘운명의 호작질’이라고도 했다. 39년 전 그날 그 순간 간발의 차이로 그 기차를 놓치지만 않았더라도 그 여인을 만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근심덩어리 두 아들 녀석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다니던 국책은행 잘 다니다가 이사까지는 몰라도 부장은 해먹고 지금쯤 탱자탱자 연금생활자가 되어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이 이렇게 꼬이지는 않았으리라. 19년 전 그날 시를 쓴다는 그 여성의 권유에 못 이겨 그 시낭송회란 모임에 가지만 않았더라도 어정쩡한 시인의 이름으로 한심하게 18년을 살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 또 어쩌면 다른 고약한 운명의 호작질로 이미 이 세상에 없을지도, 지금보다 더 형편없이 굴러먹으며 살아갈 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그때 그 시낭송회에 참석하지 않았더라면 손남주 시인을 만날 일도, 멍에 같은 <시와시와>를 짊어지고 이렇게 낑낑대는 생으로까지 연결되지는 않았으리라. 시문학 운동이 무슨 독립운동 하는 것도 아닌데, 거룩한 민족자강운동이나 되는 것처럼 ‘시운동’을 표방하며 지난 12월 겨울호로 13번째 책을 냈다. 그동안 곡절이 왜 없었을까. 두어 번 빼먹기도 하고 가끔은 실수도 했다. 더러는 곱지 않은 시선도 받았다. 그러면서도 오늘 저녁 그 <시와시와> 13호의 출판을 자축하는 ‘시낭송회’를 ‘시인보호구역’이란 곳에 마련하였다. 어제는 지역의 매일신문신춘문예 시상식이 있었고 내일은 영남일보문학상 시상식이 있다. 오늘 소소한 시와시와 출판기념회에서는 또 어떤 지랄 맞은 운명을 만나게 될지 심히 걱정된다.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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