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5년 주보

사순 제2주일 2015.3.1일(나해)

모든 2 2015. 3. 1. 22:00

 

솔뫼성지/수채화

안종찬 바오로/한국영상대학교 교수

 

 

+ 마르코 복음. 9,2-10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말씀의 향기>

 

우리의 목적지는 희망입니다  -양웅석 필립보 천안봉명동 보좌

 

  우리가 어떤 곳으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목적과 방향이 정확하지 않다면 우리는 가고자 하는 곳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건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사순 제2주일을 맞이하면서 듣게 되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은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유대 묵시문학의 관점에서 볼 때,흰옷은 세상의 끝에서 천상의 존재들이 입는 옷입니다. 곧 종말론적 세상에서 완성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그 모습은 그것을 목격한 제자들과 또한 지금 여기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우리가 다다라야 할 부활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곧,사순시기를 보내며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인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부활의 모습을 미리 목격했다는 것,이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희망의 확신이 됩니다. 인간은 희망없이 결코 살수 없습니다. 우리 구원의 희망에 대한 확신이 바로 이 부활이고, 이 변모 사건으로 인해 우리의 희망은 그것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확신시켜 줍니다. 희망은 인간을 하느님 앞으로 더욱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고 희망을 통해 인간은 구원됩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갖게 되는 희망은 이 세상이 주는 희망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소피의 세계'로 유명한 저자인 요슈타인 가아더가 쓴 다른 책 "오랜지 소녀'를 보면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아들이 철이 들 무렵 읽을 수 있도록 편지를 준비하고,그 편지를 통해 아들에게 여러 가지 것들을 가르쳐줍니다. 그  안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 있을 리 없는 것들을 부르는 고유한 이름이 있는데,그것의 이름은 바로 희망이다." 물론 이는 세상을 비관적으로 가르치는 말이 아닙니다. 있을 리 없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더 소중하고,그래서 더욱더 그것을 찾아가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이 세상 안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희망의 모습입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희망을 우리는 신앙 안에서 갖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오늘 사도들은 산에 올라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신 그 모습을 목격하였습니다. 우리 역시도 지금 사순이라는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이 사순이라는 산의 정상에 바로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인 부활이 그리고 그러한 부활을 보여주시는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회개와 은총의 시기라는 이 사순시기를 보내면서,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의 삶이라는 바다 안에서 등대가 되고 등불이 됨을 기억하시면서 이번 한 주간 기쁘게 생활하실 수 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아멘

 

  희망을 바라보며 시작하는 사순시기

 

 

사목지표 다시보기(9)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고 참여함-대전교구사목기획국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은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 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 유익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2티모,3,15-17)

 

  "저는 모든 공동체가 '시대의 징표'를 주이 깊게 살피도록 권고합니다. 사실,이것은 중대한 책임입니다. 오늘 날의 현실들 가운데 일부는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돌이키기 어려운 비인간화의 과정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복음의 기쁨」,51항)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는 본당 소공동체는 그 자체가 신앙의 목적이거나 최종 목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공동체로 부르신 뒤,다시 그들을 세상으로 파견하셨다. 주님께서 사람들을 공동체로 부르신 까닭은 공동체 안에서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만나고 인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분의 뜻을 공동체와 함께 식별하고 참여하게 하는 데 있다.

 

  따라서 교회의 구성원들은 단순히 자신들 앞에 놓인 내면 문제와 삶의 문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파견되어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참여하고 투신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이를 위하여 다음의 제언을 함께 고민해 보자.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에서 제시하는 온 인류와 깊이 결합된 세상 속의 교회로서 세상의 '기쁨과 희망'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시대의 징표와 복음적 정의를 식별하고 참여하도록 하려는 프로그램들도 계속 마련되고 제공되어야 한다.

 

  특별히 소공동체의 '복음나누기'가 조금만 더 우리 자신의 개인 문제를 뛰어넘어,삶의 자리의 모든 면을 복음으로 식별하고 그 징의를 실현하는 데 참여하며 이끌어 주길 기대해 본다.

 

2) 우리 교구의 '복음(말씀)살아가기'가 하느님 백성 앞에 놓인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도록,곧 지역 사회의 경제,문화,정치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복음의 빛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신자들에게 안내할 수 있어야 하겠다. 

 

  사실 이것은 중요한 우리의 과제이다. 교구나 본당에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여정 안에서 성찰하고 식별 할 수 있는 공동체 프로그램들이 정기적으로 제공될 수 있다면,시대성과 현장성을 살리고 하느님 백성들이 더욱 생생하게 나눔에 참여하는 풍요로운 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3) 마지막으로 소동체는 복음을 나누면서 구성원들이 단지 식별이나 토론만 나누는 모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서라도 복음나누기로 본당 공동체가 삶의 자리를 늘 살피면서,모든 기도와 활동에 앞서 말씀을 '먼저'정하고 새긴 뒤,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계획을 세워 실행해 보자.

 

  이제 지금까지의 글들을 마무리하며,다시금 우리 교구 공동체 안에서 사목지표를 통해 다음을 지향해 볼 것을 바라며 마치겠다.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는 해' 안에서 대전교구 하느님 백성들이 하느님 말씀을 이해하고 맛 들이며,공동체 안에서 말씀과 삶을 나눔으로써 친교와 일치를 이루고 성장하며,마침내 교회 공동체가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고 복음적 사명을 실천하며 살아가길 기대해본다.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51)> 

 

 

내 사랑 편자씨

 

  난생 처음으로 말 농장을 일곱 살짜리 꼬마 선혜.마구간 옆을 지나는데 말발굽에 편차를 박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궁금한 듯 아빠에게 질문을 합니다.

 

  선혜:아빠,저게 뭐야?

  아빠:너도 밖에 나가려면 신발 신지?

  선혜:응..안 신으면 발바닥 아파.

  아빠:말도 달리려면 신발 신어야 돼.

  선혜:그럼 말들은 다 신발 시는 거야?

  아빠:아니,경주요 말이나 사람 태우는 말만 그래.

  선혜:이왕이면 예쁘고 튼튼한 신발이면 좋겠다!

 

  선혜는 자신의 신발과 말발굽의 편자를 번갈아 보았습니다. 아빠는 그런 선혜를 바라보며 무릎을 굽혀 딸의 예쁜 운동화의 끈을 단단하게 매어 주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지금 어떤 '편자'를 신고 계신가요?

발바닥에 땀나도록 달리며 살아야 하는 무한 경쟁의 인생트랙을 돌면서 설마 맨발인 건 아니시겠죠? 두려울 것 없는 젊은 시절엔 그야말로 '맨발의 청춘'이었지만 이젠 절대로 맨발로 세상에 나서는 법은 없습니다.

 

  자연에서 살아가는 야생마들은 편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발굽이 닳도록 돌아다녀햐 할 피요도,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심장이 터지도록  달려야 할 일도 없기 때문이죠. 적당히 움직이고 적당히 달리며 적당히 쉬는 말들에겐 맨발이 최고의 신발입니다.

 

  '편자'가 행운의 상징으로 거래된다는 걸 얼마 전 텔레비젼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경마시합에서 우승한 말들의 편자가 인기라더군요. 대학입시나 중요한 시험을 치러야 하는 사람들에게 말발굽 모양의 '편자'는 용기와 힘이 되어 주나 봅니다.

 

  새삼 제 발을 바라봅니다. 지금까지살아오면서 수없이 제 '편자'가 되어 준 고마운 사람들이 얼굴이 떠오릅니다. 겁도 없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좌충우돌 하면서 달려야 했던 제가 쓰러지지 않는 건 모두 그분들 덕입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내 사랑 '편자'씨...

 

  그중에서도 십자가에 매달려 우리 신발을 품에 안고 계시다 내어 주시는 그분이 최고의 '편자'씨입니다.

 

 

  -이충무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주님의 빛으로

우리의 영혼 일깨워

밝고 맑고

투명한 삶으로

거듭 나겠습니다.

 

글.그림 이순구 (베네딕도)

 

 

 

 

歸去來辭(귀거래사)  - 도연명 (陶淵明) -

 

돌아가자

논밭떼기 묵어가는데,

내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내 본디 마음이 이제야

내 몸의 부름을 받게 되었으니,

어찌 근심하며 슬퍼할 것 있으랴!

 

지난 날들 뉘우쳐도 고쳐질 수 없으니,

이제부터라도 더 그르치는 일은 없으리라,

 

길 한번 잘못 들어 어긋나긴 했어도,

그리 멀어진 것도 아니니,

이제부터가 올바름이오,

어제까지는 글렀음을 지금에야 알았노라.

 

배는 가볍게 흩날리며 흔들리고,

바람도 소소히 옷자락을 날리고 있으메,

나그네에 앞길 물어물어 돌아와 보니,

희미한 새벽빛마저 원망스럽구나.

 

집 가까이 처마 끝은 보이고,

가뿐 마음안고 한걸음에 내 집 찾아드니,

일꾼들은 반가이 마중 나오고,

어린 아들 문간에서 날 기다리고 있네그려.

 

앞뜰 작은 길섶엔 잡초만 무성한데,

솔이며 국화는 옛 그대로 일세.

 

어린 아들 앞세워 방안에 들어서니,

술 한 동이 가득 차 있고,

술동이 잔을 당겨 쭉 한잔 걸치며,

앞뜰의 나뭇가지 내려다보니,

얼굴엔 환한 기쁨 가득 차는구나.

 

남쪽 창에 기대어 멋대로 앉아보니,

작은 방이네만 편하기만 할세그려.

 

날마다 거닐던 뜰섶은

언제나 아취 있는 풍치인데,

쪽문은 낡았어도,

닫힌 채 그대로다.

 

지팡이에 몸을 맡겨

아무데서나 마음대로 쉬고,

때로는 높이 머리를 들어,

자유로이 사방을 휘둘러본다네.

 

흰 구름이 산골짝을 돌아 나오고,

날다가 지친 새는 돌아올 줄 아는구나.

 

햇볕은 엷은 어스름에 가리어,

서서히 서쪽으로 기우는데,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나 혼자 그주위를 맴돌고 있네그려.

 

돌아가야지!

 

오직 바라는 건,

사귐도 그치고 어울려 노는 것도 멈추며,

세상일 모두 다 잊는 걸세.

 

다시 벼슬수레에 올라 무엇을 바라랴.

 

정겨운 이웃 이야기 즐겨 듣고,

풍악과 글귀나 즐기면서,

세상 근심 모두 삭혀 내리라.

 

농부가 나에게 봄을 알리면,

서쪽 밭에 나가 일을 하다가,

 

때때로 수레 타고 때때로 배를 저어,

꼬불꼬불 깊은 골짜기 찾아다니며,

 

높고 낮은 오르막 언덕을 지나,

산수의 경치를 즐겨볼 걸세.

 

물오른 나무는 꽃망울 부풀리고,

샘물 퐁퐁 솟아 넘쳐흐르며,

 

만물은 대를 맞나 즐거움뿐인데,

갈수록 내 생명만 저무는구나.

 

모두 다 제 곳을 찾아가는데,

얼마나 난 이 세상에 남아 있을꼬.

 

얼마 남지 않은 이 인생을,

어찌하여 머물음에 마음을 맡겨,

자연에 따르려 하지 않았던가!

 

어디를 그렇게 서둘러 가려했던가!

 

부귀조차 내가 원하는바 아니었고,

신선의 나라, 더욱 바랄 수도 없었던 것.

 

좋은 시절 알아서 스스로 오가는데,

지팡이 기대어 김매고 흙 돋우며,

언덕에 올라 노래 부르고,

시냇가에 앉아 시를 읊네그려.

 

사는 동안 자연의 조화를 따르다,

마침내 돌아가면 되는 것을 ....

 

천명을 즐겼으면 그만이지,

또 무엇을 의심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