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그리고 시

여름비/정일근

모든 2 2017. 3. 16. 11:55





 여름비/정일근

 

   은현리 대숲이 비에 젖는다

   책상 위에 놓아둔 잉크병에

   녹색 잉크가 그득해진다

   죽죽 죽죽죽 여름비는 내리고

   비에 젖는 대나무들

   몸의 마디가 다 보인다

   사랑은 건너가는 것이다

   나도 건너가지 못해

   내 몸에 남은 마디가 있다

   젖는 모든 것들

   제 몸의 상처 감추지 못하는 날

   만년필에 녹색 잉크를 채워 넣는다

   오랫동안 보내지 못한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사람

   푸른 첫줄 뜨겁게 적어놓고

   내 마음 오래 비에 젖는다

 

   -시집『나에게 사랑이란』(시선사,2007)





비/정일근


오랜 가뭄 끝에 듣는 즐거운 빗소리

소리에도 樂이 있어,오동 넓은 잎에 푸른 웃음이

어린 새우마냥 톡톡 튀며 달아난다

나이 마흔 가까워서야 귀는 바늘귀만큼씩 열리고

극락암 삼소굴 추녀의 모난 각들이 땅으로 떨어지며

둥글게 풀어지는 화음 듣는다

그 화음에 말린 잎들 환하게 펴지는 소리

자연이 착한 혀를 또르르르 풀며

화답하는 소리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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