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그리고 시

역대 소월시 문학상 수상작

모든 2 2014. 10. 30. 23:47

 

 

제28회 유홍준 '북천-까마귀' 2013

제27회 이재무 '길위의 식사' 2012

제26회  배한봉 '복사꽃아래 천년 외' 2011

 

제25회  송재학'공중 외' 2010

제24회  박형준'가슴의 환한 고동외에는 외' 2009

제23회  정끝별'크나큰 잠 외'   2008

제22회  나희덕 '섶섬이 보이는 방 외' 2007

제21회  문태준 '그맘때에는 외' 2006

 

제20회  박주택'시간의 동공 외' 2005

제19회  박정대'아무르 강가에서' 

제18회  정일근'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외'

제17회  이문재 '지구의 가을 외'

제16회  고재종'백련사 동백숲길에서 외'

 

제15회  김혜순 "잘익은 사과 외'

제14회  김정란 "사랑으로 나는외" 

제13회  안도현 "고래를 기다리며 외"

제12회  김용택 "사람들은 왜 모를까 외"

제11회  문정희 "키 큰 남자를 보면 외"

 

제10회  천양희 "단추를 채우면서 외"

제 9회   임영조 "고도를 위하여 외"

제 8회   황지우 "뼈아픈 후회 외"

제 7회   김명인 "화엄에 오르다 외"

제 6회   조정권 "산정 묘지 외"

 

제 5회   김승희 "떠도는 환유 외"

제 4회   이성복 "숨길 수 없는 노래 외"

제 3회   정호승 '임진강에서 외'

제 2회   송수권 '우리나라의 술과 새들 외'

제 1회   오세영 '그릇1 외' ----1987년

 

 

천-까마귀   /유홍준---28회

 

어제 앉은 데 오늘도 앉아 있다
지푸라기가 흩어져 있고 바람이 날아다니고
계속해서
무얼 더 먹을 게 있는지,
새카만 놈이 새카만 놈을 엎치락뒤치락 쫓아내며 쪼고 있다
전봇대는 일렬로 늘어서 있고 차들은 휑하니 지나가고
내용도 없이
나는 어제 걸었던 들길을 걸어나간다
사랑도 없이 싸움도 없이, 까마귀야 너처럼 까만 외투를 입은 나는 오늘 하루를 보낸다
원인도 없이 내용도 없이 저 들길 끝까지 갔다가 온다

 

 

길위의 식사/ 이재무 ---27회

 

사발에 담긴 둥글고 따뜻한 밥 아니라

비닐 속에 든 각진 찬밥이다.

둘러 앉아 도란도란 함께 먹는 밥 아니라

가축이 사료를 삼키듯

선채로 혼자서 허겁지겁 먹는 밥이다.

고수레도 아닌데 길 위에 밥알 흘리기도 하며 먹는 밥이다.

반찬없이 국물 없이 목메게 먹는 밥이다.

울컥 몸 안쪽에서 비릿한 설움 치밀어 올라오는 밥이다.

피가 도는 밥이 아니라 으스스,몸에 한기가 드는 밥이다.

 

 

복사꽃 아래 천년 / 배한봉---26회

 

봄날 나무 아래 벗어둔 신발 속에 꽃잎이 쌓였다. 

쌓인 꽃잎 속에서 꽃 먹은 어린 여자 아이가 걸어 나오고,

머리에 하얀 명주 수건 두른 젊은 어머니가 걸어 나오고,

허리 꼬부장한 할머니가 지팡이도 없이 걸어 나왔다.

봄날 꽃나무에 기댄 파란 하늘이 소금쟁이 지나간 자리처럼 파문지고 있었다.

채울수록 가득 비는 꽃 지는 나무 아래의 허공,

손가락으로 울컥거리는 목을 누르며,

나는 한 우주가 가만가만 숨 쉬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장 아름다이 자기를 버려 시간과 공간을 얻는 꽃들의 길,

차마 벗어둔 신발 신을 수 없었다.

천년을 걸어가는 꽃잎도 있었다.

나도 가만가만 천년을 걸어가는 사랑이 되고 싶었다.

한 우주가 되고 싶었다.

 

 

     공중 /송재학 ---25회

 

허공이라 생각했다 색이 없다고 믿었다 빈 곳에서 온 곤줄박이 한 마리 창가에 와서 앉았다 할딱거리고 있다 비 젖어 바들바들 떨고 있다 내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허공이라 가끔 연약하구나 회색 깃털과 더불어 뒷목과 배는 갈색이다 검은 부리와 흰 뺨의 영혼이다 공중에서 묻혀온, 공중이 묻혀준 색깔이라 생각했다 깃털의 문양이 보호색이니까 그건 허공의 입김이라 생각했다 박새는 갈필을 따라 날아다니다가 내 창가에서 허공의 날숨을 내고 있다 허공의 색을 찾아보려면 새의 숫자를 셈하면 되겠다 허공은 아마도 추상파의 쥐수염 붓을 가졌을 것이다 일몰 무렵 평사낙안의 발묵이 번진다 짐작하자면 공중의 소리 일가(一家)들은 모든 새의 울음에 나누어 서식하고 있을 게다 공중이 텅 비어 보이는 것도 색 일가(一家)들이 모든 새의 깃털로 바빴기 때문이다 희고 바래긴 했지만 낮달도 선염법(渲染法)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공중이 비워지면서 허공을 실천중이라면, 허공에는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들이 있다 바람결 따라 허공 한 줌 움켜쥐자 내 손바닥을 칠갑하는 색깔들, 오늘 공중의 안감을 보고 만졌다 공중의 문명이라 곤줄박이의 개체수이다 새점을 배워야겠다 
 


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 박형준 ---24회

 

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들려줄 게 없는
봄 저녁
나는 바람 냄새 나는 머리칼
거리를 질주하는 짐승
짐승 속에 살아 있는 영혼
그늘 속에서 피우는
회양목의 작은 노란 꽃망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꺼풀에 올려논 지구가 물방울 속에서
내 발밑으로 꺼져가는데
하루만 지나도 눈물 냄새는 얼마나 지독한지
우리는 무사했고 꿈속에서도 무사한 거리
질주하는
내 발 밑으로 초록의 은밀한 추억들이
자꾸 꺼져가는데 

 



크나큰 잠 / 정끝별 ---23회

 

한 자리 본 것처럼
깜빡 한 여기를 놓으며
신호등에 선 목이 꽃대궁처럼 꺾일 때
사르르 눈꺼풀이 읽던 행간을 다시 읽을 때

봄을 놓고 가을을 놓고 저녁마저 놓은 채
갓 구운 빵의 벼랑으로 뛰어들곤 해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사과 냄새 따스한
소파의 속살 혹은 호밀빵의 향기
출구처럼 다른 계절과 다른 바람과 노래

매일 아침 길에서 길을 들어설 때
매일 저녁 사랑에서 사랑을 떠나보낼 때
하품도 없이 썰물 지듯
깜빡깜빡 빠져나가는 늘 오늘

깜빡 한 소식처럼
한 지금을 깜빡 놓을 때마다
한 입씩 베어먹는 저 큰 잠을 향해
얼마나 자주 둥근 입술을 벌리고만 싶은가

벼락치듯 덮치는 잠이 삶을 살게 하나니
부드러워라 두 입술이 불고 있는 아침 기적
영혼의 발끝까지 들어올리는 달콤한 숨결
내겐 늘 한 밤이 있으니
한 밤에는 저리 푹신한 늘 오늘이 있으니



 

섶섬이 보이는 방-이중섭의 방에 와서 / 나희덕 --22회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데기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데기를 그릇 삼아 상을 차리던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 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처럼

 

그맘때에는/문태준(21) 

 

하늘에 잠자리가 사라졌다빈손이다하루를 만지작만지작 하였다두 눈을 살며시 또 떠 보았다빈손이로다완고한 비석 옆을 지나가 보았다무른 나는 금강金剛이라는 말을 모른다그맘때가 올 것이다, 잠자리가 하늘에서 사라지듯그맘때에는 나도 이곳서 사르르 풀려날 것이니어디로 갔을까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후두둑 후두둑 풀잎에 내려앉던 그들은



시간의 동공/박주택(20)


이제 남은 것들은 자신으로 돌아가고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만 바다를 그리워한다백사장을 뛰어가는 흰말 한 마리아주 먼 곳으로부터 걸어온 별들이 그 위를 비추면창백한 호흡을 멈춘 새들만이 나뭇가지에서 날개를 쉰다곷들이 어둠을 물리칠 때 스스럼 없는파도만이 욱신거림을 넘어간다만리포 혹은 더 많은 높이에서 자신의 곡조를 힘없이받아들이는 발자국, 가는 핏줄 속으로 잦아드는금잔화, 생이 길쭉길쭉하게 자라 있어언제든 배반할 수 있는 시간의 동공들때때로 우리들은 자신 안에 너무 많은 자신을 가두고북적거리고 있는 자신 때문에 잠이 휘다니,기억의 풍금 소리도 얇은 무늬의 떫은 목청도저문 잔등에 서리는 소금기에 낯이 뜨겁다니,갈기털을 휘날리며 백사장을 뛰어가는 흰말 한 마리꽃들이 허리에서 긴 혁대를 끌러 바람의 등을 후려칠 때그 숨결에 일어서는 자정의 달곧이어 어디선가 제집을 찾아가는 개 한 마리먼 곳으로부터 걸어온 별을 토하며어슬렁어슬렁 떫은 잠 속을 걸어 들어간다

 

 

아무르 강가에서/박정대(19) 

 

그대 떠난 강가에서나 노을처럼 한참을 저물었습니다초저녁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낮이밤으로 몸 바꾸는 그 아득한 시간의 경계를유목민처럼 오래 서성거렸습니다 그리움의 국경 그 허술한 말뚝을 넘어 반성도 없이민가의 불빛들 또 함부로 일렁이며 돋아나고 발밑으로는어둠이 조금씩 밀려와 채이고 있었습니다, 발밑의 어둠내 머리 위의 어둠, 내 늑골에 첩첩이 쌓여 있는 어둠내 몸에 불을 밝혀 스스로 한 그루 촛불나무로 타오르고 싶었습니다 그대 떠난 강가에서그렇게 한참을 타오르다 보면 내 안의 돌멩이 하나뜨겁게 달구어져 끝내는 내가 바라보는 어둠 속에한 떨기 초저녁별로 피어날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초저녁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야광나무 꽃잎들만 하얗게 돋아나던 이 지상의 저녁정암사 적멸보궁 같은 한 채의 추억을 간직한 채나 오래도록 아무르 강변을 서성거렸습니다별빛을 향해 걷다가 어느덧 한 떨기 초저녁별로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아무르강 - 러시와와 중국, 몽골 등 3개국의 국경을 거치는 강 정암사 - 강원도 정성군 사북면 고한리 적멸보궁-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모신 곳이므로 불상을 모시지 않으며 이러한 성지를 보궁이라 일컫는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영축산 통도사,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에는 신라의 승려 자장(590~658)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정골등이 모셔져 있다.​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정일근(18)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먹고 싶다.

 

지구의 가을/이문재(17)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공양을 받습니다 *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나는 두려워 헤아리지 못합니다

마음의 눈 크게 뜨면 뜰수록

이 눈부신 음식들

육신을 지탱하는 독으로 보입니다

 

하루 세번 식탁을 마주할 때마다

내 몸 속에 들어와 고이는

인간의 성분을 헤아려 보는데

어머니 지구가 굳이 우리 인간만을

편애해야 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주를 먹고 자란 쌀 한 톨이

내 몸을 거쳐 다시 우주로 돌아가는

커다란 원이 보입니다

내 몸과 마음 깨끗해야

저 쌀 한 톨 제자리로 돌아갈 터인데

 

저 커다란 원이 내 몸에 들어와

툭툭 끊기고 있습니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린다 해도

이 음식으로 이룩한 깨달음은

결코 깨달음이 아닙니다

 

* 지리산 실상사 공양간(식당)배식대 앞에 붙어 있는 공양게송이다.   인용하면서 '보리'를 '깨달음'이라고 바꾸었​다.

 

 

백련사 동백숲길에서/고재종(16)

 

누이야, 네 초롱한 말처럼

네 딛는 발자국마다에

시방 동백꽃 송이송이 벙그는가

시린 바람에 네 볼은

이미 붉어 있구나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 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꽃부리와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박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은물결로든

그예 씻어 보겠다는 나인가

이윽고 저렇게 저렇게

절에선 저녁종을 울려대면

너와 나는 쇠든 영혼 일깨워선

서로의 無明(무명)을 들여다보고

동백꽃은 피고 지는가

동백꽃은 여전히 피고 지고

누이야, 그러면 너와 나는

수천 수만 동백꽃 등을 밝히고

이 저녁, 이 뜨건 상처의 길을

한번쯤 걸어 보긴 걸어 볼 참인가

 

 

     잘 익은 사과/김혜순(15)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사랑으로 나는/김정란(14)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았던 매미 날개와 매미 날개에 머무는 햇살과 그 햇살의 순간의 예민한 망설임들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지 못했던 오로라와 그 오로라가 우주 먼 곳 태어나지 않은 역사와 맺는 관계를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내 내장 깊은 곳까지 박힌 칼들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언젠가 그 칼들이 나를 더 이상 아프게 하지 못한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죽어가는 세계의 모든 생명들과 이제 막 태어나는 어린 생명들과 하나가 되고 싶다.  될 것이라고 믿는다.  될 것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이며 너이며 그들이다.  사랑으로 나는 중심이며 주변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의 노예이며 주인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를 세계의 상처 위에 겸손하게 포개 놓는다.  세계, 나의 아들이며 나의 지아비인 세계의 상처위에.  나처럼 아프고 불행한 세계의 상처 위에, 가만히, 다만 가만히. 

 

 

고래를 기다리며/안도현(13))

 

고래를 기다리며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고래를 기다리는 동안

해변의 젖꼭지를 빠는 파도를 보았지요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 바다가 바로

한 마리 고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사람들은 왜 모를까/김용택(12)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키 큰 남자를 보면/문정희(11)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 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단추를 채우면서/천양희(10)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고도를 위하여 / 임영조(9)

면벽 100일!
이제는 알겠다, 내가 벽임을
들어올 문 없으니
나갈 문도 없는 벽
기대지 마라!
누구나 돌아서면 등이 벽이니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마음속 집도 절도 버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귀양 떠나듯
그 섬에 닿고 싶다

간 사람이 없으니
올 사람도 없는 섬
뜬구름 밀고 가는 바람이
혹시나 제 이름 부를까 싶어
가슴 늘 두근대는 절해고도여!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가서 동서남북 십리허에
해골 표지 그려진 금표비(禁標碑) 꽂고
한 십 년 나를 씻어 말리고 싶다

옷 벗고 마음 벗고
다시 한 십 년
볕으로 소금으로 절이고 나면
나도 사람 냄새 싹 가신 등신(等神)
눈으로 말하고
귀로 웃는 달마(達磨)가 될까?

뒤 어느 해일 높은 밤
슬쩍 체위(體位) 바꾸듯 그 섬 내쫓고
내가 대신 엎드려 용서를 빌고 나면
나도 세상과 먼 절벽 섬 될까?
한평생 모로 서서
웃음 참 묘하게 짓는 마애불(磨崖佛) 같은.

 

 

뼈아픈 후회/황 지 우(8)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에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언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高熱)의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自請)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나의 희생, 나의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 주는 바람뿐

 

         화엄에 오르다 /김명인(7)

 

어제 하루는 화엄 경내에서 쉬었으나
꿈이 들끓어 노고단을 오르는 아침 길이 마냥
바위를 뚫는
천공 같다, 돌다리 두드리며 잠긴
山門을 밀치고 올라서면 저 천연한
수목 속에서도 안 보이는
하늘의 雲板을 힘겹게 미는 바람소리 들린다
간밤에는 비가 왔으나, 아직 안개가
앞선 사람의 자취를 지운다, 마음이 九折羊腸인 듯
길을 뚫는다는 것은
그렇다, 언제나 처음인 막막한 저 낯선 흡입
묵묵히 앞사람의 행로를 따라가지만
찾아내는 것은 이미 그의 뒷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엇이 이 산을 힘들게 하느냐
길은, 누군들에게 물음이
아니랴, 저기 산모롱이 이정표를 돌아
의문부호로 꼬부라져 羽化登仙해 버린 듯 앞선 일행은
꼬리가 없다, 떨어져도 떠도는 산울림처럼
이 허방 허우적거리며 여기까지 좇아와서도
나는 정작 내 발의 티눈에 새삼스럽게 혼자 아픈가
길섶 풀물에 든
낡은 經소리 한 구절 내내 떨쳐 버리지 못해
시큰대는 발자국마다 마음 질척거리는데
화엄은 화음 속에 얼굴을 감추고 하루종일
굴참나무 잔가지에 얹히는 經典을 들어 나를 후려친다

            

 

산정묘지(山頂墓地)/조정권(6)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뭍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 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山頂)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消去)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裸木)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상(天上)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명령을 내리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處所)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白夜)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 누르지 않는다면

 

 

 

떠도는 환유 1 / 김승희(5)

 

몇 마장인지 알지 못할

장마비가 연일연일 내리고 있다,

창이 좁아서인지

세상이 위태하리만치 어두워진다,

어둡고 긴, 무슨 포식의,

동물 창자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

---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긴 너무 어두워요, 말 좀 해봐요,

--- 말하면 뭘하니? 넌 날 볼 수가 없잖아.

--- 그래도 괜찮아요, 말하면 밝아질 테니까요.

 

세상엔 벽이 되려는 창과 창과 싸우는 사람과

창이 되려는 벽과 싸우는 사람.

그렇게 두 진영의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자택인 듯이

살고 있는 것 같다,

나, 나, 나라는 나가비는

영구 임대주택인 듯이. 아니, 아니,

임시 임대주택인 듯이 生을 대하며

조만간 흘러가 버리고 말 것 같다,

너무 쉽게 흘러가 주는 것은 아닐까?

 

가끔씩 조명이 너무 어둡다고

투덜대기나 하면서 -----

위조여권 같은 말을 따라서

출렁출렁--- 글썽글썽 ----

 

 

 

떠도는 환유 5 - 무어라고 불러야 좋을까

 

사랑도, 눈물도, 진짜가 아닌 것 같애,

사랑 비슷한

눈물 비슷한

흔적 비슷한

분노 비슷한

그런 비슷한 것들이 나 비슷한 것들을

감싸고

한 줄기 햇빛의 선 속에 우우 우우

갇혀 떠도는 먼지처럼

생 비슷한 것들을 이루고 있어

 

나 비슷한 것들아

시대 비슷한

나라 비슷한

지식인 비슷한

고뇌 비슷한

외침 비슷한

절망도 낙천도 아닌

어스름 비슷한

이 향방의 묘혈 속에서

 

죽음 비슷한 生이 있어

살지도 죽지도 못하고

엄마 비슷한

아내 비슷한

자식 비슷한

교수 비슷한

시인 비슷한 것들을

배우 비슷하게

은막 비슷한 곳에서

 

너, 참, 정말, 무엇에 널 걸 거니?, 응?, 말해봐,

참, 무엇에든 널 걸어야 할 거 아냐?

이런 닦달 속에서도, 아무데도 날 걸지 않는,

 

아무데도 날 걸 수가 없는, 걸 것이 없는, 파쇄된

나를, 아니 나 비슷한 것들을 데리고,

사전꾼처럼 사기꾼, 아니 무한히 높은 곳에서

밀어버려 무한낙하로 산산이 엎어지고 있는

사닥다리의 해방처럼......

 

숨길 수 없는 노래 /이성복(4)

 

1.

어두운 물 속에서 밝은 불 속에서

서러움은 내 얼굴을 알아 보았네

아무에게도 드릴 수 없는 꽃을 안고

그림자 밟히며 먼 길을 갈 때

어김없이 서러움은 알아보았네

감출 수 없는 얼굴 숨길 수 없는 비밀

서러움이 저를 알아보았을 때부터

나의 비밀은 빛이 되었네 빛나는 웃음이었네

하지만 나는 서러움의 얼굴을 알지 못하네

그것은 서러움의 비밀이기에

서러움은 제 얼굴을 지워버렸네

 

2.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봄하늘 아득히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을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

 

3.

내 지금 그대를 떠남은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길이 끝난 자리에 서 있는 두 개의 고인돌 같은 것을

그리고 그 사이엔 아무도 발 디딜 수 없는 고요한 사막이 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오랜 저녁빛에 눈먼 두 개의 고인돌 같은 것을

내 지금 그대를 떠남은 내게로 오는 그대의 먼 길을 찾아서 입니다.

  

4.

내 그대를 떠난 날부터 그대는 집을 가졌네 오직 그대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집, 그대의 무덤

난 그대의 집으로 들어갈 수 없네 오직 그대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집, 내 떠나므로 불 밝은 집

내 그대를 떠난 날 부터 그대는 집을 가졌네 상처처럼 푸른 지붕과 바람처럼 부드러운 사면의 집

내 그대를 떠남은 그대 속에 나의 집을 짓기 위해서라네 상처처럼 푸른 지붕과 바람처럼 부드러운 사면의 무덤

 

 

임진강에서/정호승(3)

 

아버지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임진강 샛강가로 저를 찾지 마세요
찬 강바람이 아버지의 야윈 옷깃을 스치면
오히려 제 가슴이 춥고 서럽습니다

가난한 아버지의 작은 볏단 같았던
저는 결코 눈물 흘리지 않았으므로
아버지 이제 그만 발걸음을 돌리세요

삶이란 마침내 강물 같은 것이라고
강물 위에 부서지는 햇살 같은 것이라고
아버지도 저만치 강물이 되어
뒤돌아보지 말고 흘러가세요

이곳에도 그리움 때문에 꽃은 피고
기다리는 자의 새벽도 밝아옵니다
길 잃은 임진강의 왜가리들은
더 따뜻한 곳을 찾아 길을 떠나고

길을 기다리는 자의 새벽길 되어
어둠의 그림자로 햇살이 되어
저도 이제 어딘가로 길 떠납니다

찬 겨울 밤하늘에 초승달 뜨고
초승달 비껴가며 흰 기러기떼 날면
그 어디쯤 제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오늘도 샛강가로 저를 찾으신
강가에 얼어붙은 검불 같은 아버지

 

 

 

우리나라의 숲과 새들 / 송수권(2)

 

나는 사랑합니다 우리나라의 숲을 늪 속에 가라앉은 숲이 아니라

맑은 신운이 도는 계곡의 숲을 사계절이 분명한 그 숲을

철새 가면 철새 오고 그보다 숲을 뭉개고 사는 그 텃새를

더 사랑합니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신다든가 뱁새가

작아도 알만 잘 낳는다든가 하는 그 숲에서 생겨난 숲의

요정의 말까지를 사랑합니다.

 

나는 사랑합니다 소쩍새가 소쩍소쩍 울면 흉년이 온다든가

솔짝솔짝 울면 솥 작다든가 하는 그 흉년과 풍년 사이

온도계의 눈금 같은 말까지를, 다 우리들의 타고난 운명을 극복하는

말로다 사랑합니다. 술이 깬 아침은 맑은 국물에 동동 떠오르는

동치미에서 싹둑싹둑 도마질하는 아내의 흰 손이 보입니다. 그 흰 손이

우리나라 무덤을 이루고, 동치미 국물 속에선 바야흐로 쑥독쑥독

쑥독새가 우는 아침입니다.

 

나는 사랑합니다 햇솜 같은 구름도 이 봄날 아침 숲길에서

생겨나고, 가을이면 갈꽃처럼 쓸립니다. 그보다는 광릉 같은 데,

먼 숲길쯤 나가보면 하얗게 죽은 나무들을 목관악기처럼 두들기는

딱딱구리 저 혼자 즐겁습니다.

 

나는 사랑합니다 텃새, 잡새, 들새, 산새 살아 넘치는

우리나라의 숲을, 그 숲을 베개 삼아 찌르륵 울다 만 찌르래기새도

우리 설움 밥투정하는 막내딸년 선잠 속 딱꾹질로 떠오르고

밤새도록 물래를 감는 삐거덕, 삐거덕, 물래새 울음 구슬픈

우리나라의 숲길을 더욱 사랑합니다.

 

 

 

그릇 1 / 오세영 <1986년>---1회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理性)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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