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6년 주보

사순 제 2주일 2016년 2월 21일 (다해)

모든 2 2016. 2. 21. 22:00

 응봉 성당(홍성지구)

본당 설립:1986.4.1/주보성인:예수 성심

 

  +  루카 복음. 9,28-36

 

  <예님께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난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말씀의 향기>

 

욕심을 버리고 변화됩시다. -이광근 베드로 삼성동 주임

 

  우리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남보다 더 잘나 보이려는 욕심, 인정받으려는 욕심, 칭찬받으려는 욕심, 재물에 대한 욕심, 권력이나 명예에 대한 욕심 등등 너나 할 것 없이 많은 욕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욕심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이웃과 마음 상하고 불행하게 됩니다. 성경에도 욕심이 죄악을 낳고 죄악이 죽음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욕심으로 가득한 사람의 얼굴은 항상 불만스럽고 찡그러져 있습니다. 사순시기는 이러한 욕심을 버리는 시기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울 때 우리 얼굴이 환히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거룩한 변모, 즉 환하게 빛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얼굴이 변하고 의복이 하얗게 번쩍이는 모습이 얼마나 황홀했던지 베드로 사도는 초막 셋을 지어 드릴 테니 여기서 오래오래 살아가자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 뒤에 찾아올 부활하신 모습을 잠깐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욕심을 버릴 때 그렇게 환하게 빛나는 모습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번  사순시기에 우리도 변화되도록 노력합시다.  예수님을 닮아서 우리의 삶과 얼굴이 환하게 빛나도록 변화합시다. 그동안 미움으로 살아오신 분들, 사랑으로 살아갑시다. 상대방이 변화되시길 바라지 말고 내가 먼저 변화합시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깨끗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오신 분들 이제는 남을 위해 살아 봅시다. 그동안 땅만 바라보며 살아오신 분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약속을 마음에 새겼듯이 하늘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며 살아갑시다. 세상 것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오신 분들, 천상 것을 추구하며 살아갑시다. 남에게 인색하게 굴며 살아오신 분들, 자비를 베풀며 살아갑시다. 거짓말처럼 하며 살아오신 분들, 이제는 진실되게 살아갑시다. 이러한 노력을 꾸준히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사순시기는 회개와 은총의 시기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돌아서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주어지는 시기입니다. 그 은총으로 우리는 변화됩니다. 환하게 빛나는 모습으로 변하기 위한 사순시기를 보내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갑시다. 예수님과 같이 영광된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 욕심을 버리고 사순시기를 보내도록 합시다.

 

 

<고해성사 다시 보기(3)>

 

고해성사, 화해하는 기쁨의 잔치

 

  어느 더운 여름날, 어떤 사람이 길을 가고 있었다. 그의 눈에 반대쪽에는 또 다른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자전거를 짊어지고 오는 것이 보였다. '자전거를 타면 더 빨리 갈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그는 자전거를 지고 오는 사람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저는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데요.."

 

  실제로 이런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우화(寓話)는 현대인의 신앙생활 특히 고해성사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생길을 더 편하고 더 신나게 달리라고 우리에게 '신앙'이라는 자전거를 선물하셨다. 처음에는 자전거 타는 법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동네 여기저기를 신나게 쏘다닌다. 그러다 언제부터인지 신앙이라는  자전거는 우리 관심에서 멀어져 마당 한구석에서 차츰 먼지만 쌓여간다.

 

  우리네 신앙생활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싶다. 처음에 세례를 받고 성당에 나올 때는 좋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 순간 기쁨은 사라지고 세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강한 관성이 생길 때쯤이면 이미 신앙은 녹슨 자전거가 되기 쉽다. 더욱이 고해성사라는 소중한 자전거는 이미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어버렸음을 발견하게 된다.

 

  고해성사라는 자전거가 이미 녹슨 듯한 이 시대에 고해성사에 대한 참 의미와 필요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이면서 공통된 욕구 중 하나는 속죄(paenitentia)를 통해 신(神) 혹은 다른 사람과의 일그러진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많은 종교들은 이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일정한 예식을 통해 표현해 왔는데, 유다인들의 경우, '참회의 날'이면 자신들의 죄 목록을 멘 속죄양을 사막으로 보냄으로써 하느님께 용서받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요구하신 것은 '속죄'가 아니라 '화해'(reconciliatio)이다. 즉 '아버지와 다시 하나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화해가 참되게 이루어지면 늘 '기쁨의 축제'가 따른다.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작은 아들에게 아버지는 그 어떤 문책이나 추궁도 없이 아들을 껴안고 잔치를  벌인다.(루카 15장 참조)

 

  이처럼 고해성사는 한 죄인이 하느님과 공동체와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기쁨의 잔치'이다. 자신의 죄 때문에 그분을 멀리할 수 밖에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속죄 행위가 선행될 필요는 없다. 자캐오의 경우처럼 참다운 화해가 이루어지면 선행은 자연스레 따라오기 마련이다.(마태 19,8) 우리는 그저 두 팔을 벌려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감사히 응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의 이 응답은 무엇보다 하느님께 큰 기쁨을 드리게 된다.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2)

 

-송인찬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성사신학)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98)>

 

속눈썹에서 쏟아지는 별들

 

  사랑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꼬마 아이들은 어떻게 답했을까요? 얼마 전 신문에서 그들의 대답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대답들이 어른들에게는 거꾸로 사랑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이 되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엄마가 아빠를 위해 커피를 만들고선 맛있는지 보려고 한 입 먹어보는 것"(대니, 7세)


  아이의 눈에 비친 사랑은 이처럼 단순했습니다.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일, 그게 사랑의 전부였습니다. 미리 맛본 아빠의 커피 한 모금이면 충분할 사랑.. 어른이 되면 우리는 왜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일이 복잡해지는 걸까요?


  자신이 받고 있는 기쁨을 계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으로 사랑의 계산은 끝나야 합니다. 주기만 하고 받지 않는 계산법은 물건의 거래에서는 손해지만, 사랑의 거래에서는 몇 배로 불어나는 행복의 결과를 만듭니다.


  "사랑을 더 잘하려면, 싫어하는 친구랑 잘 지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해요."(니카, 6세)


  참으로 엉뚱하면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시달리다 보면, 오히려 싫어하는 친구를 멀리할수록 사랑이 더 잘 될 거라는 확신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친구들하고만 지내는 건 사랑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랑은 관리된 '분재'가 아니라, 성장하는 나무입니다. 좋아하는 친구가 아니라 싫어하는 친구와 함께 서 있는 것, 그 순간이 참사랑이 시작되는 지점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엔 하느님이 보내신 꼬마 천사가 많지만, 우린 그들의 날개를 보지 못하고 늙어갑니다. 그 꼬마 천사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 그게 세월이 흘러도 불멸의 삶을 사는 법은 아닐까요?


  창문을 열어 겨울밤 하늘을 바라보니 일곱 살 꼬마 '카렌'의 대답이 떠오릅니다. "누구를 좋아하게 되면 속눈썹을 깜빡거리게 되고 그 안에서 별이 쏟아져 나와요."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참 아름다운 밤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난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 생긴다는 것

 

예쁜 생각이

든다는 것은

예뻐할 일이 생긴다는 것

 

예수님의 영광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가족 사랑의 증명은 이렇게... -권혁주-

 

1. 평소에 가족과 눈을 맞추고 충분한 대화를 하세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눈을 보는 겁니다.

눈은 마음을 이어주는 통로입니다.

눈을 보는 척하면서 코를 보거나 인중을 보지 말고 눈동자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따뜻한 눈빛으로 마음의 대화를 하세요,

 

2.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라는 표현을 자주 하세요.

표현하지 않고 가슴에 쌓아두는 건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표현을 할 때도 반드시 가족의 눈을 보며 해야 합니다.

 

3. 하루에 한 끼는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하세요.

가족의 다른 말인 '식구(食口)'는 한집에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입니다.

식사하면서 대화를 많이 나누되 일방적인 지시나 훈계는 금물입니다.

 

4. 하루에 한 번은 서로를 꼭 껴안아주세요. 부부가 먼저 모범을 보이세요.

그리고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해주시면 금상첨화입니다.

참고로 심리 전문가들은 하루에 열두 번의 포옹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5. 문자, 카카오톡, 이메일, 편지 등을 자주 주고받으세요.

요즘은 스마트폰이 발달하였으니 '가족 카카오톡방'을 만들어서 서로의 일상과 감정을 주고받기를 권합니다.

 

6. 정기적으로 가족과 함께 여가를 보내는 시간을 가지세요.

여러 조사를 살펴보면 가족이 함께하기에 가장 좋은 여가는 역시 '여행'입니다.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나세요.

 

7. 가족에게 기쁜 일이 있을 때 함께 웃어 주세요.

그리고 칭찬해 주세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지만, 고래는 단 한 번의 칭찬으로 춤추지 않습니다.

꾸준히, 일관적으로, 진심으로 칭찬해 주세요.

 

8. 가족에게 슬픈 일이 있을 때 함께 울어 주세요.

"괜찮아! 울지 마!"라는 표현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냥 곁에서 지켜봐 주세요.

손을 잡아주고, 등을 토닥여주고, 꼭 안아주세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9.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세요. 억울하고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드실 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생각하세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가족을 용서하세요.

 

10. 서로를 위해 함께 기도하세요. 특히 가족이 함께 미사에 참례하시기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미사 전 고해성사도 보시고. 평화의 인사 때 가족을 꼭 안아주세요.

 

사랑을 아는 것과 사랑을 하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다시 한번 여쭈어보겠습니다.

"당신은 가족을 사랑합니까?"증명해 주세요!

 

 

-경향잡지"가족 사랑을 증명해 주세요 中"-